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대석 
한국언론인협회장(정치외교학과 59학번)

 

  우리나라 방송기자 1호, 성대석 한국언론인협회장(75)은 언론계의 양대 산맥, 신문과 방송의 통합을 늘 꿈꾼다. 기자 생활의 꽃이라는 9시뉴스 앵커와 해외특파원을 거치면서부터 늘 생각해오던 일이다. 무수히 속해 있던 각 계열별 모임을 ‘언론’이라는 키워드로 묶은 그는 달달마다 언론 세미나를 진행하며 언론 발전에 힘쓰고 있다. 그는 은퇴한 언론인이 아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하는 펄떡펄떡 살아 숨 쉬는 언론인이다.
 

  동이 트기 전, 성대석 회장의 사무실 앞에 다섯 종류의 신문이 차곡차곡 쌓인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매일경제, 그리고 문화일보다. 기척을 느낀 것처럼 곧이어 잠에서 깨어난 그는 불을 켜고 영어책을 집어 든다. 새벽마다 하는 영어 공부는 그가 15살이었을 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해오고 있는 습관이다. 유창한 발음이 방을 쩌렁쩌렁 울린다. 날이 밝으면 신문을 읽고 기사를 쓰는 언론인이 되지만, 이때만큼은 외교관을 꿈꾸던 중학교 2학년 소년으로 변신한다.
  -어렸을 때 꿈이 기자가 아닌 외교관이었다니?
  “초등학교 때 6·25를 겪었다. 그때 우리 집안이 독립운동도 하고 망명도 갔는데, 그래서인지 정치에 관심을 쉽게 가질 수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TV에서 유엔이라는 단체를 보게 됐다. 전 세계적인 분쟁을 해결하는 국제단체가 있다는 사실이 어린 마음에 인상적으로 다가왔고 외교관이 되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외교관을 꿈꾸고부터 영어 공부를 유난스럽게 했다는데.
  “영어에 미쳤다.(웃음) 당시 교과서였던 ‘English middle school’을 가지고 다니면서 막 읽었다. 입이 트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조건 큰 소리로 쉼 없이 읽었다. 수업시간에 배우는 문장의 5형식 같은 것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늘 있었다.”
  -노력에 비해 대학 진학 시기가 늦다.
  “6·25때 피난을 가느라 학교를 쉰 탓에 동기들보다 2년이 지체됐다.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려서 어떻게든 그 2년을 돌려놓고 싶었다.”
  -시간을 돌리기라도 하려던 건가.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2년을 회복할 방법이 있었다. 당시 대학생은 복무 기간이 일반인의 반인 1년 6개월이었기 때문에 군대에 갔다 오면 됐다. 재학 중이라면 언제라도 상관없었지만 곧 기간이 변경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서 1학년을 마치자마자 군대에 갔다.”
  -결국 2년을 회복한 건가.
  “아니다. 제대하고 복학하려고 하니 학기가 맞지 않았고, 때문에 반년을 그냥 흘려보내야 했다. 학교로 돌아왔을 땐 간신히 1년이 회복된 후였다.”
  -그래도 훨씬 자신감이 붙지 않았나. 그나마 비슷한 자리에서 경쟁을 시작한다는 사실에 위안이 됐을 것 같은데.
  “그렇다. 그때부터 영어와 관련된 대회란 대회는 다 나가면서 본격적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전국 대학생들이 모여 하는 유엔총회에서는 사회자를 맡기도 했다.”
  -마지막 관문인 외교관 시험은 언제 볼 계획이었나.
  “4학년 때부터 취직을 위한 시험을 보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막상 4학년에 즈음해 시험을 알아보니 막막했다. 그때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외교관을 잘 뽑지 않았고 시험도 드물게 봤기 때문이다. 3~4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였다. 가난한 집안을 생각하면 3~4년은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결국 꿈을 접은 건가.
  “먹고 살기 위해서, 목표였던 외교관 시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꿈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 후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른 무엇이 되겠다는 마음 없이 그냥 반쯤 죽은 채 학교를 다녔다.”
  -상실감이 컸을 것 같다. 회복하려면 꽤 시간이 걸렸을 것 같은데.
  “법정대학에 국제해양법으로 유명한 박종성 박사가 있는데, 그분이 날 구해줬다. 평소 내 영어실력을 눈여겨보고 있다가 영자신문사 ‘코리아 헤럴드’의 전신인 ‘더 코리안 리퍼블릭’에 시험 공고가 떴으니 한번 응시해보라고 조언해줬던 거다.”
  -갑자기 언론사 시험을 보라니 당황스러웠을 것 같다.
  “이래봬도 학교 방송국 ‘UBS’ 3기였다. 실무국장까지 지냈고, 방송도 자주 했다. 내 목소리가 전 캠퍼스에 울려 퍼진다는 사실을 신기해하면서 학보도 열심히 읽었다. ‘중대신문’은 물론 ‘중앙헤럴드’까지 꼼꼼하게 읽고 분석하곤 했다. 기자가 되려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언론매체에는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던 거다.”

