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한해가 저물어 간다. 학기말 고사를 코앞에 둔 학생들은 모두가 바쁘고 긴장된 표정들이 역력하다. 필자가 대학을 다녔던 1980년대에도 시험을 앞두면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를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러나 그 당시 졸업을 앞둔 4학년들 대다수가 대학생활의 대미를 장식하고 사회진출이라는 부푼 희망에 들떠있곤 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요즘 학생들에게는 찾아보기 힘들어 측은하기도 하고 괜한 죄책감까지 들기도 한다. 이미 3년여 전에 김난도 교수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란 책을 통해 이 시대의 무거운 짐을 떠안은 채 불안한 미래 속 외로운 청춘을 보내는 젊은이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전한 바 있다. 그러나 요즘의 취업시장은 어떠한 위로와 격려조차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꽁꽁 얼어 있다. 특히 우리 학생들이 선호하는 대기업의 평균 취업 경쟁률은 28.6대 1에 이르러 가히 하늘의 별따기가 돼버렸다. 그러니 졸업은 희망의 시작이 아니라 절망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절망의 상황이 깊어질수록 어디선가 희망의 빛이 나타나곤 했다. 세계대전을 포함한 크고 작은 전쟁 발발의 비극 뒤엔 반드시 종식의 희망이 뒤따랐고, 단 한 번도 독재자의 악행과 만행이 영원하지는 못했다. 작년 이맘때 우리의 극장가를 달구었던 영화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 역시 부정부패, 빈부격차 등의 사회적 병폐를 뛰어 넘어 절망 속의 희망이었다. 관객들은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무거운 영상의 연속에서도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희망에 뜨거운 호응을 보인 것이다.
 
 요즘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도 희망의 코드를 찾을 수 있다. 드라마를 관통하는 스토리 내에는 진지함이 그다지 없어 보인다. 그저 지금도 대학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국 8도에서 상경한 대학생들의 진부한 사랑 얘기가 중심에 있다. 그러나 소품처럼 줄거리의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그 당시의 굵직굵직한 사건들(김일성 사망,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등)에 가위눌린 상황 속에서도 사랑이라는 희망의 끈을 이어가는 스토리에 시청자들은 자신을 대입시키며 오늘의 절망을 극복하려는 희망으로 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이다.
 
 지금 젊은이들이 힘들어 하는 이유들은 10년 후 돌이켜 봤을 때 웃어 넘길 만한 크기의 고난일 수 있다. 지금 당장은 같이 팀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팀원 하나가 말썽을 피우는 것이, 시험기간과 대외활동이 겹친 것이, 겨울방학을 위해 지원한 인턴이 떨어진 것이 세상이 무너진 것과 같은 짜증과 초조함으로 밀려올 수도 있다. 이 모든 ‘짜증요소’들은 대학생을 가장 대학생답게 만드는, 대학생활을 찬란하게 만드는 조연들로 기억될 것이다. 
 
 2013년의 젊은 중앙인이여!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란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수 없는” 인생이기에 “한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처럼” 타오를 희망의 미래를 설계하며 도서관으로 가는길 어깨를 쭉 펴자.
 
성동규 교수 
신문방송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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