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청기
애니메이션 감독 (회화과 63학번)

▲ 지난 달 28일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김청기 감독이 태권브이와 함께 승리의 브이 사인을 하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철썩 같이 믿는 사람들에게, 태권브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부질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흑백텔레비전이 드물게 갖춰져 있던 아주 먼 옛날, 그러니까 먹을 것조차 충분치 않던 멀고 먼 옛날의 넋두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들의 친구라기에는 민망할 나이가 된 40살 태권브이는 여전히 쌩쌩하게 살아 있다. 심지어 태권브이의 아빠가 만든 ‘김청기 스튜디오’는 태권브이의 화려한 부활을 꿈꾸고 있다. 애니메이션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서 로보트 태권브이를 비롯해 똘이장군, 우뢰매 등을 만들어낸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애니메이션계의 대부 김청기 감독(72)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 태권브이 앞에 서 있는 김청기 감독.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앞, 늠름하게 서 있는 로보트 태권브이를 발견한 어린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간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키보다 다섯 배는 훌쩍 큰 모형에 앞 다투어 매달려 즐거운 듯 웃는다. 두 팔을 활짝 벌려도 다 안지 못하는 다리를 꽉 붙들고 있는 아이들에게 빵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다가가 묻는다. “너, 이게 뭔지 알아?”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모형을 한 번 쓱 훑어 본 아이들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는 허허 웃으며 아이들을 쓰다듬는다. 세월이 흘러 머리가 하얗게 새버린, 태권브이 아빠 김청기씨다.
  -언제 처음 만화를 그렸나.
  “열두 살이었나, 열세 살 때였다. 6·25전쟁이 막 끝난 무렵이었는데, 상주하고 있던 미군들을 통해 들어온 만화를 학교 앞 문방구에서 자주 접하곤 했다. 그러면서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고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다.”
  -그때만 해도 그림을 그릴 만한 도구가 잘 갖춰져 있지 않았을 텐데.
  “좋은 종이조차 없어서 비포장도로처럼 우둘투둘한 잡화지를 써야했다. 조악한 연필은 자주 부러졌고, 포스터칼라는 색을 몇 번 섞으면 금세 탁해지곤 했다. 그래도 노트나 교과서에 여백만 보이면 달려들어 그렸다. 덕분에 선생님께 야단도 많이 맞았다.(웃음)”
  -첫 작품은 어떤 내용이었나.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을 때, 미국 흑백영화 ‘풍운의 오프린’을 보고 그린 작품이다. 영화가 굉장히 인상 깊어서 하루에 세 번을 이어서 봤다. 그리고 곧장 그날 저녁부터 다락방에 기어 올라가 작업을 시작했다. 스토리랑 흐름이 생생하게 기억났고, 나는 그것들을 전부 따라 그렸다.”
  -한 달이 넘게 작업했다고 들었다.
  “천장이 낮아 허리도 펴기 힘들었는데 멈출 수 없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촛불 하나에 의지해 계속해서 이어갔다. 종종 졸음을 못 이겨 꾸벅꾸벅 조느라 앞 머리카락과 눈썹을 태우기도 했다.”
  -반응은 어땠나.
  “완성도가 높아 친구들 사이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 거기서 자신감을 얻어 만화 전문 월간지 『만화세계』에 찾아갔고, 편집장에게도 애썼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만년필 잉크로 그렸기 때문에 인쇄까지는 하지 못했다.”
  -좌절감이 컸을 것 같은데.
  “꿈이 있었으니까 그 정도로 무너지지 않았다. 그래서 가르쳐준 대로 먹물로 똑같이 그려서 다시 찾아갔다. 결국 ‘무적의 오프린’이란 제목의 만화를 출판하는 데 성공한 거다.”
  -첫 책이었는데 많이 팔렸나.
  “‘좀’ 팔렸다.(웃음) 크게 히트한 게 아니라 그냥 범작(凡作)정도였다는 거다. 그러나 내 가능성을 좋게 본 한 출판사에서 나를 스카우트해갔다.”
  -요즘 말로 치면 전속작가가 된 건가.
  “그렇다. 그래서 공무원인 큰형 월급의 3배를 받고 일했다. 돈을 곧잘 벌었고, 일거리도 많이 들어왔다.”
  -만화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을 텐데 굳이 대학에 진학했다.
  “만화를 그리면 그릴수록 전문적인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먹선으로만 작업했기 때문에 여러 색을 사용해서 배경을 그리는 법도 배워야 했고, 조각이나 조소 같은 것들을 배워 응용해보고 싶기도 했다.”
  -필요를 느낀 만큼 대학 생활 만족도가 컸겠다.
  “아니다. 만화를 그리느라 회화 중심의 수업은 계속해서 뒷전이었다. 학점만 겨우겨우 챙기고 만화에 열중해 있느라 회화에서의 터치라든가 질감, 양감 같은 개념들을 잘 습득하지 못했다. 입학하기 전에 느꼈던 회화 공부의 필요성은 어느새 잊어버리고 만화만 그렸던 거다. 그래서 한 번은 회화 교수님께서 “야, 넌 간판 그렸었냐? 어쩜 그렇게 그림을 간판처럼 깔끔하게 그리냐”고 하기도 했다.(웃음)”