▲ 성대석 동문이 하루 동안 스크랩한 기사들을 들고 있다.

  한 번도 기자를 꿈꾸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는 타고난 실력으로 경쟁률 270대1을 뚫는데 성공한다. 4학년에 막 진학한 학부생 신분으로 취직에 성공하니 학교에는 방까지 붙는다. ‘약학대 학생 두 명 취직에 이어 정외과 성대석 학생 더 코리안 리퍼블릭 합격해.’ 그때부터 언론과의 질긴 인연이 시작된다.
  -평소 언론매체에 대한 관심이 있었으니, 취직한 후에도 적응이 빨랐겠다.
  “그렇다. 분위기에 익숙해지는 건 금방이었다. 그러나 선배들이 물려준 낡은 타자기로 기사를 써야 했기 때문에 생소한 자판을 외우고 타자 속도를 높이느라 고생했다.”
  -영타 연습을 했다는 건가.
  “그렇다. 1분에 200자 이상을 쳐야 했다. 거기다 후배들은 일요일 휴일스케치 꼭지를 맡았기 때문에 날씨를 영어로 말하는 법을 새로 배워야 했다. 그래도 우리는 국자신문 기자들보다 배는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어서 그럭저럭 버텨나가곤 했다.”
  -국자신문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은 전혀 없었나.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박종성 박사가 찾아왔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영자신문은 매체파워가 없다며, 국자신문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삼성과 엘지, 그때는 럭키금성이 합작해서 추진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방송국인 동양방송(TBC) 시험을 쳐볼 것을 권유했다. 그때서야 나는 국자신문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우리말로 방송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종성 박사 덕분에 인생의 길이 여러 번 바뀐 것 같다. 고마움이 남다를 것 같은데.
  “물론이다. 그분에게 무한한 고마움이 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제 막 신입 딱지를 뗀 더 코리안 리퍼블릭을 포기하고 TBC 시험을 봤다. 4일에 거쳐 봤는데, 필기시험, 마이크 테스트, 카메라 테스트를 비롯해 면접까지 거쳤다.”
  -경쟁률이 굉장했다고 들었다.
  “601명이 몰렸다. 1차로 10명을 뽑고 최종 면접을 보는 방식이었다. 기자는 기사만 쓰고, 아나운서는 방송만 했던 이전 방식과 달리 기사 쓰기와 방송 둘 다 하는 방송기자를 처음 뽑을 때여서 결과를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어떻게 됐나.
  “발표 당일, 방송국은 물론 길가에도 방이 여러 개 붙었다. 거기에는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나도 서둘러 명단을 확인했는데, 거기 내 이름이 있었다. 방송기자 부문에 내 이름 딱 하나 있었다. 혼자만 된 거다.”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라니, 감회가 남달랐겠다.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웃음) 나는 더 코리안 리퍼블릭도, TBC도 됐구나, 사회 진출할 때마다 성공했구나라는 생각이 자신감으로 승화됐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으로 맡았던 일이 뭐였나.
  “경찰서를 찾아다니며 사건을 찾는 일이었다. 신출내기 기자는 사회가 어떻게 형성돼 있고, 어떤 면이 있는지를 알기 위해 현장을 찾아다니는 일이 중요하다. 인간 세상의 기골을 아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경찰서마다 출입을 하고, 부서마다 찾아다니며 일일이 파헤치는 일에 집중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그렇다. 하지만 경찰서 출입을 했느냐 안했느냐에 따라서 능력의 차이가 생긴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템이 던져졌을 때, 그것을 그대로 보도하는 것과 뒤집어서 보도하는 것은 다른 거다. 거기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보충자료를 찾아내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
  -매일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겠다.
  “아니다. 사건이 없어서 발굴하다시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찰서를 순례해도 아무 일이 없을 경우에는 영안실까지 가기도 했다. 영안실에서 시체가 있는 캐비닛을 일일이 열어서 어떻게 죽었나를 살피는 거다. 보기에도 처참한 장면이 많았지만, 기자로서의 의무감에 꾸역꾸역 들여다봤다.”

▲ 한국언론인협회보 기사 피드백을 보고 있는 성대석 동문.

