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 주현미 동문 

운명처럼 찾아온 기회는 주현미 동문(53)을 평범한 약사에서 트로트의 여왕으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바로 ‘쌍쌍파티’다. ‘쌍쌍파티’의 인기는 오늘날 싸이의 <강남스타일> 못지않게 뜨거웠다. 가슴 속에 노래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던 약사 주현미는 우연히 찾아온 기회로 하루아침에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트로트 가수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가 궁금하다.
 

생계 위해 택한 약사의 길 
한순간도 노래를 
잊은 적 없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 가수의 길이
찾아왔다
 
<비내리는 영동교>로 데뷔한 이래 <짝사랑>, <눈물의 블루스>, <신사동 그 사람> 등 수많은 히트작을 만들어낸 주현미 동문(53)은 중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화교 출신 가수다. 어린 시절부터 노래와의 인연이 깊었지만 그녀는 가수가 아닌 중앙대 약학과로의 진학을 택한다. 국내 최초 약사출신 가수로 시작해 트로트의 여왕으로 불리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트로트의 여왕’으로 불린다. 어린시절은 어땠나.
“제가 우리 집안의 꼬마가수였어요. 당시만 해도 집집마다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3대가 함께 살고, 같은 동네엔 친척들이 모여 살았어요. 아버지께서 집안 식구들이 모일 적이면 제 자랑을 하시면서 노래를 부르게 시켰어요. 우리 딸이 이렇게 노래를 잘한다고요.”
 -아버지께서 일찍이 재능을 알아 보신건가.
“그런 것 같아요. 처음 말을 배울 때가 60년대 초반이었어요. 그때 이미자 선배님의 
<동백아가씨>가 엄청나게 인기가 많았어요. 어머니께 듣기로는 제가 4살 때 혼자서 동백아가씨를 배워서 본인한테 알려줬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다보니까 아버지께서도 욕심이 생겨서 저를 콘테스트에도 내보내신 거죠.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요.(웃음)”
 -실제로 노래실력을 인정받기도 했나.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미자 선배님 모창대회에 나가 <잊을 수 없는 연인>을 불러서 대상을 받았어요. 그 후로 아버지께서 저의 재능에 믿음이 생긴 것 같아요.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작곡가 이인권 선생님께 보내 매일 1시간씩 트레이닝도 받게 하셨거든요. 중학교 2학년 때는 작곡가 정종택씨의 권유로 기념앨범을 발매하기도 했죠.”
 -그러나 진학한 곳은 성악과나 연극영화과가 아닌 약학과다. 무슨이유에선가.
“집안에 한의사가 많았어요. 친정아버지, 작은아버지, 큰아버지 모두 한의원을 운영하셨어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이 분야에 발을 들이게 된 것 같아요. 원래는 한의대를 가려고 했는데 한의대를 지원하기에는 점수가 ‘조금’ 모자라서 약대에 오게 됐어요.(웃음)”
 -그래도 앨범까지 발매할 정도로 노래에 애정이 있었는데 관련 학과로 진학할 생각은 없었나.
“어머니께서 음악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한의사시던 아버지께서 사업을 하셨었는데 성공하지 못하셨거든요. 그래서 가정형편이 안 좋아지게 되자 제가 장녀로서 가장이 된 거죠. 그래서인지 어머니께선 여자도 사회에 나가서 떳떳하게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쉽게 말해 전문직 여성이 되길 원하셨죠.”
-학창시절, 중앙대 약대는 어떤 분위기였나.
“학구적이었죠. 그리고 그 당시엔 여학생의 비율이 굉장히 낮았어요. 약학대학 정원이 120명이면 여학생이 삼분의 일 정도 됐죠. 저는 소심한 편이라서 학과 활동보다는 주로 실험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공부를 하곤 했어요.”
 -화교출신이었으니 대학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 같다.
“입학할 당시만 해도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외국인 특별전형으로 들어왔어요. 그러나 초중고를 화교학교로 다닌 탓에 대학 입학 후 공부를 하는 게 굉장히 어려웠어요. 그전까진 중국교과서로 공부를 했고, 한국에서 공부를 하기 위한 기본 실력이 없었거든요. 결국 1학년 1학기에 11학점이 펑크(F학점)가 나버렸죠.”
-그렇다면 유급을 했다는 말인가.
“예. 결국 유급을 하게 됐어요. 2학기엔 신청한 학점을 무리 없이 모두 이수했지만 1학기에 11학점이나 펑크가 나서 2학년에 진학하지 못했죠. 덕분에 대학을 5년 동안 다녔어요. 펑크난 학점을 메우느라 아쉽게도 대학 캠퍼스의 낭만을 즐길 여유가 없었어요.”
 -‘공부만’ 하는 학창시절을 보냈겠다. 
“무식하게 공부만 했죠. 친구들한테도 도움을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제가 유급하는 바람에 친구들은 학년이 하나씩 높았거든요. 그 친구들이 노트 필기부터 시험지, 소스 같은 필요한 정보들을 전부 모아서 챙겨줬어요.” 
 -친구들과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지내나.
“다들 시집가고, 자식 키우고 약국 운영하느라 바빠서 연락을 못하고 있어요. 물론 제가 나서서 연락한다면 닿을 순 있겠지만 일시적으로 만나고 싶다는 이유로 연락할 수는 없기 때문에 자제하고 있죠. 문득문득 친구들이 많이 보고 싶어요.”
 -‘공부벌레’학생 치고는 강변가요제 수상경력이 눈에 띈다.
“계절 학기를 들을 때였어요. 문득 실험실 쪽에서 음악소리가 났는데, 어렸을 때부터 키워온 음악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저도 모르게 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됐죠. 알고 보니 ‘진생라딕스’라는 약학대학 밴드가 강변가요제에 출전하려고 연습하고 있더라고요.”
-합류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연습하는 것을 옆에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었어요. 몇 번 듣다보니까 멜로디가 귀에 익어서 흥얼거렸더니 거기 있던 선배들이 보컬로 함께 출전하지 않겠냐고 제의를 했죠. 그 자리에서 ‘네’라고 했어요.(웃음)”
 -출전 당시 부른 노래는 뭐였나.
“트로트는 아니였어요. <이 바다 이 겨울 위에서>라는 락발라드였죠.”
 
