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의 물리학 발전의 격차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일본 물리학자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유교 전통의 쇄국, 상공경시 등의 배경이 현장에서 느끼는 격차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놀랍게도 그가 생각한 원인은 일제강점기의 과학과 기술교육 억제정책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토모나가’와 ‘유가와’가 60년대에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3,40년대 이전에 ‘자연에 대한 탐구’로서의 과학을 추구하였기 때문이고, 그 영향력의 파급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시에 일본이 분명하게 의도했던 식민지 정책 때문에 우리는 과학의 중요성을 모르고 살아 왔고, 따라잡기도 만만치 않다. 
 
  해방 후 대한민국 출범시점에 낙후된 것이 비단 과학과 공학뿐이었으랴 만은, 개인의 노력과 우수한 자질만으로 성장할 수 없고 시스템의존도가 높은 과학은 다른 분야에 비해 국제무대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올해도 노벨상발표는 뜨겁다. ‘우리는 언제?’ 10년, 20년? 미안하지만, 요원하다고 본다. 가끔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과학자를 예측하는 기사가 나오는데, 그럴듯한 업적으로 노벨상을 받을 것 같은 후보군은 일본에 더 많다. 일본이 과학상을 받는 것을 또 구경하리라.
 
  현재 격차의 원인이 외부요인에 7할이 있었다면, 미래에도 희망이 없는 것은 7할 이상 우리 책임이다. 대외 경쟁력을 따져보니 쳐졌다고 해서 과학과 기술이 선택과 집중이라는 프레임에서 밀려나도 되는 분야인지 묻고 싶다. 우리나라 과학은 비즈니스의 일환으로 발전(?)되어 왔다. 그래서 과학과 기술은 간혹 혼동되기도 하고 기업의 이윤을 낼 수 없다면, 분야자체의 존재이유를 의심받았다. 특정기업들이 세계시장을 장악했다고 기술 수준을 자평하면서 돈도 못 버는 과학은 상도 못 받는다고 지탄한다. 
 
  산업체가 원하는 인재, 사회가 원하는 인재, 미래가 원하는 인재는 일치하는가? 대학의 역할을 자문해본다. 미래지향적인 사회라면 미래의 요구에 부합하겠지만, 요즘 사회는 과거 때문에 피곤하다. 현재 대학생들이 사회를 짊어지고 있을 미래는 언제쯤인가? 2050년대? 그 훗날 세상이 어떨지 아무도 모른다. 예측하고 싶다면, 그것은 과학의 추이를 읽어야 가능한 것이고 켄 로빈슨의 말대로 미래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음 세대를 창의성과 혁신으로 기르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 대해, 비과학 전공자의 목소리가 나왔다면 좋았으련만, 기대하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설파하는 ‘도(道)’만큼이라도 ‘과학’과 맞닥뜨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에 대한 관심도, 관점도 없는 이들이 통상외교를 하고 대학과 교육정책을 만들었다. 우리의 현주소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법이든, 돈이든, 사회, 정치, 역사, 교육, 문학이나 예술이든, 과학을 소양으로 삼아 미래를 준비하는 도전이 없다면, 이제는 노벨상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을 보호하는 과학과 기술을 확보하지 못한다.
김시연 교수(물리학과)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