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김성호

지금 시각 5시 20분입니다, KBS.

특유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청취자들에게 새벽을 알리던 신입 아나운서가 있다. 1987년 KBS 15기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한 서기철 동문(52)이다. 아나운서실에 들어가길 두려워하던 초짜 아나운서였던 그는 27년이 지난 지금 아나운서계의 대선배가 되었다. KBS의 스포츠 중계를 책임지는 서기철 아나운서를 만나 그의 아나운서 인생을 들어보았다. 


아나운서하면 평소에도 남다른 ‘말빨’을 자랑할 것 같다. 하지만 서기철 아나운서는 어린시절부터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외출할 때면 집에서 나올때부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도 안하는 경우가 많았다. 누구보다 말이 적었던 그가 누구보다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을 가지게 된 게 다소 의아하기도 하다. 추측해보자면 서기철 아나운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현재의 그를 있게 한 일등공신은 아니었을까.
-목소리가 좋다는 말을 많이 듣는 편인가.
“어린시절엔 핸드폰이 보급되지 않아서 친구와 연락을 하기 위해서는 친구 집으로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때마다 어머님들이 내 전화를 기분 좋게 받아주셨다. 내 목소리를 좋게 들으셨던 것 같다. (웃음)”
-‘좋은 목소리’가 아나운서를 꿈꾸게 한 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 담당 과목이 국어였다. 어느 날 국어시간에 내 차례가 돼서 책을 읽고 있는데 선생님이 한마디 하셨다. ‘너 아나운서 해도 되겠다.’ 그때 느낌이 팍 왔다.”
-아나운서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말인가.
“평소에 좋아하는 선생님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좇아가야지 싶었다. 국어성적이 상당히 좋은 편이기도 했고.(웃음) 그 이후로 말을 할 때나 글을 쓸 때 많이 신경을 쓰곤 했다.”
-신문방송학과로의 진학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겠다.
“고등학교 때 신방과를 간다고 말하니까 친구가 자신이 아는 분이 중앙대에 교수님으로 계시는데 참 좋은 학과라고 말하더라. 그래서 학교에서는 다른 대학으로 원서를 쓰라고 했지만 나는 중앙대 신방과가 아니면 안 된다고 우겼다. 결국 선생님께서 원서를 써주셨고 무사히 진학할 수 있었다.”
-대학 생활은 어땠나.
“3학년을 마치고 군대 가기 전까지 공부는 딱 필요한 정도만 하고 노느라 바빴다. 미팅도 하고 당구도 치고 사람도 만나다보니 학점이 영 좋지 않았다. 평점이 3.0 아래였던 걸로 기억한다.”
-낮은 학점이 아나운서 준비에 지장을 주지는 않았나.
“KBS 입사 시험을 볼 때만 해도 기본 지원 자격이 평점 3.0이상이었다. 제대하고 4학년 1학기에 복학을 하니 시험을 아주 잘 보지 않는 한 기본 학점을 넘지 못할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래서 공부를 진짜 열심히 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채로 절박하게 하다 보니 4.5에 가까운 점수를 받아 가까스로 3.0을 넘을 수 있었다. 컨닝 같은 방법은 쓰지 않았다.(웃음)”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하던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맨땅에 헤딩을 한 셈이다. 그저 묵묵히 국어, 영어, 상식 등 아나운서 시험에 필요한 공부에 매진한 것이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감이 있지만 마침내 4학년 2학기 11월에 합격 통보를 받게 된다. 500:1이라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KBS 15기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에 성공한 그는 스스로 천운이 따랐다고 말한다.
-입사 후 처음 맡은 프로그램이 뭐였나.
“새벽 5시 20분에 말했다. ‘지금 시각 5시 20분입니다, KBS.’ 이게 첫 방송이었다. 지금은 다 녹음으로 하는 부분인데 그때는 생으로 했다. 숙직실습을 갔다가 선배가 시켜서 하게 된 거다.”
-방송에 적응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일단 입사라는 관문을 통과해서 현장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프로가 되는 거다. 특히 일반회사와는 다르게 방송국은 한번 실수를 하면 타격이 크다. 생방송일 경우 실수가 방송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입사 후 3개월 동안 추가 교육을 받게 된다.”
-3개월간 실력을 갈고 닦는다는 건가.
 “그렇다. 선배들이 선생님으로 나서서 코치해주는 형식이다. 예를 들어 멀리까지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라면 훈련을 통해서 멀리서도 잘 들릴 수 있도록 교정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엔 바로 현장에 투입되어 짧은 뉴스나 리포트부터 시작해서 혹독하게 일을 한다.”
-아나운서 사이에 위계질서도 존재하나.
“방송에 들어가면 누구도 도와주는 일이 없다. 오로지 혼자 힘으로 판단해서 끌고 가야한다. 그러다 보니 자기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게 되거나 우쭐해지기에 딱 좋은 환경이다. 그런 태도를 잡기 위해서는 규율이 필요하다. 따라서 초창기엔 아나운서실을 들어가기가 두려울 정도로 규율이 셌다. 그게 다 후배 아나운서들을 단련시키기 위해 선배들이 일부러 트레이닝을 한 것이다.”
-프로그램을 맡으면서 당황스러운 부분도 있었을 텐데.
“1988년에 일요일 아침에 진행하는 <행운의 스튜디오>라는 프로그램을 맡은 적이 있었다. 한 시간 조금 넘게 진행되는 생방송 오락 프로그램이다. 두 회사의 직원이 나와서 연예인과 함께 운동회를 하는 <출발 드림팀>의 옛날버전의 방송이라고 보면 된다. 뜬금없이 나한테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라고 해서 당황스러웠다.”
-뉴스를 진행하다가 쇼프로를 진행하면서 혼란스러웠겠다.
“처음에 들어와서는 대개 뉴스를 많이 진행한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뉴스를 10년 이상 매일 하면서 다른 프로그램도 같이 했다. 쇼프로그램은 <행운의 스튜디오> 외에도 <도전 주부가요스타>도 진행했고 라디오방송으로는 클래식 프로그램이라든가 생활정보 등 다양하게 많이 했다. 너무 바빠서 혼란스러울 틈도 없었다.” 