  ‘좋은 기자’가 되기 위한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다른 부서에 몸담지 않고 경찰서를 출입하는 경찰기자, 사건기자를 계속해 능력과 노하우를 쌓아나간다. 기사 쓰기와 방송을 동시에 하는 방송기자 1호로서의 본분도 잊지 않고 주력한다. 그의 노력은 기자의 꽃이라는 9시뉴스 메인앵커를 맡는 것으로 증명된다.
  -중앙대 출신이 9시뉴스 메인앵커를 맡은 건 처음이지 않았나.
  “그렇다. 주말뉴스를 맡다가 메인앵커로 승격됐는데, 굉장히 자랑스러웠다. 그러던 도중 TBC는 KBS로 언론 통폐합이 됐고, 나는 원래 TBC채널이었던 7번, KBS2에서 7시뉴스 앵커를 맡게 됐다.”
  -그 시절 대학원도 다니지 않았나. 굉장히 바빴을 것 같다.
  “7시뉴스가 끝나자마자 학교로 달려갔다. 메이크업이 다 지워져서 얼굴은 말이 아니었는데도, 수업을 듣겠다는 일념으로 차를 몰았다. 학교까지 20분 걸렸는데, 그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방송도 열심히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온 것 같나.
  “방송도 방송이지만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기에 그렇게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언론 관련 대학원은 중앙대가 최초였다. 유일하게 신문 방송 대학원이 있는 학교가 중앙대였다. 거기서 오는 특별함이 있었다.”
  -얼마 안 가 특파원이 됐다. 기자 생활의 정점을 찍은 것 같은데.
  “2개월 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중미로 갔을 때, 거기 사람들이 왜 뉴스 안하고 여기 왔냐고 했다.(웃음) 여기로 파견됐기 때문에 왔을 뿐이라고 했지만, 내심 뿌듯했다. 9시뉴스 앵커도, 특파원도 해봤으니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평생을 언론계에 몸담았다. 계속해서 품고 있던 신조가 있나.
  “한 번 기자는 영원한 기자여야 한다는 거다. 그동안 내 신조가 흔들릴 만한 일이 몇 번 있었다. 정권에서 부른다든가, 어떤 자리를 추천받는다든가 하는 일들이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보고 들은 것들로 인해 정치나 관리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고, 때문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언론인이 되기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주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도 있다. 자신을 움직이는 것은 자기 자신이니까, 뭐든 시도하고 개척해보려고 노력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나.
  “언론인으로서의 신념을 지키면서 계속해서 활동할 계획이다. 언론 시험에서 합격한 사람은 언론인이 아니라 그냥 보도 요원이다. 과거를 똑바로 기억하고 정론직필을 하는 사람이 진짜 언론인이다. 권력에 아부하지도 않고, 권력에 가까이 가지도 않고, 유혹을 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건을 찾기 위해
  영안실 시체까지 살폈다

  증거물을 발견하면
  묵묵히 기사를 썼다

 

  부처의 소리를 듣는 언론인

  성대석 회장의 책장에는 종교 서적이 가득하다. 반은 기타 종교 책이고, 반은 불교 책이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책장을 들춘다. 경전을 읽고 또 읽으며 마음에 새긴다. 믿고 있는 불교 경전은 물론이고, 성경이며 코란도 가리지 않는다. 독서는 어렸을 때부터 계속해온 그의 습관이자 일상인 셈이다.
  -불교 신자인 걸로 알고 있다. 믿음을 갖게 된 건 언제부터였나.
  “모태신앙이 불교다. 그래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절에 갔다. 태어나서도 절에 자주 가서, 절에서 하는 모든 행위를 아주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느끼며 자랐다. 절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다.”
  -신앙심이 꽤 깊다고 들었는데.
  “책 보기를 좋아해서 불교 서적을 특히 많이 읽었다. ‘불교란 무엇인가’부터 반야심경이나 금강경 같은 것들까지 전부 섭렵했다. 불교사전까지 갖춰놓아서 부처의 가르침이 어떤 건지 내내 고민하고 찾아보면서 컸다.”
  -불교 뿐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관심을 많이 갖는 것 같다.
  “불교에서 시작해서 시선을 넓혀나갔다. 종교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전 세계적으로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어떤 의식들을 하는지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알아나가는 게 재밌었다.”
  -본인에게 종교는 어떤 의미인가.
  “대답하기 참 어려운 질문이다. 누구든 마찬가지일 것 같다. 꾸준히 해온 독서와 사색을 통해 어느 질문을 받더라도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을 곧바로 말할 수 있도록 노력했는데, 역시 쉽지가 않다. 그래도 내 나름대로의 논리와 의미를 정립하려고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내 믿음에 있어 중요한 의미인 것은 확실하다.”
  -종교적인 신념이 살아가는데 어떤 도움을 주나.
  “내 몸을 움직이는 건 내 마음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신념, 신앙이 나를 다스리고 이끌어 가는데 큰 도움을 준다. 내가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거다. 불교적인 사고로 가득한 머리와 불교적인 몸가짐이 나를 지배하고 움직이고 있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어머니(母)다. 모친(母親)이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만들어준 사람이라면, 모교(母校)는 나를 사회적 동물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학교에 무한한 애정을 느끼고 책임감을 갖는다. 더 나은 공간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도와야 하는지 항상 고민한다. 또 내가 받은 것들을 보답하기 위해 늘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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