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신문의 뿌리를 내리다
  • 이주리 기자
  • 승인 2017.08.27 23: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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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70년대: 초석을 다지다
최초의 대학신문,
끊임 없는 고민과 시도
 
혁신과 독립으로
중대신문  기틀 마련

‘개척자’는 새로운 영역, 운명, 진로 등을 처음으로 열어가는 사람입니다. 중대신문은 대학신문의 개척자로서 많은 일을 겪으며 대학신문이 나아갈 길을 닦았죠. 1947년부터 1970년대까지 중대신문이 초석을 다져온 과정을 알아볼까요?

  70년 역사의 첫 펜을 들며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47년 9월 1일 ‘중대신문’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中大學報(중대학보)’라는 이름으로 발간된 중대신문은 국내 최초 대학신문입니다. 따라서 ‘대학신문의 효시’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죠. 중대학보는 창간사에서 ‘사회적 혼란 돌파라는 사명을 자각한 학생이 양심에 따라 수업에 온 힘을 다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신문을 발간했다’고 밝힙니다.

  1948년 4월 1일 발행된 제2호에서는 한글판 가로쓰기 편집체제를 시범 도입하며 발전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가로쓰기 편집체제 신문을 거의 볼 수 없던 당시 이는  획기적이었죠. 당시 중대학보는 주로 논문, 학술정보를 다루는 학술지 성격을 띠었습니다.

  독립적인 신문사로 발전하다
  중대학보는 6·25전쟁으로 열악한 상황에 맞닥뜨렸습니다. 중대학보는 1952년 전쟁을 피해 옮겨간 이리분교에서 제3호부터 제6호까지 제작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신문 편집장소가 없어 원고를 책가방 속에 보관했고 조판·인쇄를 위해 트럭에 매달려 한강을 건너가야 했죠. 당시 중대학보는 오직 기자들의 의욕 하나로 버틸 수 있었습니다.

  기자정신으로 버틴 중대학보는 1954년 희락관에 독립 편집실을 마련하며 독립기구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습니다. 학보사 예산도 따로 편성됐죠. 또한 같은해 제호를 ‘中大新報(중대신보)’로 바꾸고 학예부에서 독립하는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1950년대 중반에는 수습기자 공개채용 제도와 모니터 제도를 시행했습니다. 중대신보 기자를 희망하는 학생이 많아지면서 시험을 통해 수습기자를 뽑은 것이죠. 모니터 제도를 통해 동문, 교수에게 중대신보에 대한 비판과 의견을 듣고 문제점을 개선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기성 언론도 시도하지 못한 제도로 중대신보의 질적 향상을 가져왔죠.

  기반을 마련하고 저변을 확대하다
  1960년대에는 신문사 내 기구와 운영에 변동이 있었습니다. 지도 교수로 구성된 ‘편집지도위원회의기구’를 강화하면서 주간 제도를 없앴습니다. 이는 편집의 질적 향상을 가져왔죠.1960년 ‘中大新聞(중대신문)’으로 제호를 바꾸고 기존의 순간 발행을 목요일 주간 발행으로 변경했습니다. 이후 1966년 10월 6일 발행한 제376호부터는 순 한글판으로 편집·제작했죠.

  한편 어린이에게 유익한 편집물이 부족했던 60년대 당시 중대신문은 부록 ‘어린이판’ 50만 부를 연간 4회 발행하여 전국 국민학교에 무상 배부했습니다. 정부도 시도하지 못한 방대한 시도의 취지는 교육적 신념과 희생적 봉사정신의 실천이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중대신문의 저변이 더욱 확장됐습니다. 1974년 3월 7일부터 격주 8면으로 증면하면서 중대신문은 학내 소식을 갈망하던 독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갔죠. 또한 1979년부터 1년에 한 번씩 전국의 고등학교에 중앙대 홍보내용을 담은 특별판을 첨부한 중대신문을 배부했습니다. 당시 편집장이었던 승삼선 동문(기계공학과 77학번)은 “고등학교에서 대학소식을 알 수 없었을 때다”며 “많은 고등학교에서 중대신문을 보내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뜨거운 반응이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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