우연찮게 시작된 진생라딕스와의 인연은, 그녀 마음속 숨어있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그 영향으로 공부만 하던 그녀는 강변가요제에 출전하게 된다. 그러나 강변가요제에서 거머쥔 ‘장려상’의 여운도 잠시, 진생라딕스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한 채 다시 학부생으로 돌아와 약사가 되기 위한 치열한 공부를 시작한다. 여전히 그녀에겐 ‘노래’보다는 ‘생계’가 더 중요했다. 노래와의 인연을 접어 두고 공부에 매달린 그녀는 대학졸업 후, 서울 중구에서 ‘한울약국’을 운영하는 어엿한 약사가 된다. 
 -약국을 운영했기 때문에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이나 열망을 눌러뒀던 건가.
“그렇죠. 동생들의 학비를 다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약국을 운영하면서 열심히 돈을 벌어야 했었어요. 그런데 속으로는 노래에 대한 열망이 계속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약국 운영 중에 음반을 함께 하자는 제의를 받았을 때 흔쾌히 허락했던 거죠.”
 -그렇다면 가수로서의 활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약사로서 지내던 중에 어렸을 적 기념음반을 냈던 작곡가 정종택 선생님으로부터 ‘쌍쌍파티’라는 메들리 음반을 같이 하자는 제의를 받았어요. 약사와 가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게 된거죠. 그런데 ‘쌍쌍파티’가 대박이 난거에요. 그래서 외도 아닌 외도를 했어요. 만약 약국이 잘 됐으면 음악을 안했을 수도 있죠.(웃음)”
 -약국 운영이 생각보다 어려웠다는 건가.
“뜻대로 잘 안되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 졸업하자마자 약국을 운영한다는 게 무리였던 것 같아요.”
 -그래도 약사를 ‘배신’하는 것이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텐데.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밤업소에서 공연을 하고 받는 출연료가 조그만 동네약국에서 한달내내 새벽 일찍 문 열고, 늦은 밤에 문 닫아서 얻는 수익의 몇 십 배가 되는 거에요. 당시엔 약국도 적자가 난 상태인데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저로서는 가수로 전향할 만한 동기가 되기에 충분했죠.”
 -하루아침에 준비 없이 스타가 됐다. 어려움은 없었나.
“가수가 되고부터는 정말 운이 좋았어요. 보통 데뷔하기 전에 연습생 생활을 오래 하는데 저 같은 경우에는 정말 자고 일어나니까 쌍쌍파티가 대박을 터뜨렸죠. 그 후 1985년에 1집 <비내리는 영동교>로 정식 데뷔를 했어요. 가요계 데뷔하면서부터 탄탄대로였죠.” 
 -화교출신이어서 차별을 받았다는 얘기가 있다.
“데뷔한 해에 신인상을 받았어요. 그때 한 기자가 ‘외국인한테 상을 주면 안된다’라고 항의를 했었어요. 굉장히 서운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화교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시선을 먼저 받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실보다는 득이 컸던 거죠. 실제로 가요계에서 그런 일은 굉장히 미미한 일이에요. 화교가 아니더라도 다른 일들로 충분히 힘든 상황이 있었을 거예요.”
 -‘연예인’ 주현미로서 활동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다면.
“1987년에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하는 근로자들을 위해 KBS 가요무대를 갔던 적이 있어요. 그때 외화벌이를 위해 고생하고 있는 근로자들에게 굉장히 큰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나요.”   
 
