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일
성애병원장·김대중 전 대통령 주치의(의학부 78학번)
 

 

  대통령 주치의는 현대판 어의(御醫)로 통한다. 국가원수의 건강을 돌보는 자리이기에 의료계는 물론이고 국민적인 관심도 만만찮다. 김대중 전 대통령 주치의였던 장석일 성애병원장(57)은 우연한 기회에 맺게 된 인연으로 중앙대 최초 대통령 주치의가 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취임부터 마지막까지 함께한 각별한 인연, 의사 말고는 되고 싶은 것이 없었다는 ‘뼛속까지 의사’인 그의 삶 이야기를 들어봤다. 

  장석일 성애병원장(57)은 ‘공부하느라’ 연애 한 번 못 해봤다고 말할 정도로 성실한 학구파다. 대학 재학 시절 내내 모태솔로였고, 졸업에 맞춰 선을 봐서 싱거운 프러포즈로 결혼에 골인했다. 요즘 학생들은 ‘안습’이라며 혀를 쯧쯧 찰 상황이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다. 두꺼운 전공 서적도 까다로운 집도도 꽉 짜인 일정도 이미 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주치의를 거쳐 성애병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아직까지도 진료를 이어나가며 현장을 지키고 있다. 뼛속까지 의사인 그의 의료 인생, 그 시작이 궁금하다.
  -언제 처음 매스를 들고 싶었나.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생일 선물로 코난 도일의 셜록홈즈 시리즈를 받았는데 그 이야기들이 참 재밌었다. 저자가 의사였기 때문에 그 직업에 대한 동경이 싹트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A.J.크로닌의 소설을 즐겨 읽었는데 그 사람도 의학도였다. 이런 식으로 의학에 대한 관심이 점점 자라났다.”
  -직업에 확신이 생겼던 것은 아니지 않나.
  “의사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직업은 생각하지도 않고 컸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도 자연스럽게 의과대학 진학을 결정했고, 이과를 선택했다.”
  -부모님은 지원을 많이 해주는 편이었나.
  “그렇다. 우리 집안은 6·25 이전에 이북에서 피난을 왔는데, 그런 탓에 부산에 정착한 후에도 그곳을 객지처럼 느끼고 불안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안정적이라고 여겨지는 직업인 의사를 암묵적으로 권하곤 했다.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은 꼬박꼬박 등록금을 내주고 공부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힘써줬다.”
  -결국 의과대학에 붙지 않았나. 대단한 축하를 받았을 것 같다.
  “함께 기뻐해 주기는 했지만 플래카드를 붙이거나 할 정도는 아니었다. 서울로 대학 가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었고, 당장의 축하보다는 학교 근처에 하숙집을 구하는 문제로 고심하는 마음이 다들 컸다. 결국 어머니는 공부하는 데 좀 더 효율적인 후문 근처 하숙집을 정해줬다.”
  -후문 쪽이 공부에 도움이 된다니?
  “정문 쪽은 놀 시설도 많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실제로 후문 쪽에 있는 내 하숙집에는 친구들이 잘 안 놀러 오더라. 덕분에 나는 집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공부만 할 수 있었다.”
  -동아리 활동 같은 것도 안 했나.
  “딱 일 년 했다. 초반에는 문예반을 만들었다가 제대로 성사가 되지 않아서 후반에는 의과대학 합창단에 들어가 한 시즌을 함께했다. 그리고 그만뒀다. 공부 외에 다른 것을 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공부 외에는 할 줄 아는 것도 없었다.(웃음)”
  -재학 시절 동안의 에피소드 중 특히 기억나는 게 있나.
  “의과대학은 3분의 1 정도만 입학 동기이자 졸업 동기가 된다. 나머지는 유급해서 내려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곳에 정신을 팔 여유 없이 ‘혹시 점수가 떨어지면 어떡하지.’, ‘재시험을 보면 어떡하나’하고 걱정하면서 지냈다. 해마다 5월에 등나무 꽃이 피어 향기가 짙어지면 ‘또 중간고사 철이 돌아왔구나’하고 생각하던 게 남아있는 추억이라면 추억이다.”
  -그러면 연애도 못 해봤나.(웃음)
  “내가 좀 인기가 없었다.(웃음) 졸업이 가까워 와서야 선을 봤고 두 달간의 만남 끝에 결혼 약속을 했다. 그게 내 연애의 전부다.”
  -두 달 만에 결혼이라니.
  “프러포즈도 우연히 했다. 연애를 한 지 두 달 정도 됐을 때, 와이프를 집까지 데려다 주다가 집 앞에 서 있던 장인어른과 마주쳤다. 나를 본 장인어른이 딱 한마디 했다. ‘어떡할 건데.’ 나도 딱 한마디 했다. ‘결혼해야죠.’ 그게 프러포즈였다. 요즘 학생들이라면 질겁할 얘기겠지만 사실이다.(웃음)”

▲ 1978년도 의과대학 본과 진입식 날.(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가 장석일 동문)

