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시국 속 저항의 길
  • 이건희 기자
  • 승인 2017.08.27 23: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80년대: 저항의 시대
군부정권 대학언론 탄압에 항거
기자들에게 수배령 내려지기도
대학언론 민주화의 시발점
탄압과 압제 속에도 도전 이어가
 
1980년대 중대신문에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바로 신군부 정권이 등장했기 때문이죠. 독재 정권은 대학언론에 감시와 탄압을 자행했습니다. 중대신문 기자들은 편집자율권과 검열폐지 등 언론의 민주화와 독립을 위해 저항했죠.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이로 인해 중대신문은 독립적이고 공정한 대학신문으로 거듭났습니다.
 
  편집자율권을 향한 외침
  중대신문은 신군부의 탄압과 비민주적 조치들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1980년 5월 15일 발행 예정이었던 ‘제832호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신문엔 가두시위 관련 현장취재 기사와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논설이 담겨있었습니다. 하지만 신군부는 검열과정에서 기사삭제를 요구했죠. 중대신문은 이에 저항하기 위해 신문발행 대신 대자보 형식으로 학내 곳곳에 신문을 게재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편집장이었던 송우달 동문(경제학과 78학번)을 비롯한 기자들에게 수배령이 내려졌습니다. 수배령이 내려진 기자들은 수사망을 피해 전국 곳곳을 떠돌아야 했죠.
 
  1984년 5월에는 사전 원고검열 거부와 편집자율권 확보를 위해 기자들이 제작거부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제952호와 제953호 신문이 주간교수와 국장에 의해 만들어졌고 학기 중 신문이 조기 종간되는 위기를 맞이했죠. 약 1년 후에도 제976호의 ‘대통령 방미 귀국 이후 즈음하여’라는 기사와 관련하여 편집자율권 문제가 불거졌고 기자들은 신문제작을 거부하며 철야농성에 돌입하기도 했습니다.
 
  압제에 맞선 자유언론투쟁
  중대신문이 걸어온 언론자유를 향한 저항의 중심엔 1987년 5월 ‘자유언론투쟁’이 있습니다. 자유언론투쟁은 대학원생 전임기자제와 임의적 특채기자 선발 등 당시 윤재천 주간교수의 비민주적 운영에 대항해 38기 기자 4명이 사퇴하며 시작됐죠.
 
  이후 전직기자들을 중심으로 ‘중대신문 재학생 전직기자회의(전직기자회의)’가 결성됐고 본격적인 저항에 나섰습니다. 전직기자회의는 학교 당국에 ▲편집자율권 완전 보장 ▲주간교수 권한 대폭 축소 ▲편집국장 제도에서 행정국장 제도로의 전환 ▲대학원생 전임기자제도 폐지 ▲특채기자제도 폐지 ▲비민주적 사칙 전면개정 등을 요구하며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전직기자회의는 대자보와 서명운동을 통해 중대신문이 처한 문제를 많은 학생에게 알렸습니다. 투쟁의 열기는 점점 고조됐고 대학본부와 전직기자회의 대표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칙개정위원회를 열게 됐죠. 이를 통해 요구조건들에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당시 전직기자회의 지도부였던 최영진 교수(정치국제학과)는 “중대신문 자유언론투쟁은 6월 민주항쟁의 중요한 계기 중 하나다”며 “자유언론투쟁을 시작으로 언론자유와 편집권 사수를 위한 움직임이 다른 대학들로 퍼져나갔다”고 말했습니다.
 
  탄압 속 도약을 위한 노력
  1980년대 중대신문은 언론탄압 투쟁 외에도 다양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81년에는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중앙인의 의식조사’를 최초로 시행했습니다. 1982년에는 ‘영신기념관 건립 모금운동’을 시작해 3년 동안 9175만원을 모금했고 지령 제900호를 돌파했죠.
 
  1983년에 들어서는 대학생활 안내지인 ‘대학인과 대학생활’을 발간했으며 1986년에는 지령 제1000호를 돌파했습니다. 1989년에는 ‘현대자본론’을 주제로 연속강좌를 개최했고 ‘90년대 학생운동의 전망과 과제’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을 열기도 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