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일, 명필름 회의실에서 이은 동문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400만 명의 첫사랑이 <건축학개론>이라는 집을 짓기 육여 년 전, 이은 명필름 대표이사는 필운동 주택가에 사옥 한 채를 마련했다. 명륜동 사무실에서 <접속>, <공동경비구역JSA> 등을 내놓으며 일명 ‘명륜동 시대’를 열어갔던 그가 새 출발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층 단독 주택을 개조한 사옥에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시라노; 연애조작단>, <마당을 나온 암탉> 등 히트작을 해마다 쏟아냈다. <코르셋>으로 시작해 이제는 한국영화계에서 톡톡히 한자리를 차지한 ‘명필름’의 현 사무실이 위치를 갖는 순간이다.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개가 꼬리를 흔든다. 개 밥그릇을 들고 있던 이은 대표이사가 웃으며 기자를 맞는다. 부인인 심재명 공동대표이사는 차기작 준비를 위한 미팅에, 딸아이는 학교에 가고 그와 애완견만 남은 것이다. 아내와 합심해 하던 업무가 끝나면 강아지 산책을 시켜주고 잠들기 전 꼬박꼬박 아이와의 대화시간을 갖는 그는 바쁜 일상과는 대조적으로 가정적인 영화인이다. 그럼에도 사무실 벽면에 늘어선 트로피들이 반증하듯 화려한 경력을 만들어내고 있는 프로이기도 하다. 가족과 일을 모두 챙기며 한국영화계를 이끄는 그, 여유롭게 묻어나오는 실력이 놀랍기만 하다.
  -영화학과 출신이다. 진작 영화에의 꿈이 있었나 보다.
  “아니다. 대학 진학을 위한 학력고사를 봤을 때, 점수가 좋지 않아서 영화학과를 선택했다. 실기를 봐서 커버할 수 있으니까 성적 ‘급조’가 가능한 곳이라 생각했다.”
  -딱히 진로를 그리고 간 곳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런 셈이다. 그래서 군대 가기 전까지 주로 놀았다. ‘전통예술연구회’에 들어가서 탈춤을 추기도 했고, 간간이 선배 연극을 돕기도 하며 조금씩 활동했다. 영화보다는 연극에 관심이 많았고, 문화운동 쪽에 흥미가 있었다. 한창 데모할 시기여서 학생운동 하느라 바쁘기도 했다.”
  -제대한 후에는 어땠나.
  “여전히 시대 분위기는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노동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영향을 받아온 나는 복학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평생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일할 것을 생각하니 나와는 안 맞는다는 생각에 이르더라. 영화학과 학생이기도 하니 어떻게든 영화를 만들며 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임권택 감독을 모델로 삼고 본격적인 영화 공부를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 한 건가.
  “복학생이다 보니 재학생과의 나이 차이가 몇 살씩 났다. 그래도 일단 그 사이에 끼어서 햇빛 반사판부터 들었다. 영화를 만들어본 경험도 전혀 없을 때였으니 당연한 과정이었다.”
  -처음 만든 영화는 뭐였나.
  “<공장의 불빛>이었다. 위장 취업한 여학생이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갈등을 빚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각 대학 영화학과나 영화동아리에서 사회적인 소재로 영화를 제작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단편영화로 묶여 베를린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영화에 대한 자신감이 붙었겠다.
