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람이 싣고 온 문학

 문예창작전공과 중대신문이 주관하는27회 의혈창작문학상에서 시 1편과 소설 1편이 최종 수상작으로 선정됐습니다. 의혈창작문학상은 청년 문학도들이 한국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마련된 자리인데요. 전문대 이상 학부 재학생(휴학생 포함)을 대상으로 지난 1110일까지 지원을 받았습니다. 올해도 시 부문 13, 소설 부문 24명 등 많은 문학도가 지원했는데요. 심사는 예심과 본심으로 나뉘어 진행됐습니다.

 시 부문 예심은 조동범 강사(문예창작전공)와 김근 교수(문예창작전공)가 심사해 총 3명의 학생이 통과했습니다. 이후 본심에서 이수명 교수(문예창작전공)와 이승하 교수(문예창작전공)에게 심사를 받았는데요. 시 부문 본심 심사위원인 이승하 교수는 대개 다양한 소재, 신선도 높은 표현력을 보여줘 읽는 재미를 십분 느끼게 해주었다하지만 되풀이해 읽어도 주제가 무엇인지 모를 작품이 태반이라 아쉬웠다고 전했습니다.

 소설 부문의 예심은 박형숙 강사(문예창작전공)와 윤고은 강사(문예창작전공)가 심사를 맡아 2명의 학생이 본심에 올라갔습니다. 이후 오정희 교수(문예창작전공)와 방현석 교수(문예창작전공)의 손에 당선작이 뽑혔죠. 소설 부문 본심 심사위원인 오정희 초빙교수는 학부 학생이 쓴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준급인 작품들이라 놀라웠다작품 속 세심하고 현실적인 묘사들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고 말했습니다.