  중앙대 대학원에서 의학박사까지 마친 그의 꿈은 소아과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아과에 뜻을 둔 사람이 많았던 탓에 경쟁률은 끝도 없이 치솟기만 했다. 결국 그는 원서조차 제대로 내밀지 못하고 고민을 거듭한다. 
  그러던 중, 그는 우리나라에 알레르기학을 처음으로 도입한 서울대 강석영 교수와 마주친다. 그리고 성애병원에 근무하고 있던 강석영 교수를 따라 내과로 들어가게 된다. 생각지도 못한 알레르기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원하는 분야를 배우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한이 응어리졌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시작되면서 이러한 과정이 하나의 복이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어떤 계기로 알고 지냈나.
  “1990년 10월, 나는 성애병원 내과 과장으로 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민당 총재 자리에 있을 때였다. 그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여의도에서 지방자치제 도입 관철을 위한 단식 시위를 하고 있었는데, 건강에 무리가 없도록 진료를 해줄 의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근처 병원에서 근무하던 내가 물망에 올랐고, 그때부터 매일 왕진을 나가게 됐다.” 
  -그때의 인연이 김대중 전 대통령 의무실장으로 발탁되는데 영향을 미친 건가.
  “그렇다고 보면 된다. 사실 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 직전, 그분의 건강 문제가 불거져서 진단서를 작성해 논란을 잠재워야 하는 일이 있었다. 내가 그 일을 했는데 그것을 마지막으로 내 임무가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나를 다시 불렀고, 청와대에 상주하면서 건강을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의무실장을 하다가 주치의까지 맡게 됐다. 하던 일이 어떻게 달라졌나.
  “의무실장은 청와대에 상주하면서 대통령을 보살피는 일을 한다. 아침저녁으로 뵙고 행보를 같이하는 역할을 하는 거다. 반면에 주치의는 청와대 밖에 거주하면서 종종 진료가 필요하다고 여겨질 때 찾아뵙는다. 그러나 나는 주치의로서는 유일하게 의무실장처럼 청와대 안에 살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살폈다.”
  -직책만 달라지고 업무는 같았다는 건가.
  “그렇다. 심지어 관용차와 기사까지도 같았다. 그냥 영예만 더 얻은 셈이었다.”
  -중앙대에서 처음으로 대통령 주치의가 나온 것이 아닌가. 주변 반응이 어땠나.
  “그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을 왕진하는 것에 대해 일체 얘기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다들 놀라는 분위기였다. 그동안 왜 말 한마디 없었냐고 묻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환자의 상태에 대한 비밀을 지켜주는 것은 의사의 본분이고, 정치인이라고 예외가 되지는 않기 때문에 그건 당연한 거였다.”
  -주치의 시절 있었던 일들 중 어떤 것이 가장 기억에 남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취임하고 두 달 후 일요일에 있었던 일이다. 일요일 오전이라 교회에 가 있던 나는 급히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빨리 관저로 들어와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영문도 모른 채 급히 달려갔다. 도착해서 상황을 보니 영부인이 바퀴 달린 의자로 인해 엉덩방아를 찧어 골절이 의심되는 상태였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엑스레이를 찍어야 했기 때문에 처음으로 관저 경내에 앰뷸런스를 불렀다. 설상가상으로 앰뷸런스 상태도 좋지 못해서 고생했던 기억이다.”
  -계속해서 대통령 곁을 지키고 상태를 살펴야 했으니 하루 종일 긴장 상태였겠다.
  “당연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밤늦게 업무를 마치고 쉬러 들어가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안부 인사를 하고 담 옆에 있는 관사로 퇴근하고 나서도 조마조마했다. 그러다 ‘주무십니다’라는 말을 전해 듣고 나면 비로소 가벼운 산책을 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간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너무 빨리 가버렸다.”
  -가까이서 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어땠나.
  “굉장히 워커홀릭에 빠진 사람이었다. 휴일이 없었으면 일 년 삼백육십오일 내내 쉬지 않고 일만 했을 거다. 책도 많이 보고 공부도 열정적으로 했다. 자료 검토도 꼼꼼하게 하는 모습을 보면 본받을 점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 퇴임 후에도 여전히 건강을 보살폈다. 각별한 사이였던 것 같다.
  “19년을 모시고 마지막을 봤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임기 말에는 만성심부전이 와서 신장 투석을 받았는데 그 세 시간 반 동안에도 대화를 계속했다. 봤던 소설, 영화 등을 주제로 삼기도 하고 국정을 주 소재로 다루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소아과 의사가 되지 않고 알레르기학을 배웠기 때문에 의무실장이 되고 주치의로 발탁될 수 있었던 것 같다. 큰 복이었다.”