▲ 직접 그린 만화를 보여주는 김청기 감독.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평생 쓸데가 없을 것 같았던 회화 수업은 그가 만화에서 만화영화, 애니메이션으로 장르를 옮기면서 요긴하게 쓰이기 시작한다. 수업시간에 얼핏 들으며 배웠던 소소한 기술들이 화면 속 캐릭터를 살려내는데 큰 보탬이 됐던 것이다.
  -어쩌다가 애니메이션에 빠지게 된 건가.
  “스물세 살 때였나, 대한극장에 월트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백설공주’가 상륙했다. 만화로 먹고 사는 사람이니까, 나는 순전히 호기심에 그걸 보러 갔다. 그런데 굉장히 놀라웠다. 화려한 색감에 감미로운 음악, 입체적인 화면과 자연스러운 대사처리까지, 거기서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던 거다. 다 보고 나오면서 ‘아, 이거다! 대한민국의 월트디즈니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러나 그 당시 한국에서는 애니메이션이 설 자리가 거의 없지 않았나.
  “그렇다. 그러나 곧 한 기획사에서 첫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을 성공했고, 그것에 힘입어 또 다른 작품 제작을 추진했다. 나도 몇 번의 제작에 참여할 수 있었다. 비록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지만 내게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나만의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만든 첫 애니메이션이 ‘로보트 태권브이’였던 건가.
  “그렇다. 그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마징가Z’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그걸 벤치마킹했다. 그러나 그때 많은 사람들이 꺼려하는 것 중 하나가 일본이었다. 일본 것이라면 뭐든지 배척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일본 냄새가 난다는 것이 스스로도 용납이 안됐지만 그만큼 우리 것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
  -주로 어떤 노력이었나.
  “우선 태권도를 도입했다. 우리나라는 기계적인 로봇보다 인간적인 로봇이 어울리기 때문에 무술을 끌어왔던 거다. 그때 스튜디오가 광화문 사거리에 있었는데, 거기 서 있는 늠름한 이순신 동상에서 많은 모티프를 얻기도 했다.”
  -장면 장면에 태권도 동작이 생생하게 살아있는데, 실제로 태권도를 배웠나.
  “혹자는 그런 말을 한다. 김청기 감독은 태권브이를 만들었으니까 태권도 유단자일 거라고.(웃음) 그러나 그때 난 띠 하나 없고 기본 품새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유단자들을 섭외해서 카메라에 동작을 하나하나 담은 후 분석했다.”
  -보고 따라 그렸다는 건가.
  “그렇다. 월트디즈니도 신데렐라에서 춤추는 장면을 그릴 때 실제 모델을 섭외해서 영상을 찍었다. 영상을 편집한 후 확대해서 따라 그리는 기법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최초로 시도한 거다. 아무리 만화영화라도 사실적인 묘사가 따라줘야 전체적인 공감을 얻게 된다.”
  -태권브이가 극장에서 상영되던 날 감회가 남달랐겠다.
  “지구가 주먹만 해졌다.(웃음) 그때 잘못하면 과하게 기고만장해질까봐 겸손해지려고 계속해서 심호흡을 했다.”

▲ 싸인으로 깡통로봇을 그리는 김청기 감독.
   

