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대학에서 비평과 이론을 가르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물론 예술의 역사 안에서 그에 대한 정의는 적지 않게 나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술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정답은 없다. 어쩌면 그 ‘정답 없음’이 예술의 유일하게 가능한 정의인지도 모른다. 다른 학문들이 정확한 답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에 반해, 오히려 정답 없음의 막막함을 견디며, 정답의 바깥에서 자유를 향유하는 것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양하며, 또 모호하다.
 
 하지만 적어도 근대예술이나 예술가의 근본 속성에 대해서는 보편적 동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예술이란 새로우며, 그런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것이라는 점이다. 요즘 영화나 가요 같은 대중문화에서도 한참 표절이 논란거리가 되는데, 하물며 순수예술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근대 시민사회 이전의 예술이 전범을 모방하는 기술에 가깝다면, 19세기 이후의 근대예술은 전범을 해체하며 새로움을 지향하는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신에게서 부여받은 무한의 상상력으로 신의 창조(Creation)를 대신하여 세속의 창조행위(creation)를 하는 일! 그것이야 말로 근대의 예술가들의 자부심의 근거였으며, 최상의 지향점이었다. 낭만주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술사조들은 예술이 자기갱신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관습적 존재이며, 습관의 힘에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어제와 오늘은 크게 다르지 않다. 늘 바뀌어야 한다면, 적응의 스트레스 때문에 그만큼 곤란한 일도 없을 것이다. 특히 성공의 경험과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익숙한 자신의 것으로부터 떠날 이유가 없다. 권력자가 예술가가 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인간은 동시에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과 변화 욕구를 갖고 있다. 새로움 앞에서 놀라움과 탄성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자연스런 반응이 아닌가. 존재와 세계는 변화하는 에너지 자체다. 따라서 고인 물이 썩다는 말처럼, 변화를 멈추는 순간 우리는 생을 다하는 것이다. 그 점은 기업도 마찬가지다. 필름회사 코닥과 모바일폰 제조회사 노키아가 무너지고, 한 시절 스마트폰의 대명사였던 블랙베리가 천덕꾸러기가 된 것은 성공에 취해 변화를 거부한 탓이다. 이런 승자의 저주는 역사에 셀 수 없이 많다.  
 
 우리의 삶만이 아니라 기업이나 한 국가에 있어서도 예술정신, 즉 익숙함과 결별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구글이나 애플, 아마존이나 페이스북 같은 혁신 기업의 성공을 보면서, 또 오늘 트위터의 나스닥 상장을 보면서 새삼 예술정신이 떠올랐다. 떠나지 않으면 새로움도 없다. 익숙한 죽음을 살 것인가, 모호하고 막막하지만 자유로운 예술가적 삶을 살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박철화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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