일러스트 황예나님
일러스트 황예나님

팔레스텔
  그는 방 안에 먼지가 쌓여가는 걸 보며 인생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집 먼지는 대개 인간의 각질로 이루어져 있다. 이 방 안에 머무는 인간이라고는 그가 전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먼지가 많은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자신이 거대한 먼지 덩어리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주 곱고 가벼운 입자들이 뭉쳐 만들어진. 우주에서 보면 그는 지구라는 먼지 덩어리 속에 사는 보이지도 않는 먼지 입자일 뿐이니까 딱히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그는 휴지를 뜯어 전자레인지 위에 수북이 쌓인 먼지를 닦아냈다. 휴지에 시커먼 먼지가 묻어났다. 휴지를 대충 뭉쳐 쓰레기통에 던진 뒤 전자레인지에 삼각김밥을 넣었다. 전자레인지 안에서 삼각김밥 세 개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는 세 걸음도 채 안 되는 곳에 있는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여전히 같은 화면이었다. 그는 화면을 마구잡이로 클릭했다. 종료 창은 뜨는데 도무지 종료되지 않았다. 종료 창이 뜬 채로 게임이 계속 이어졌다. ‘종료하시겠습니까?’라는 문구가 마치 그를 놀리는 것 같았다. 거슬렸다. 그는 패드의 종료 버튼을 꾹꾹 눌러댔다. 거대한 손가락 탓에 다른 버튼들이 같이 눌려 여러 개의 메뉴가 켜졌다 꺼졌다 했다.
  그는 손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다 컸다. 재본 지는 오래되었지만 키가 2미터는 족히 될 것이었다. 그는 생각 없이 쑥쑥 자라나는 자신의 몸뚱이가 부끄러웠다. 몸이 커지면 커질수록 사람들은 그를 잘 기억했다. 그는 누군가에게 인식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하지만 그 커다란 몸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거의 모든 끼니를 원룸텔 아래에 있는 편의점에서 해결했다. 혹시라도 같은 아르바이트생이 이틀 연속으로 있을 때에는 조금 더 걸어 모텔 골목에 있는 다른 편의점에 가거나, 방에서 기다렸다가 다음 타임 아르바이트생이 나오면 가곤 했다. 물론 그렇게 하더라도 누군가는 그를 인식하게 되겠지만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했다.
  영양가 없는 음식만 골라 먹는데도 그는 여전히 자랐다. 아주 서서히. 그는 종종 이대로 끊임없이 자라다가 죽기 전에 몸이 빌딩만 해지는 꿈을 꾸었다. 사람들이 몰려와 그를 구경했다. 그는 누울 수도 걸을 수도 없는 상태로 그들에게 포위되어 눈알만 굴릴 수 있었다. 작은 사람들은 그를 보며 두려워했지만 그는 작은 사람들이 두려웠다. 그의 시점에서는 그들의 표정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밤 잠들기 전 이불로 자신의 키를 가늠해보았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불이 가슴께까지 왔던 것 같은데 지금은 명치까지 왔다. 이러다가 이불이 배꼽까지밖에 안 오면 어쩌나, 그는 진심으로 걱정했다. 안 그래도 그는 추위를 잘 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게임 캐릭터는 ‘종료하시겠습니까?’ 창에 머리가 가려진 채 멸망해가는 뉴멕시코주 도시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차와 건물들이 전부 덩굴에 뒤덮여 있었다. 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무너진 건물마다 총알 자국과 핏자국이 가득했다. 게임 CD를 꺼내거나 콘솔 전원을 꺼 종료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여태까지 쌓아둔 데이터가 날아간다. 아니면 차라리 종료 창이라도 없어졌으면 좋겠는데 종료 창도 꺼지지가 않았다. 데이터가 다 날아간다면 공들여서 만들고 있던 이번 달 수입이 전부 다 날아가는 셈이었다.
  그는 오로지 게임으로만 돈을 벌었다.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을 플레이한 영상을 올려 수익을 내는 식이었다. 그는 다른 게임 유튜버들처럼 게임을 하면서 말을 하거나 팬들과 소통하진 않았다. 하지만 말없이 게임만 하는 그의 영상을 찾는 사람이 은근히 많았다. 그가 한 번 영상을 올리면 보통 조회수가 30만을 웃돌았다. 계정에 수익 창출 등록을 하면 사람들이 그의 영상에 딸린 광고를 보는 만큼 그에게 수익이 생겼다. 그렇게 많은 수입은 아니어도 그가 살아가기에는 충분한 돈이었다. 게임의 엔딩을 보고 영상을 편집해 올리면 대강 한 동영상 당 20만원에서 많게는 50만원까지 벌 수 있었다. 동영상 하나를 만드는 데에는 평균적으로 2주가량이 걸렸다. 그보다 더 적게 걸릴 때도, 더 많이 걸릴 때도 있었다.
  그는 남들보다 게임을 월등히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많았다. 게임은 아무리 어렵더라도 많은 시간을 들이면 반드시 깰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그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반드시 엔딩을 봤다. 그리고 자신의 채널에 영상을 올렸다. 게임을 할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게임을 하는 대신 그가 올리는 동영상을 보았다. 영상이 꾸준히 올라가니까 소문이 나고 구독자 수도 점점 많아졌다. 그러자 게임회사에서 협찬 게임을 보내주기 시작했다. 그는 협찬으로 들어오는 모든 게임을 플레이했다. 그렇게 하면 협찬도 구독자도 더 늘릴 수 있었다. 하지만 딱히 그걸 노리고 게임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살아갈 만큼의 돈만 있으면 됐다.
  이번에 녹화하던 것은 게임 무비컷 영상이었다. 게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플레이한 뒤 ―보통 한 게임의 엔딩을 보는 데에는 10~15시간이 소요된다― 스토리 위주로 영상을 편집하는 것이다. 무비컷 영상은 한 번 만드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올려두면 두고두고 수익이 생겼다. 마니아층에서 무비컷 영상은 영화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최근 플레이스테이션 게임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어쭙잖은 영화보다 훨씬 나았다. 
  게임에서는 어떤 실수를 해도 만회할 수 있다. 엔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해서 다른 엔딩을 보면 된다. 캐릭터가 죽으면 직전 상황에서 다시 살아나 같은 실수를 안 하면 된다. 영화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스토리를 보는 것밖에 할 수 없지만 게임에서는 자신이 스토리를 원하는 대로 만들어 갈 수 있었다. 그것은 오로지 게임에서만 가능한 것이며, 많은 마니아들이 이러한 매력에 이끌려 게임을 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화는 그렇다 치고 자신의 삶에서조차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는 법이 없으니까.

