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유의 첫 시집은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라니. 불온한 상상이 든다 한들 우리 탓은 아닐 것이다.‘날 감당할 수 있으면 한 번 읽어 보든가’라고 말하는 듯한 시집을 펼쳐 든다. 시인의 말마따나 “이곳에서 일어날 일은 이미 다 일어났다.” 하늘 아래 새로울 것이 없는 이런 시대에 시를 쓰는 일, 그 곤혹과 마주선 주
최근 강남역 인근에서 일어난 여성혐오범죄 뉴스를 보며 잊고 있던 영화가 불현듯떠올랐다. 26년 전 개봉한 는 성폭행을 당한 여성을 죄인 취급하는 사회 분위기와 피해 여성 의 인권 문제를 공론화한 영화였다. 2014년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린 또 한 편의 영화 에서 그려진 현실도 1990년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폭력이 난무하는 시절이다. 대놓고 안면을 후려갈기거나 돌아서자마자 뒤통수를 가격하는 폭력뿐 아니라 목숨줄을 움켜쥐고 갑질을 해대거나 소중한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마저 험한 말을 쏟아내는 폭력이 도처에 널려 있다. 먼저 때리지 않으면 당할 거라는 공포감과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폭력의 악순환은 계속된다. 김승일의 첫 시집 『프로메테우스』는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시적 주체의 통렬한 고백으로 가득하다. 피비린내와 욕설이 자욱한 이 시집은 저마다의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폭력의 기억을 소
『칸트의 동물원』,『우리들의 진화』,『차가운 잠』에 이르기까지 세 권의 시집을 관통하는 이근화의 상상력은 ‘내가 아닌 사람을 향해 나아가고 싶어하는 나’(『쓰면서 이야기하는 사람』)와 그 사이를 흐르는 생활의 감각이다. 장을 보고 마늘을 까고 식사를 준비하는 일상의 풍경이 이근화의 시에는 자주 등장하지만 그녀의 시는 일상의 풍경으로부터 멀리 달아난다. 이근
시를 쓰고 싶었던 이십대 초반에 이성복의 시를 읽으며 절망을 배우고 우울을 배웠다. 눅진하게 깔려 있던 지독한 무기력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자주 넘어졌고 그때마다 멍이 들었다. “달아나면서 꿈꾸며 다리/앞에서 검문당하고 나는 돌아왔지만 내 꿈은 돌아오지/못하”(『소풍』)고 길을 잃었던 그 시절, 그의 시를 읽는 일은 깜깜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인 동시에 그
너무 아름다워 훔치고픈 노래가 여기 있다. 진은영의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녀의 언어가 빛을 머금고 있다고 느꼈다. 첫 시집의 표제시 에서 혁명을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로, 시를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로 표현한 것을 보
술자리가 무르익으면 거구를 일으켜 웅숭깊은 목소리로 자작시를 낭송하던 시인을 기억한다.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기 전부터 이미 시인이었던 이영광은 어느새 네 권의 시집을 낸,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 되었다. 내가 그의 시에 깊이 빠진 것은 『그늘과 사귀다』를 읽고 나서였다. 육친과의 사별이라는 시간을 통과한 시인의 지독한 외로움이 아로새겨진 그 시집을 오래
윤동주는 내게 첫사랑과도 같은 시인이다. 그의 시를 읽고 적고 외우던 기억이 아련하다. 정작 시를 전공한 후에는 윤동주에 대해 글을 쓸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렇게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으로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윤동주의 시가 요즘 다시 소환되고 있다. 지난해 한글날, 현대시인론 수업을 수강한 학생들과 을 방문했었다. ‘심우장-길상사-수연
한 달 후면 눈물 없인 부를 수 없는 그날이 돌아온다. 2014년 4월 16일, 그날로부터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잊히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 유가족들은 그 어느 때보다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얼마 전 고 박성호 군이 2년 뒤의 자신에게 쓴 2년 전 편지가 공개돼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가톨릭 사제를 꿈꾸던 평범한 한 소년의 편지는 ‘세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송경동 지음, 창비 한결같은 자세로,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해온 시인이 있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곁에도,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시위 현장에도,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외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곁에도 그는 늘 있었다. 송경동의 세 번째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가 얼마 전 출간되었다. 한국 사회의 뜨거운 현
『김수영 전집1-시』는 대학생이라면 꼭 읽어야 할 시집 중 하나다. 좋은 시는 시대가 바뀌더라도 현재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살아 있는 시다. 그런 의미에서 김수영이야말로 한국의 시인들 중에서도 ‘패배를 말하면서도 패배주의에 반대하는’ 시의 살아 있는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인이다.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모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