  “그 일을 계기로 공동 작업을 하게 됐다. 그 다음 해에 나는 졸업 작품의 일환으로, 다른 사람은 작품 활동의 일환으로 90분짜리 장편영화를 만들게 된 거다. 80년대 후반이었고 많은 지식인이 광주의 아픔에 대해 발언할 때라 우리도 광주를 다뤘다. <오! 꿈의 나라>라는 작품이었다. 나와 장희명, 장동원 감독이 공동 연출한 거였다.”
  -영화운동단체 ‘장산곶매’의 창설기념 작품이라고 나와 있다.
  “작품 제작 이후 상영을 하기 위해서 이름이 필요했다. 당시 ‘민족극 한마당’이라는 공연장의 책임자를 맡고 있던 유인택 선생님께서 12시, 2시 상영을 제안해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백기완 선생님의 이야기인 장산곶 매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얻어 투표를 통해 ‘장산곶매’라는 이름을 확정지었다.”
  -관객 반응은 어땠나.
  “학생 작품이다 보니 엉성하긴 했지만 광주를 다뤘다는 이유로 사람이 전국에서 몰려왔다. 얼마나 많이 왔던지 자리가 꽉 찼는데도 서로 들어가겠다며 싸우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그때 ‘아, 영화감독이 이런 거구나’하고 놀랐다.”
  -실제로도 잘 만든 작품이었다는 건가.
  “다들 실망하고 돌아갔다.(웃음) 광주의 진실을 보여주지도, 감동을 주지도 못한 영화였다. 그때 우리는 ‘아, 영화를 만드는 건 자유지만 사회적인 책임이 따르는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다음 작품인 <파업전야>는 당시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안다.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내놓고 싶어서 노력한 결과다. 당시 학생과 노동자 사이에서 노동문제를 잘 다뤘다고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영화법을 위반했다며 상영을 막았기 때문에 한번 상영할 때마다 필름 사수에 정신없었다. 극장 주변에 백골단을 배치하고, 경찰이 들어왔을 경우 영상을 들고 뒷산으로 도망갈 팀을 짜는 등 희한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다음 작품까지 10년의 텀이 있는 것은 그 영향 때문인가.
  “아니다. 소위 진보적인 문화 활동이었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수입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간간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과정에서 영화를 만들 힘을 서서히 잃게 된 거다. 심재명 공동대표이사를 그 즈음 만났다.”
  -연애 과정이 궁금하다.
  “홍기석 감독과 함께 문화부 지원을 받아 독립영화를 만드는 것을 추진할 때였다. 그때 문화부에서는 홍기석 감독이 시국선언을 했다는 이유로 주기로 했던 지원금을 철회했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사와 극장 기획실 모임에 나가 서명을 받아 항의 준비를 하기로 했던 거다. 심재명 공동대표이사를 거기서 처음 만났다.”
  -첫 눈에 반한 건가.
  “그런 셈이다. 심재명 공동대표이사의 첫 인상은 ‘충무로에서 마케팅 잘 하는 사람’이었고, 심재명 공동대표이사에게 내 첫 인상은 ‘독립영화계에서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상업영화 하던 사람과 독립영화 하던 사람이 만난 거였는데, 그래서인지 우리가 결혼할 때 정지영 감독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혼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심재명 공동대표이사가 더 진보적인 거 같다.(웃음)”

