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륜에 따른 대학 강의의 특징에 관한 오래된 농담이 있다. 30대 교·강사는 자기도 잘 모르는 내용을 밤샘 공부해서 학생들에게 열변을 토해낸다면 40대 선생은 자기가 아는 범위에서만 살포시 가르친다. 50대 중진교수가 수강생들이 이해할 만큼만 펼쳐낸다면 60대 원로교수는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즉흥적으로 강의를 이끈다. 소위 수업제작자와 교육소비자 사이에 존재하는 기대의 어긋남과 강의숙련도에 대한 성찰적인 우스개이다. 강의경력이 늘어나는 것과 정비례해서 강의공급량은 감소하고 교·강사-수강생의 상호교류성은 증가한다고 해석할 수 있으리라. 이 잣대로 측량하면 나의 강의는 어디쯤 있을까?
 
고백하자면 지난 수년 동안 나의 강의평가는 변변치 않다. 연구업적과 봉사실적과 비교하면 강의평가는 낙제점(?)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부끄러운 수준이다. 잘 알지 못하는 주제를 학생들의 흥미도 고려하지 않고 들쑥날쑥 일방적으로 떠든 결과가 혹시 아닐까. 대부분 수강생들이 교·강사가 쓴 (훌륭한^^) 논문이나 저서를 스스로 찾아 읽는 대신에 오직 수업을 통해서만 그 선생의 학문세계를 접한다는 측면에서 따져보면, 대학교수 업무 중에서 강의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단 한 명의 수강생이라도 교·강사의 한 마디에 꽂혀인생관과 미래목표를 바꾼다면, 이런 인상적인 강의야말로 교수의 으뜸가는 존재이유라고 해도 과장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좋은강의 혹은 쓸모 있는강의란 무엇일까? ·강사의 교육관이나 전공분야에 따라 다양한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론·개념 바로 세우기가 다른 한편으로는 현장경영의 노하우를 전달하는 것이 강의의 급소일 수도 있다. 때로는 결과와 해결책을 도출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때로는 질문을 제기하는 힘 그 자체가 정답 찾기보다 더 중요한 강의목표가 되기도 한다. 옛날에 배웠던 낡고 짜증나는 질문들이 지금의 명쾌하고 첨단적인 대답들을 이길 때도 간혹 있다. 요즘은 매우 희귀하지만, 벚꽃 휘날리는 국립묘지 언덕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한강을 바라보며 배우거나 가르치지 않았던야외수업이 백 권의 책읽기나 이백 번의 실험실습보다 더 소중하게 기억되기도 한다.
 
우리 대학에서 커리큘럼 인증제도라는 것이 실험적으로 실시될 계획이라고 한다. 평교수 입장에서 구체적인 진행과정과 기대효과를 잘 모르지만, 새 제도가 열심히 수업하지만 강의평가에서 인기 없는 교·강사님들께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교과목 인증제도가 표준지식입 닥치고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가는 착한 대학생들을 대량생산하는 학문적인 테일러주의(Taylorism)로 작동하지 않기를 제안한다. 세계화시대의 진정한 졸업경쟁력은 다양하고도 논쟁적인 강의에 대한 관용과 개방성이 잉태하는 엉뚱한 창조력과 건방진 비판정신에서 싹트기 때문이다. 커리큘럼 인증제도 도입을 계기로 강의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함께 곱씹어보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육영수 교수
역사학과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