  태권브이는 대한극장에서 21만, 서울극장에서 7만 명의 사람이 몰려들어 대단한 히트를 쳤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흥행몰이였다. 그 해 아이들의 여름방학은 태권브이가 지배했고, 지방에서도 인기는 계속됐다. 그러나 정작 그에겐 시작했을 때보다 늘어난 빚이 덩그러니 남았다.
  -그렇게 성공했는데도 빚이 늘다니?
  “작품에 대한 기대가 컸다. 창작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언뜻 보기에도 예산을 초과할 것 같아도 작품에 대한 애착 때문에 모든 걸 쏟아붓게 된다. 태권브이도 초반에 8,000매, 1시간 10분 분량을 기획했지만 자꾸 욕심이 생겼다.”
  -더 많은 양을 만들고 싶었던 건가.
  “캐릭터가 생생해지려면 그림 매수가 많아져야만 한다. 그 당시 나와 있던 일본 만화들은 매수가 적은 탓에 화면이 자꾸만 뚝뚝 끊어졌다. 그런 것들은 이야기를 보충해주는 그림이지, 움직이는 만화영화가 아니었다. 나는 좀 더 집중이 잘 되는 영상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결국 초반 기획보다 28,000매 많은 32,000매를 그려내고 상영시간도 1시간 28분으로 늘렸다. 시간과 노력은 물론 엄청난 비용까지 들어간 거다.”
  -기회비용이 너무 컸던 것 같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제작비 탓에 회삿돈은 물론 흑석동 집까지 담보로 썼다. 그러나 그때 나는 세상에 두려울 게 하나도 없었다. 지인들에게 돈을 꾸러 다니던 아내에게도 “내 이름값 하나는 벌었지 않느냐”고 했다. 곧이어 로보트 태권브이2, 3탄을 내놓았고, 4년 전에 써뒀던 ‘똘이장군’까지 상영하면서 남은 빚은 금방 갚았다.”
  -제작한 애니메이션만 50편이 넘는다. 그 아이디어는 다 어디서 나오나.
  “국내외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내 것으로 바꾼다. 재밌었던 부분, 감동적이었던 부분, 통쾌했던 부분을 떠올려서 각색하는 거다. 모방은 곧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지 않나.”
  -그렇게나 많은 작품을 만들려면 숨도 안 쉬고 일했을 것 같다.
  “물론 바쁘게 일한다. 그러나 개봉할 때 어린아이들하고 함께 화면을 바라보는 순간, 보람을 느낀다. 아이들이 박수치며 웃을 때 성취감이 밀려오는 거다.”
  -요즘은 애니메이션만 전문적으로 틀어주는 채널도 생겼다. 어떻게 생각하나.
  “매우 바람직하다. 이제 애니메이션은 하나의 문화 장르가 됐고, 때문에 작가정신이나 역량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공간 확보가 필요하다. 미키마우스 하나가 1년에 60억을 벌고, 곰돌이 푸나 도날드덕이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 시점에 문화 시장이 넓어진다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최근에 본 애니메이션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뭔가.
  “로보카 폴리다. 자동차를 의인화해서 교통법규라든가 착한 정신 같은 것들을 알려주는 모습이 보기 좋다. 표정연기나 스토리도 흥미롭고, 획기적이다.”
  -이제는 ‘김청기 스튜디오’를 만들어 후배들을 도우려 한다고 들었다.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던 시절, 교육 철학이 있다면 뭐였나.
  “많이 아는 것보다 좋아하는 게 낫고,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게 낫다는 말이 있다. 나는 만화를 즐겼기 때문에, 만화영화를 만들 수 있는 인프라가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을 때도 태권브이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거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항상 얘기했다. 도전하는 것과 실천하는 정신이 중요하다. 환경 따지지 마라. 조건을 하나하나 따지기 시작하면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나 꿈이 있다면.
  “미국에 월트디즈니가 있듯이, 한국에도 김청기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후배들이 내 작품을 리메이크해서 세계적인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그게 시장을 지배하면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으면 좋겠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욕망은 없다. 요새 김청기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는 거나, 김청기 스튜디오를 만들어 후배 양성에 힘쓰는 것은 내 인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보이고 싶어서다."

▲ 김청기 감독의 그림들.

  애니메이션 주제곡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1976년, 당시 애니메이션의 주제곡들은 죽음을 앞둔 것처럼 우울하고 처량했다. 바이올린이나 비올라를 주 악기로 사용했던 탓이다. 그러나 아무도 바꿀 생각을 하지 못했고, 다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청기 감독은 늘 불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청기씨는 명작곡가로 이름을 날리던 최창권씨를 만나게 됐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애니메이션으로 흘러갔고, 만화주제곡에까지 이르렀다. 최창권씨는 만화주제곡이 너무 무겁고 어둡다는 불만을 이야기했고, 가볍고 밝게 바꾸고 싶다는 꿈을 표출했다. 김청기씨는 뛸 듯이 기뻤다. 드디어 마음이 맞는 파트너를 만난 것이다.
  마음이 맞았으니 그 다음은 속전속결이었다. 의논 끝에 최창권씨는 금관악기를 주 악기로 두고 즉석에서 초등학교 6학년인 자신의 첫째 아들을 섭외했다.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세월이 지나도 두고두고 불릴 애니메이션 주제곡의 전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40년이 지났다. 사람들은 그때 그 노래들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 그 사이 최창권씨의 첫째 아들 최호섭씨는 ‘세월이 가면’을 불러 80년대 후반을 강타한 가수가 됐다. 리모컨 버튼을 누를 때마다 활기찬 주제곡이 흘러나오는 요즘, 김청기씨는 애니메이션 주제곡의 패러다임을 바꾸던 그 순간을 종종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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