우연한 기회에 운명처럼 다가온 가수로의 길은 지금의 ‘주현미’를 만들어낸다. 신인상에 이어 10대가수상, 골든디스크상 대상, 올해의 가수상 등 수 많은 상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순수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트로트를 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는 이제 데뷔 29주년을 맞았다. 그녀는 여전히 수많은 콘서트와 공연 뿐 아니라, 라디오 진행과 가요무대까지 바쁜 스케줄에 쉴 틈이 없다. 최근엔 다문화가정을 위한 사회적 활동에도 점차 관심을 넓혀가고 있다.  
 -다문화 가정을 위한 활동에도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다문화가정의 문제가 남일 같지 않더라고요. 얼마 전 제가 KBS에서 매일 오전 진행하는 ‘주현미의 러브레터’라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웨딩콘서트를 진행했던 적이 있어요.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다문화부부 7쌍을 선정해서 전통 혼례를 올렸어요. 저 혼자서 주체적으로 이런 일을 기획하지는 못하더라도 봉사단체를 통해서나, 기부를 통해서 도울 수 있다면 적극적으로 돕고 싶어요.”
 -현재 하고 있는 기부 활동이 있나.
“‘주현미의 러브레터’라는 이름으로 2011년에 다문화가정을 돕기 위한 음반을 제작했어요. 판매된 음반의 수익금은 ‘KBS 강태원 복지재단’을 통해 전부 다문화 가정에 전달하고 있어요.”
 -데뷔 30주년을 앞두고 있다. 트로트가수로서 지금껏 본인이 가지지 못한 자질을 지닌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미자 선배님이요. 그 시대였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그 분만의 안정적이고 푸근한 느낌이 부러워요. 시대가 바뀐 지금은 대선배님이 남기신 느낌을 우리가 흉내 낼 수 없다는 게 아쉽죠.”  
 -주현미에게 트로트는 어떤 의미인가.
“저의 음색이나 정서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장르죠. 트로트엔 굳이 멜로디를 화려하게 꾸미지 않고 가사를 자극적이게 표현하지 않아도 깊이가 있는 편안함이 있어요. 나이가 들수록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노래 같아요. 정말 많이 살아보고 결혼도 하고 부부싸움도 해보고 이런 걸 다 겪었을 때서야 아마 피부에 와닿을 거예요.(웃음)” 
 
 
"중앙인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 
다른 유행가는 몰라도 교가만큼은 
꼭 외우는 중앙인이 되어주세요."
 
 
 
 
당신에게 중앙대란?
 
“지금의 저를 있게 한 큰 집이에요. 그래서인지 같은 공간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어도 남처럼 느껴지지 않아요. 어디서든 ‘나는 중앙대 몇 학번이다’는 얘기만 들리면 마음이 편해져요. 중앙대라는 커다란 보금자리에서 삼삼오오 모여 사는 가족을 만난 것 같거든요.”
 
 
 
<장윤정 ‘어머나’ 주현미 ‘어머나’될 했다?>
‘어머나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 여자의 마음은 갈대랍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흥얼거렸을 유행가다. <어머나>는 2004년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가수 장윤정을 국민 트로트 가수로 알린 노래다. 발랄한 가사와 경쾌한 멜로디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매료시킬 만한 매력이 충분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노래의 주인이 장윤정은 아니었다는 사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캐스팅 비화가 있는 것처럼 노래 한곡의 주인공에도 숨겨진 사연이 많다.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어머나>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어보자.
 -<어머나>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다니.
“<어머나>를 쓴 작곡가가 곡을 저뿐만 아니라 여러 가수한테 줬었어요. 그 때 제 나이가 40대 초반이었는데 처음 곡을 받고 열심히 연습했었죠. 그런데 아무리 연습해도 이 노래가 지닌 풋풋한 느낌을 살릴 수가 없더라고요. 아무리 역이 훌륭해도 젊은 역할을 나이 많은 사람이 소화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에요.(웃음)” 
 -그래도 욕심이 나지는 않았나.
“노래가 좋아서 욕심이 났어요. 무대 위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상상도 했었어요. 그런데 ‘내가 과연 팬들 앞에서 애교를 떨어가면서 잘 소화해낼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보면 그건 아니더라고요. 분위기를 성숙하게 바꿔볼까도 했는데 결국 고심 끝에 안하겠다 했죠.”
 -대박을 터뜨렸다. 후회가 있었을 법하다.
“그건 장윤정이기 때문에 히트가 된 거에요. 당시만 해도 장윤정이 20대였잖아요. 풋풋한 20대가 부르니까 얼마나 귀여워요. 게다가 실력도 좋고요. 만약 그 곡을 다른 가수가 불렀다면 그 노래를 온전히 표현하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후회는 전혀 없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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