▲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이은 동문.

  그 당시 심재명 공동대표이사는 ‘명기획’이라는 마케팅 회사를, 이은 대표이사는 ‘장이오 프로덕션’이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결혼한 후에도 각자의 일을 지켜나가며 활동을 지속한다. 그러나 남의 영화 홍보에 열을 올리는 아내와, 생계보다는 영화에 수익을 쏟아붓던 남편은 어느 순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뭔가 어긋나고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두 사람은 결국 서로의 능력을 합쳐 ‘명필름’이라는 영화사를 만들기에 이른다.
  -두 사람이 공동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데, 역할 분담은 어떻게 하나.
  “심재명 공동대표이사는 마케팅에 관련된 업무, 나는 현장과 관련된 업무를 주로 한다. 그러나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의 편집 과정은 함께 한다. 시나리오를 선정하는 것과, 촬영된 영화를 편집하는 과정을 같이 하는 것이다. 영화는 총 세 번의 창작으로 이루어지는데 시나리오 선정, 촬영, 편집 순서다. 촬영은 워낙 정신이 없는 과정이기 때문에 감독의 재량에 맡기지만, 시나리오 선정이나 편집 같은 경우엔 회의를 열어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심재명 공동대표이사는 개봉 직전 마케팅 하는 방법을 잘 알고, 나는 제작 경험이 있으니 힘을 합치면 시너지 효과가 잘 난다. 그게 우리의 성공 비결인 셈이다.(웃음)”
  -창립 이후 <접속>을 내면서 ‘대박’이 터졌다. 그때를 어떻게 기억하나.
  “영화사를 차린 후 한 해만에 잘 된 것 아닌가. 운이 참 좋았던 것 같다. 덕분에 지니고 있던 부채를 정리하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고,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운영을 위한 운영이 아닌 영화를 위한 운영을 할 수 있게 된 거다.”
  -흔히 명필름을 두고 ‘웰메이드’ 제작사라고 한다. <접속>을 내기 전, 창립할 때부터 특별한 기획 의도가 있었던 건가.
  “당시 충무로라고 하는 상업영화계에서는 손해보지 않는 영화 한편 만들어 성공하는 것이 최고 미덕이었다. 인정받고 자리 잡은 회사가 되기 전까지는 인간답고 가치 있게 사는 것보다 어떻게 생존하느냐가 더 중요하게 작용했던 거다. 그러나 다행히 <접속>이 성공했기 때문에 더 완성도 있고 나은 영화를 만드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소위 ‘웰메이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던 거다.”
  -<접속>을 만든 장윤현 감독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건가.
  “물론이다. ‘장산곶매’시절 만나 친해진 사이였다. 소련이 해체될 때 장윤현 감독은 헝가리 국립영화학교에 유학을 갔는데, 돌아와서 PC통신을 맞닥뜨리고 새로운 소통법에 대한 충격을 받아 영화를 기획한 것으로 안다.”
  -<공동경비구역JSA>, <조용한 가족>, <와이키키브라더스> 등의 영화는 다른 상업영화과는 차별성 있는 것 같다. 독립영화를 만들던 시절의 경험이 작용했다고 봐도 되나.
  “그렇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니까 그냥 상업영화가 아닌 인간의 얼굴을 한 상업영화를 만드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된 거다. 특히 <공동경비구역JSA>의 경우에는 2000년이라는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문제제기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만든 영화다.”
  -필요성이라니.
  “중앙대 출신 박상연 작가의 소설 『DMZ』를 우연히 보게 됐다. 그때 남과 북에 대한 제3자적인 관점에 대해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2000년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여전히 남과 북이 총을 들이대고 있는 상황에 문제제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고, 영화를 기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공동경비구역JSA>다.”
  -그때만 해도 무명이었던 박찬욱 감독은 어떻게 알아본 건가.
  “박찬욱 감독이 가지고 있던 시나리오들을 읽어보고, 진작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엇이 되던 같이 작업해보자는 약속을 해둔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박찬욱 감독에게 『DMZ』를 추천받았고, 제작에 착수하게 된 거다.”
  -중앙대 객원교수를 맡은 건 언제 쯤이었나.
  “2004년도에 ‘강제규필름’하고 ‘명필름’이 회사를 합친 적이 있다. 그때 학교로부터 강제규 감독과 함께 객원교수 제의를 받았다. 그래서 가끔 특강을 했다. 그러나 체계적으로 학기를 맡아 가르쳐보지는 못했다. 늘 현장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건축학개론> 시나리오가 충무로를 10년간 떠돌아다녔다는 소리가 있다.
  “현재 시나리오만 보면 굉장히 재밌다. 그러나 그 전에는 여자 캐릭터가 별로였다. 잘 나가는 이혼녀였다가, 남편에게 맞고 사는 아내였다가, 탤런트 같은 여자였다가 수없는 변화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순애보적인 사랑이라는 과거 이야기가 굉장히 좋았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 수정과정을 거쳤다. 첫사랑을 다시 만났을 때 현재 특별히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점도 고려해서 집을 짓자고 하는 등 몇몇 상황을 제의하고 합의한 끝에야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된 거다.”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었나.
  “성공이라는 말 자체가 주관적이다. 나는 관객이 많이 봐준다든가, 평론가에게 괜찮은 평을 받는다든가 하는 것보다 내가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봤을 때 완성도 있고 짜임새 있고 기쁘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법이다.”


  충무로 상업영화계 미덕은 손해보지 않는 영화 만들기
  인간답게 가치있기 보단 생존이 더 중요시 돼

  창업 1년만에 <접속> 성공
  이후 영화 완성도에 집중 가능 웰메이드 고민 시작했다

▲ 이은 동문이 건축학개론 포스터 앞에 서 있다.