입사 후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활약했지만 뭐니뭐니해도 서기철 아나운서하면 스포츠 중계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현장리포터로 참여하기 시작해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선 스튜디오 방송을, 2000년 시드니 올림픽부터는 현장 캐스터로 활동한다. 게다가 1998년 프랑스 월드컵부터는 본격적으로 캐스터 활동를 하게 된다. 그는 현재 축구면 축구, 육상이면 육상 다양한 종목의 스포츠를 넘나드는 ‘만능’ KBS 대표 캐스터로 자리매김한다.
-갑작스럽게 스포츠분야에도 발을 들이게 됐다.
“초등학교 시절에 기계체조와 육상, 축구 등 운동을 많이 했다. 중학교 2학년까지도 유명한 팀은 아니었지만 학교 대표 축구선수였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을 마칠 때쯤 아버지의 권유로 운동을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선수를 할 만큼 운동을 잘하진 않았나보다.(웃음) 결국 운동을 취미로 하게 됐지만 지금까지도 스포츠에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자원해서 스포츠 분야를 하겠다고 한 건가.
“그런 셈이다. 스포츠는 일반적인 방송보다는 더 전문적인 분야이기 때문에 입문과정이 필요하다. 처음엔 무작정 녹음기를 들고 축구장으로 갔다. 그리고는 관객석에 앉아서 나름대로 중계를 했다. 그렇게 나온 결과물을 스포츠 분야의 선배들에게 들려줬다. 물론 ‘이것도 중계라고 해온 거냐’고 많이 혼나기도 했다.”
 

녹음기 하나 들고
무작정 찾은 축구장

나홀로 중계만 여러번
노력 끝에 결실 맺었다

 

-그런 노력이 결실을 맺었나보다.
“녹음하고 선배들한테 들려주는 과정을 거치다보니 선배들이 인정해주는 부분이 생긴 것 같다. 그래서 녹화된 화면을 보면서 하이라이트 장면에 멘트를 입히는 것부터 시작해서 현장에서 직접 하이라이트 방송을 하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생방송 중계를 하게 됐다.”
-첫 텔레비전 중계방송을 기억하나.
“성남체육관에서 열린 초등학교 핸드볼 경기다. 돌아가신 이천규 선배가 맡은 경기였는데 갑자기 선배가 다리를 다친 거다. 얼떨결에 대타로 방송을 하게 됐다. 그게 텔레비전 중계방송으로 처음 데뷔를 한 거였다. 무사히 방송을 마치니 그때부터 선배들이 내가 ‘텔레비전 생방송을 시켜도 되는 수준이구나’ 하고 신뢰를 가지게 됐던 것 같다. 그 이후로 축구든 뭐든 기회가 닿는 대로 진행했다.”
-스포츠 캐스터로 방송을 하려면 전문적인 지식이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신문을 볼 때 스포츠면부터 보는 경향이 있다. 나 또한 그랬기 때문에 웬만한 스포츠에 대해선 거의 꿰고 있었다.(웃음) 물론 중계방송을 하기 위해서 따로 준비를 하는 부분은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경기가 있다면.
“2002년 한·일 월드컵 중 폴란드전이 가장 기억난다. 전반전에 황선홍 선수의 첫 골이 터졌다. 그때부터 목표가 첫 승이 됐다. 그러다 유상철 선수가 두 번째 골을 넣었을 때 다들 난리가 났다. 그때 내가 ‘이 정도면 16강, 8강, 4강까지 가능합니다’고 말해 버렸다. 나중에 이용수 위원이 ‘너는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그런 말을 하냐’고 우스갯소리로 말하더라.(웃음)”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 다소 특이한 방법으로 중계를 했다.
“SBS가 남아공 월드컵 방송권을 통째로 샀다. 그래서 SBS만 중계방송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현장 화면을 쓸 수 없으니까 궁여지책으로 ‘남자의 자격’이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하게 됐다. 남자의 자격 멤버들이 직접 현장에 가고 나는 이용수 해설위원과 함께 스튜디오에 앉아서 화면 없이 중계방송을 한 거다.” 
-타 방송사에 비해 KBS 중계방송이 유독 ‘정적이다’는 시청자들의 반응이 있는데.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안 좋은 얘기를 많이 한다고 생각한다. 옹호 세력은 그다지 표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다.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스포츠중계방송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철학이 있다면.
“무엇보다 매 경기를 시청자의 눈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청자가 보고 즐겨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뭘 듣고 싶어할지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뉴스와는 달리 스포츠 진행만이 가지는 매력이 있나.
“뉴스는 어느 정도 틀이 정해져 있다면 스포츠는 대본도 없고 앞으로의 상황을 예측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휘슬이 울리면 그 다음부터는 내 마음대로 프로그램을 이끌어 갈 수 있다. 물론 책임은 내가 져야하지만 그런 부분이 재밌는 거다.”
-앞으로 계속해서 스포츠 중계를 할 생각인가.
“언제까지는 없다. 그냥 하는 거다. ‘오늘부터는 스포츠 안하고 뉴스 해야지.’ 이건 아니다. 같이 하는 거다. 한창 일을 할 때는 저녁 뉴스를 기본으로 하면서 라디오도 하고 저녁때는 축구 중계 하이라이트를 해야 했다. 한마디로 다양한 장르를 함께 소화해야 한다. 내일도 오늘처럼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또 하나의 고향이다. 태어나거나 자란 곳만이 고향이 아니라 내 삶에서 변함없이 남아 존재하는 곳도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강을 가거나 동문회에 참여하는 등 모교에 대한 애정을 꾸준히 표출하고 있다. 후배들이 잘 됐으면 좋겠고 동문들의 좋은 소식 또한 많이 들려왔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 하고 싶은 것을 열심히 하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중앙대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여의도 KBS 신관 앞에서 서있는 서기철 동문.