  그는 다 데워지다 못해 그새 식어 버린 삼각김밥들을 꺼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의자 헤드에 걸어 놓은 옷과 수건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회전의자가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푹 꺼졌다. 그는 삐걱거리는 의자를 책상 앞으로 당기고 삼각김밥 껍질을 벗겼다. 삼각김밥을 한 입 크게 물고 우물거리며 다시 차분하게 종료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종료 창은 깜빡거리기만 할 뿐 도저히 꺼질 기미가 없어 보였다. 이쯤 되니 두려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에 데이터가 전부 날아간다면, 다음 달 월세는 고사하고 식비도 벌 수 없을 것이었다.
  그는 괜히 전화번호부를 뒤적여 보았다. 그가 유일하게 연락하는 사람은 한 살 터울 남동생뿐이었다. 하지만 동생마저도 그와 아주 가끔 문자를 하는 정도이지 통화를 하진 않았다. 그는 휴대폰을 멀찍이 던져놓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의자에서 기괴한 소리가 났다.

*

  앞방 802호 젊은 커플이 죽자고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지겹도록 자주 싸워댔다. 방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보면 주변 방들의 웬만한 소리는 다 들렸다. 본의 아니게 802호 커플의 싸움도 매일 듣고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어떤 일을 누가 할 것인가에 대하여 얘기하다 싸웠다. 짜장면을 먹고 난 그릇을 누가 치울 것인가, 돈을 누가 벌어올 것인가, 부모님께 결혼 얘기를 누가 할 것인가……. 어느 날은 여자가 울고불고 남자를 붙잡으며 자기가 노래방이라도 나가겠다고 했고 어느 날은 남자가 여자를 죽이겠다고 소리쳤다. 이따금 집기들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는 숨죽여서 그들의 소리를 들으며 인간은 참 무궁무진한 방법으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802호의 옆방 801호에는 미친 여자가 살았다. 새벽 불시에 802호나 그의 방문을 미친 듯이 두드리며 열려고 해대는 통에 그는 언제나 걸쇠를 걸어놓고 지냈다. 간혹 어디서 났는지 거대한 공구함을 복도로 질질 끌고 나와 스패너 따위로 문손잡이를 내려칠 때도 있었다. 하루는 깜빡하고 걸쇠를 안 걸어놓았다가 문이 거의 열릴 뻔한 적도 있었다. 그때 그는 한 발로 문 옆의 벽을 짚고 두 손으로 온 힘을 다해 문을 잡아당겼다. 한참 승강이를 벌이다 결국 여자가 제풀에 지쳐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평소 그 여자의 방에서는 거의 소리가 나지 않았다. 누군가 찾아오는 일도 없었고 새벽에 남의 방문을 두드리는 것 외에 나가는 일도 없어 보였다. 그는 그 여자가 대체 무얼 먹고 아직까지 살아 있는지 조금은 궁금했다.
  그는 의정부역 인근에 있는 ‘팔레스텔’에 살았다. 8층짜리 건물이었고, 한 층당 네 가구가 살았다. 시설이 좋고 역 근처이긴 해도 모텔과 다방들이 모여 있는 으슥한 골목에 있어서 그런지 보증금이 쌌다. 그는 처음 이곳으로 이사 올 때, 원룸텔 바깥에 ‘팔레스텔’이란 글자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팔레스타인’을 떠올렸다. 나름대로 어감이 마음에 들었다.