  여전히 영화계에서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이 수그러들지 않는다. 스크린쿼터제 논란이 한창 이슈화되기도 했고, 제작사가 갈수록 줄어든다는 우려는 끊임이 없으며 대기업 자본은 계속해서 압박을 가해오고 있다. 이러한 곳에서 ‘명필름’은 비대기업 자본형태로 사뭇 당당하고 어엿하게 한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곧 김훈의 단편소설 화장을 바탕으로 한 영화도 내놓을 예정이다. 이들은 정말 괜찮은 것일까. 어떻게 생존하고 있는 것인지 그 비결이 궁금하다.
  -스크린쿼터제 논란 당시 비대위 활동을 열심히 했다고 들었다.
  “초반엔 잘 몰랐다. 단지 외국영화가 시장에 들어오면 자국영화가 힘들다는 것 정도만 알았다. 그래서 영화제작사 입장에서 자국영화를 지키기 위한 운동을 생계 일환으로 하게 된 거다. 그러나 갈수록 생계를 넘어서 한 나라의 문화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후대를 위해 거리로 나갔던 거다.”
  -몇 년 전부터 대기업제작사가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대기업의 독점화 과정이 확 진행됐다. 글로벌, 대기업 육성정책에 치우친 정부 정책의 영향으로 관객은 늘어났지만 오히려 독점이 심화되고 영화 산업구조가 건강성을 잃게 되는 결과가 초래된 거다. 이러한 양극화 현상을 두고 개선의 목소리 또한 높아지고 있다.”
  -‘명필름’처럼 비대기업 자본형태로 건강하게 제작에 임할 수 있는 제작사가 있을까.
  “아직은 없다. 우리 또한 특별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몇몇 영화가 성공했기 때문에 소위 ‘타율’이 높아졌고, 경쟁력이 생겼을 뿐이다. 이번에 기업은행에서 강소기업이라고 해서 투자나 융자를 신경써주는 기업을 선정했는데 그렇게 보면 작년과 올해 합쳐 총 10군데가 자생력 있는 곳이 됐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한국의 영화 제작환경은 어떤가.
  “요즘 영화 현장에서 뛰는 스태프를 비롯한 노동자의 복지에 대한 개선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마케팅사협회, 감독조합, 프로듀서 조합, 작가조합 등도 생겨서 창작자들의 권익에 대해서도 논의되고 있는 중이다.”
  -영화인 하면 ‘밥 굶는 직업’이라고 보는 시선이 여전히 많다.
  “대부분의 영화인은 빚 속에 살고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기업의 독점으로 인한 폐해를 막고 중소기업을 육성하는 쪽으로 가야만 한다. 중소기업은 스스로 자생적인 노력을 하고, 정부 정책 또한 그들을 지원해줘야 하는 것이다. ”
  -제작사와 감독 간 갈등은 없었나.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없다. 영화 제작은 계약에 입각하기보다는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에 102번째로 계약하는 임권택 감독과는 계약서조차 꼼꼼하게 쓰지 않았다. 회계 처리를 위해서 간단하게 ‘서로 열심히 하자’ 정도로만 썼을 뿐이다.(웃음)”
  -‘명필름’에서는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첫째로 도전적인 영화를 할 계획이다. 학교를 세워 체계적인 관리와 교육을 통해 더 과감한 실험정신을 지닌 신인감독을 내놓고 싶다. 실제로 학교 건립도 추진중이다. 둘째로 성숙한 영화다. 임권택 감독이나 정지용 감독 같은 한국 영화계의 선배들을 모시고 더 깊은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
  -학비가 전액 무료라고 들었다. 그렇게 해서까지 신인을 키울 이유가 있나.
  “<접속>이나 <조용한 가족>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 수익은 학교랑 학생이 5:5로 나누는 방식으로 한다면, 결정적으로는 선순환이 되는 셈이 아닌가.”
  -1998년 이후 영화감독을 하지 않고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일종의 유보다. 영화감독을 하면 회사 일을 못하게 되지 않나. 명필름 대표이사로서 이 회사가 건강하게 자리잡고 학교 또한 제대로 운영되게 만든 다음에 다시 해보고 싶다. 감독은 물론 지금 하고 있는 파주출판도시 부이사장 업무도 하고 싶다. 모두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파주출판도시 업무라니.
  “초반에 도시 건설 당시 두 단계로 나눠서 대화를 시작했다. 먼저 출판사들이 들어가고, 그 다음에 영화사들이 들어가자는 거였다. 영화사들은 종로 아니면 충무로에 퍼져있는데, 너무 떨어져 있어 효율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기적인 연결고리를 만들어 교류하고 싶었다.”
  -영화감독과 출판도시 업무 모두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건가.
  “50% 정도 있다. 아직 준비는 덜 됐지만, 차근차근 해내고 싶다. 시간이 주어지는 대로 영화 감독과 도시 건설에 전념할 생각이다.”

▲ 연도별 영화를 추억하고 있는 이은 동문.

  당신에게 중앙대란?
  “삶의 본질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 곳이다. 영화를 공부하고 만드는 일에 신경을 쏟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줬다. 그래서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마다 기부 활동을 한다. 후배들도 꾸준히 지켜본다. 학창시절 만든 영화 동아리 ‘광야’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보면 뿌듯하다. 앞으로 학교가 더 발전해서 훌륭한 후배들이 배출됐으면 좋겠다. 특히 한국사회를 위해 값진 일을 하게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앞으로에 대한 기대가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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