방송생활 27년,
아찔했던 순간을 포착하다

방송이 어려운 이유는, 언제라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분일초도 긴장을 늦추어선 안된다. 이 때문에 입사한 지 벌써 25년이 훌쩍 넘은 서기철 아나운서도 생방송 앞에서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만 꾸준한 훈련을 통해 생긴 여유로 그런 떨림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아찔했던 순간들이 많다. 그의 숨막혔던 그때 그 순간들을 함께 들여다보자.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서기철 아나운서는 신입 스포츠 캐스터로서 각종 종목의 중계를 도맡았다. 가끔은 낯선 종목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상치 못한 금메달을 획득한 럭비다. 그전까지 방송국에서 럭비 중계를 한 적이 없어 해설자가 없는 것은 당연하고 서기철 아나운서 역시 별다른 지식이 없었다. 하지만 금메달을 획득한 이상 녹화본을 중계해 시청자들에게 현장을 전달해야만 했다. 결국 중계팀은 부랴부랴 럭비대표팀 감독을 해설자로 모셔 녹화 중계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녹화 전 서기철 아나운서는 잘 모르는 전문적인 부분은 감독님이 서포트해주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아뿔싸. 아직도 금메달의 감동에 젖어있었던 것일까. 녹화가 시작되자 대표팀 감독님의 입에선 해설대신 연방 감탄사만 터져 나왔다. “아!” “음!” “아!” 진땀이 흘렀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결국 녹화 내내 중계는 서기철 아나운서의 멘트로 채워졌다. 금메달을 이미 획득한 종목이고 녹화 경기라 다행이었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2000년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공동주최한 유럽축구선수권대회, 이른바 ‘유로 2000’. 서기철 아나운서는 개막전 중계를 위해 벨기에로 출장을 가게 됐다. 벨기에에서 출입증으로 쓰이는 신원확인 카드를 받는 중, 출입증에 ROK가 아닌 DPRK로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그도 모르는 사이에 북한 국민이 된 것이다. 뭔가 잘못됐다고 직원에게 말을 했지만 돌아오는 건 알아들을 수 없는 불어뿐. 잠깐의 실랑이 끝에 다행스럽게도 ROK로 다시 신원확인카드를 교체했다.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하마터면 억울하게 방송을 펑크 낼 뻔한 아찔한 경험이었다.

서기철 아나운서가 중계방송을 위해 이집트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통상적으로 중계 방송팀은 캐스터, 해설자, 피디, 엔지니어까지 4명으로 구성된다. 하루는 중계방송을 하기 위해 차를 빌려 경기장을 가는 중이었다. 그들이 묵은 호텔에서 경기장까지 가기 위해서는 광장을 지나가야 했다. 하지만 그 당시 이집트 대통령의 행사가 진행되고 있어 광장은 전면통제 되어 있었고 사실상 이동이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 경기장에 가지 못하면 방송이 펑크가 나게 되는 상황에서 서기철 아나운서는 이집트인인 가이드 겸 운전기사에게 “어떻게든 꼭 가야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운전기사는 “오케이”를 말하더니 4차선 고속도로를 역주행하는 것이 아닌가. 목숨을 건 사투였다.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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