Robert Lois Stevenson은 “사람들은 뭔가를 팔면서 살아간다(Everybody lives by selling something)”고 말했단다. 맘속으로는 “쟤 또 뭐 파는 거야?”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신성한 학문 공동체인 대학이 팔고 사는 장터이고, 교수와 학생이 뭔가를 주고받는 교환관계로 보이나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 하루
연륜에 따른 대학 강의의 특징에 관한 오래된 농담이 있다. 30대 교·강사는 자기도 잘 모르는 내용을 밤샘 공부해서 학생들에게 열변을 토해낸다면 40대 선생은 자기가 아는 범위에서만 살포시 가르친다. 50대 중진교수가 수강생들이 이해할 만큼만 펼쳐낸다면 60대 원로교수는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즉흥적으로 강의를 이끈다. 소위 수업제작자와 교육소비자 사이에
학생들에게 “대학생활이 어떠했는가?” 묻는다. 그때마다 대답은 “그냥 그저 그렇다”이다.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도 섭섭한 것은 아마도 내심 ‘만족했다’거나 ‘좋았다’는 대답을 기다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피트 몬드리안과의 만남. 코엑스 반디앤루니스에서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김주경 역. 시공아트, 2012)을 발견하고, 반 고흐의 자화상이 10위
어느덧 한해가 저물어 간다. 학기말 고사를 코앞에 둔 학생들은 모두가 바쁘고 긴장된 표정들이 역력하다. 필자가 대학을 다녔던 1980년대에도 시험을 앞두면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를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러나 그 당시 졸업을 앞둔 4학년들 대다수가 대학생활의 대미를 장식하고 사회진출이라는 부푼 희망에 들떠있곤 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요즘 학생들에게는
아름다운 안성교정에는 여느 때처럼 은행나무 잎사귀가 진입로를 색 노랗게 물들이고 이내 떠난 후, 초겨울의 전령이 교정 곳곳에 찾아들고 있습니다. 캠퍼스 통합으로 학생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교정의 쓸쓸함은 여느 해 이맘때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도서관 앞 승차장 2층의 식당 주인아저씨는 밤늦은 시간까지 오지 않는 고객들을 기다리며 점점 줄어
이번 중앙일보 대학평가의 8위라는 기사를 접하면서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글을 쓰게 됐다. 내 대학원생이 학부와 석·박사 통합과정을 통해 박사과정에 있으면서 군대를 갔다 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많은 남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걱정하는 것이 군대문제다. 학생들이 군 문제를 상담하러 오면 참 어렵다. 학생의 역량이라든지 가정 형편 등을 고려
교양과목을 맡은 이후 다양한 학과의 멋진 학생들을 만나게 되어 강의하기 전날에는 기분 좋은 긴장을 하게 됩니다. 강의는 문화적인 관점에서의 건강과 질병에 관한 것인데 강의 내내 인간의 가치와 경제성에 관하여 마음 속에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전공분야가 의학이라서 그런지 인간의 존엄성을 경제적으로 평가하는 현실에 대해 마음이 불편합니다. 이 불편함은 나의
예술대학에서 비평과 이론을 가르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물론 예술의 역사 안에서 그에 대한 정의는 적지 않게 나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술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정답은 없다. 어쩌면 그 ‘정답 없음’이 예술의 유일하게 가능한 정의인지도 모른다. 다른 학문들이 정확한 답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에 반
요즘 사회학자로서 우리 사회를 지켜보면서 당혹감을 느낄 때가 많다.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따뜻한 공동체의 모습을 잃고 그저 시장 논리에 따라 생존경쟁을 위해 치열한 경쟁이 난무하는 냉혹한 정글로 변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우리 대학사회도 예외가 아닐 듯하다. 학점경쟁의 학생들로부터 취업경쟁의 졸업생들, 업적경쟁의 교수들, 그리고 대학순위 경쟁에 몰두
한국과 일본의 물리학 발전의 격차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일본 물리학자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유교 전통의 쇄국, 상공경시 등의 배경이 현장에서 느끼는 격차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놀랍게도 그가 생각한 원인은 일제강점기의 과학과 기술교육 억제정책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토모나가’와 ‘유가와’가 60년대에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3,40년대