  90년 단식농성 때 첫 인연
  임종까지 지켜봤다

  곁에 상주하던 주치의 시절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 의무실장 시절 청와대 녹지원에 모인 김대중 전 대통령 부부와 의료진들.(앞줄 가장 왼쪽이 장석일 동문)

  2009년 8월 18일,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중환자실에서 그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배가 고프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계속해서 마음속을 맴돌았다. 그러나 폐렴에 걸려 기관지에 관을 삽입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먹을 것을 넣어줄 방법은 없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시간이 지날수록 쇠약해졌다. 기력이 떨어져가 목소리가 희미해지기 시작했고, 필담만 겨우겨우 주고받을 수 있게 됐다. 그는 그때서야 밖으로 나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씨를 마주했다. “이제는 옆에 와서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주치의로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마지막을 예감한 순간은 정확히 언제였나.
  “입원 3일째에 인공호흡기를 달면서 위기가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1주 후에 다행히 회복 증세를 보여 호흡기를 뗄 수 있게 됐다. 극적으로 회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폐색전증이 오기 시작했다. 그때 회생하시기 힘들 거라는 느낌이 들었고 영부인을 모셔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 지 4년이 지났다. 요새는 뭐 하고 지내나.
 “서울 성애병원에서 많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환자를 보고 있다. 광명 성애병원은 요새 관동대 의대의 협력병원이 돼서 실습을 책임지고 있는데 그쪽 일도 하고 있다. 굉장히 바쁘다.”
  -아직 활발하게 의료 활동 중인가보다. 언제까지 할 수 있을 것 같나.
  “대학교수가 정년퇴임 하는 것처럼 나도 65세에 그만두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거센 반대 입장이다.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입장이니 아무래도 70세까지는 현직을 지켜야 할 것 같다.(웃음)”
  -어떤 의사를 꿈꾸나.
  “학자들이 아는 병 종류는 그렇게 많지 않다. 병에 관련한 증상을 안다고 해서 사람의 몸을 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의 얼굴과 마음을 읽을 수 있고 보듬을 수 있어야만 진정한 치료가 가능하다. 그게 인문학이다. 사람만 다루는 차가운 학문만이 아닌 사람의 병, 마음, 감정까지 고민하는 뜨거운 의료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 2000년도 평양 모란각에서 김민하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중앙대 9대 총장)과 서 있는 장석일 동문.

대통령 주치의에 대한 오해와 진실

  대통령과 늘 함께 하는 주치의는 개인적인 인연에 의해 선발된다. 국가원수의 건강을 이전부터 잘 알고 있는 의사들을 측근에서 검토해 대통령이 뽑는 방식인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대학병원에 재직하고 있는 사람 중에서 정하는 것이 관행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적인 선발 방식이 신비로움을 불러 일으켜 대중들에게 갖가지 궁금증을 주곤 한다. 더군다나 주치의는 의전 상 차관급 대우를 받기 때문에 대중들의 호기심은 더 짙어지게 된다. 하는 일의 특성 상 잘 드러나 있지 않은 주치의, 우리가 흔히 지니고 있는 오해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Q. 주치의 선정은 대통령의 평소 지병과 관련이 있을까.
  A. 사실과 무관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알레르기가 심했기 때문에 알레르기 전문의인 장석일 동문이 주치의로 발탁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의사가 모든 병을 고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분야별로 자문교수단을 구성해 둔다. 필요할 때는 해당 분야의 교수를 불러 진료를 부탁하거나 자문을 받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Q. 대통령 주치의는 청와대 반경 3km 안에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A. 그렇지 않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주치의가 대기하지 않아도 의무실장이 있기 때문에 작은 문제는 의무실에서 해결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장석일 동문은 예외적으로 청와대 안에 거주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살폈다.
  Q. 대통령의 식사도 주치의가 일일이 검토할까.
  A. 아니다. 하루에 필요한 열량, 먹어야 하는 식품의 종류 같은 것들을 가끔 주방에 얘기할 때도 있긴 하지만 대개는 그러지 않는다. 주방에는 영양학을 따로 전공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주치의가 관여하지 않아도 된다.
  Q. 대통령 주치의는 무보수 명예직이라는데. 정말 한 푼도 안 받을까.
  A. 의무실장은 월급을 받지만 주치의는 받지 않는다. 일정량의 활동비 혹은 격려금 정도만 받을 뿐이다. 그러나 차관급 예우를 받는 영예를 누리기 때문에 충분히 배부르다. 
  대통령 주치의가 된다는 것은 소속병원과 더불어 출신학교에게 대단한 영예다. 그래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병원 간, 대학 간 물밑 경쟁이 치열해진다. 지금까지 가장 많은 주치의를 배출한 학교는 서울대다. 중앙대에서는 장석일 동문이 첫 주치의였다. 장석일 동문은 앞으로도 중앙대 출신의 주치의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 알레르기학 서적을 읽고 있는 장석일 동문.

  당신에게 중앙대란?

  “모교이자 고향이다. 동창회에 가면 늘 하는 말이 있다.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바꿀 수 없다’는 거다. 그러니까 학부생과 졸업생, 교직원과 교수 가리지 않고 모두 동질감을 가졌으면 좋겠다. 같은 중앙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 학교가 더 발전하고 나아질 수 있도록 기원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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