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에게 대학생활이 어떠했는가?” 묻는다. 그때마다 대답은 그냥 그저 그렇다이다. ‘으레 그러려니하면서도 섭섭한 것은 아마도 내심 만족했다거나 좋았다는 대답을 기다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피트 몬드리안과의 만남. 코엑스 반디앤루니스에서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김주경 역. 시공아트, 2012)을 발견하고, 반 고흐의 자화상이 10위 안에 몇 개나 들어있을까라는 뜬금없는 호기심으로 책장을 넘기던 중, 몬드리안의 뉴욕 1941/부기우기(New York 1941/Boogie Woogie)’가 그곳에 있었다(p.135). 200411월 경매 가격 21백만 달러, 한화 2376천만 원. 두 가지 의문에 사로잡혔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비쌀 수가?’ ‘그런데 이것도 그림인가?’ 몇 가닥의 굵은 검은색의 가로와 세로 선을 교차시켜 직사각형을 만든 것이 전부로, 나무나 사람도, 빛이나 그림자, 심지어 대각선이나 곡선, 그 어떤 회화적 표현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 엄청난 가격은 무엇을 말하는가? 나의 무지 그 이외에 다른 어떤 답을 찾기 힘들었다. 불편하고, 곤혹스러웠다. 이후 자괴감은 스스로 덩치를 키워 반 고흐의 자화상을 볼 때마다, 어김없이 몬드리안도 떠올랐다.

두 번째 만남. 대학원생 졸업 사진 작품전 선과 선(Line & Line)’. 사진전이나 작품은 모두 굵은 검은 선, 그리드(grid), , 도형들의 집합(?)으로, 나는 곧 몬드리안의 작품을 연상했다. 피터 왓슨이 생각의 역사2’(20세기 지성사, 2009. p.553)에서 몬드리안의 작품을 가리켜 강렬한 격자의 표현이 어떻게 회화의 낡은 범주를 밀어내는가?’를 보여준다고 한 것도 떠올렸다. 작가도 몬드리안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노라 말했다. 난 그때쯤 작가 노트를 읽었고, 작가는 관객의 새롭고 참신한 감각적 역량을 만나, 작품이 그 폭과 깊이를 더하고 나아가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재창조되기를 기대한다고 썼다. 관람객에게 작품을 바라만 볼 것이 아니라 완성해 달라는 것이다.

19세기 리얼리즘 작가들은 극사실적 표현에 집중했고, 관람객은 타자의 입장에서 감상했다. 하지만 모더니즘에 오면 사정은 달라진다. 작가들은 재현이나 묘사를 버리고 자신의 해석과 느낌을 추구한다. 작품에 객체를 끌어들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조차도 거부한다. 작가가 자기의 느낌에 충실하면, 관람객은 자신의 체험과 감성으로 작품의 남은 느낌을 완성해 줄 것을 요구한다. 위대한 작품은 작가와 관람자가 함께 만든다고 믿는 까닭이다.

대학은 인류가 도전과 실험, 땀으로 일구어 온 지적 유산을 모아둔 곳이다. 위대한 인물들의 창조적 열정과 고민뿐만 아니라 실패와 반성, 미완의 과제들로 가득하다. 학생들이 대학에서의 생활이 어떤 것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만의 특권이자 영광이다. “대학생활, 어떻게 할 것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은 답한다. “대학과 학생이 함께 만드는 것이다.”라고. 대학생활을 어떤 것으로 만들 것인가는 학생들 자신이 완성해야 할 몫이리라.

박흥식 교수(공공인재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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