어느덧 가을이 깊어간다. 84년부터 중앙대에서 일을 시작하여 피아노와 씨름하며 보낸 그간의 세월이 실감나지 않는다. 피아노는 수천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88개 건반은 230여 개의 현을 가지며, 그랜드 피아노의 철골 프레임에 가해지는 장력은 수십 톤(t)에 이른다. 반면 페달의 기능까지 더하면 피아노의 음색은 0.003초의 찰나에 결정된다. 양손
‘100주년 기념관 및 경영경제관 기공식’이 지난 2일 서울캠퍼스 대운동장에서 거행됐다. 개교 10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특히 기념관은 명문사학 중앙대학교의 역사를 담아내는 시설물이라는 점에서 기대가 크다. 하지만 기념관의 규모나 운영 계획에 대해서는 아직도 알려진 바 없는지라, 이 참에 제안 하나 하고자 한다. 기념관의 기능을 복합기능의 전시관으로 확대해
나는 예술소통학, 수사학, 기호학 등의 방법론을 가르치고 또 예술작품의 의미를 분석해 내는 것을 가르친다. 예술작품의 의미에는 줄거리라고 하는 보편적인 의미와 주제라고 하는 수용자 개인의 특수한 의미의 차원이 있다.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는 줄거리의 파악이 중요하지만 작품의 가치는 주제의 파악에서 온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 주제의 파악을 강조하는데, 이때
7월 28일 밤, 꾸준히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잠실종합운동장을 찾아간 이유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아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겠다는 일념 외에는 없었다. 아들은 외울 게 너무 많다고 한국사 공부를 어려워했고 지겨워했다. 시험 때만 벼락공부를 하니 성적이 잘 나올 리 없었다. 언젠가 왜 일본 정치인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하려 드는지 물어보기에 어설픈 역
지난 7월 18일부터 개최되었던 제20차 국제 비교문학회(International Comparative Literature Association) 세계대회를 다녀왔다. “비평방법으로써의 비교문학”이란 대주제를 가지고 소르본느 파리 4대학에서 열린 이 대회는 전 세계 40여 개국에서 700명이 참가했으며 160개의 세션 논문발표, 308개의 워크숍, 95개의
외국에서 호텔에 숙박을 하게 되면 웬만한 규모의 호텔인 경우 대부분 아침 식사가 제공됩니다. 이때 예약확인서에 ‘컨티넨탈’ 아침 식사라는 표현이 적혀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요. 여기서 ‘컨티넨탈’은 ‘유러피안’의 의미라는 것은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컨티넨탈’ 아침 식사는 대개 가벼운 음식, 예로 커피 또는 홍차, 크로아상 같은 빵류, 그리고 작은 크기의
“교수님, 성공적인 대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잘 노세요. 단, 노력해서 열심히.” 이번 학기 초 속리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어느 신입생이 내게 던진 질문과 이에 대한 나의 우답(愚答)이다. 노는 것이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이 여겨지던 세상에서, 이제는 잘 노는 아이가 공부 더 잘하고, 잘 놀 줄 아는 직장인이 더 성공할 수 있다는 세상
수업시간에 출석을 부르면서 결석하거나 지각한 학생들을 출석부에 표시하다보면 반드시 그러한 건 아니지만 대개 같은 학생이 반복해서 지각을 하거나 결석을 하는걸 알게 된다. 수업시간에 앉는 자리도 학기 초에 앉는 자리가 학기말이 되어서도 거의 바뀌지 않고 심지어는 맨 앞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졸업할 때까지 계속 앞자리에서 수업을 듣는 경우가 많다. 특별한
우리말에서 ‘잘살다’와 ‘잘 살다’는 의미 차이가 있다. 앞의 붙여 쓴 ‘잘살다’가 물질적 풍요와 관련된 것이라면, 뒤의 띄어 쓴 ‘잘 살다’는 정신적 풍요와 윤리적 삶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잘 살기’보다는 ‘잘살기’에만 막무가내로 집착하고 있다. 물론 ‘잘 살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잘살기’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
융합이 대세다. 1990년대부터 미국에서 과학(S), 기술(T), 공학(E), 수학(M)의 융합을 의미하는 STEM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인문학적 가치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1998년 과학과 인문학의 통섭을 강조한 윌슨(Edward Wilson)의 『통섭』(Consilience)이 출간된 후, 인문학의 가치가 부각되었다. 그리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