  오늘따라 802호 커플의 싸움이 길었다. 그는 귀를 틀어막고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캐릭터를 다시 움직여보았다. 그의 캐릭터는 이제 어느 폐건물 안을 헤매고 있었다. 신비한 돌을 찾아 파괴하는 퀘스트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한참을 달렸다. 무너진 건물 위로 비가 내렸다. 그는 캐릭터를 건물 옥상으로 가도록 했다. 옥상에 올라서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고 땅에는 피가 낭자했다. 그는 시선을 돌리며 도시의 풍경을 감상했다. 붉은빛으로 얼룩진 도시가 아름다웠다.
  그때 저 멀리 거대한 무언가가 보였다. 건물 보다는 작았으므로 건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건물을 빠져나와 그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아시아물소였다. 아시아물소는 황소나 얼룩소처럼 눈매가 선하지 않았다. 몸도 온통 시커멓고 큰 뿔도 달려 있어 위협적이었다. 도시 한복판에 거대한 아시아물소라니. 그 아시아물소가 무엇인지 주변에 어떠한 단서도 없었다. 아시아물소는 단지 오래전부터 그래 왔던 것처럼 그곳에 있을 뿐이었다. 
  그는 어릴 때 읽었던 숀텐의 동화집을 떠올렸다. 그 동화집의 첫 단편이 이런 거대한 물소가 나오는 내용이었다. 그 물소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길을 물어보면 큰 앞다리를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하지만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그 방향으로만 가면 되는지 그 이상의 질문에는 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신기한 것은 그 물소가 언제나 옳은 방향만을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물소를 공격했다. 총을 쏘고 단도로 찔렀다. 맨주먹으로 때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시아물소는 NPC인지 아니면 그냥 배경인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남동생으로부터 문자 하나가 왔다.
  「형.」
  그는 문자를 바로 확인했지만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금세 다음 문자가 왔다.
  「나 병원이야.」
  그는 주저하다가
  「왜」
  라고 보냈다.
  「산에서 굴렀어.」
  「왜」
  「그냥.」
  문자는 여기서 끝이 났다. 그는 체대생인 동생이 선배들에게 심한 체벌을 받는다고 들었던 걸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동생은 그가 더 이상 물어보지 않는다면 더 이상 말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반대로 동생이 그에게 무언가를 물어야 할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동생은 그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순간을 잘 알았고 그럴 때 구태여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동생의 그 배려가 불편했다. 동생은 태생적으로 친절한 성격이기도 했지만 그와 있을 때면 눈치를 보곤 했다. 눈치를 보는 행동은 그로 하여금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아시아물소를 바라보았다. 종료 창에 아시아물소의 머리가 가려져 있었다. 그 아래 두 갈래로 갈린 단단한 발굽이 보였다. 저 발굽은 매끈매끈할까 거칠까. 그런 생각을 잠시 했다.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모자를 주워서 쓰고 그 위에 후드를 덮었다. 체크카드를 집어 들고 슬리퍼를 신고 방을 나섰다. 짧은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유리 깨지는 소리 사이로 잡음이 섞여들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방, 803호의 문틈에서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803호에는 아흔 즈음으로 추정되는 노파가 살았다. 노파의 작은 눈은 금세 주름에 파묻혀 없어질 것만 같았다. 노파는 이따금씩 이가 하나도 남지 않은 주름진 입을 오물거리며 문 앞에 기어 나와 있곤 했다. 노파의 모습은 성인보다는 태아에 더 가까워 보였다. 노파는 문 앞에 나왔다가 스스로 못 들어가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가끔 노파의 겨드랑이에 두 손을 껴서 번쩍 들어 방 안으로 옮겨주었다. 그럴 때마다 노파의 앙상한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두 손으로 노파의 흉부를 다 감쌀 수 있을 것 같았다. 
  노파는 왠지 모르겠지만 그를 ‘아가씨’라고 불렀다. 그도 그 말이 크게 거슬리지는 않아 정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노파가 치매에 걸린 건 아니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답할 수 없었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단지 눈이 작아져 잘 안 보이는 것뿐이라고. 그는 노파가 싫지 않았다. 노파는 그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또 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멋대로 판단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노파는 그저 그를 옆집에 사는 아가씨 정도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노파의 방 문은 언제나 십 센티쯤 열려 있었다. 들락거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종종 딸로 보이는 아줌마가 와서 누워 있는 노파 옆에 잠깐 앉아 있다 갔다. 그 방 문틈을 슬쩍 들여다보면 언제나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워 있는 노파와, 현관 쪽 미니 냉장고 위 배스킨라빈스 하프갤런 사이즈 통이 보였다. 그는 그 통을 볼 때마다 대체 누가 저걸 사왔고 누가 먹었을까 궁금해 했다. 그러면서 이가 하나도 없는 노파가 혼자 하프갤런 통을 안고 오물오물 아이스크림을 먹는 상상을 하곤 했다.
  다시금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리고 문틈으로 다가갔다. 노파가 현관 근처에서 밖을 향해 무언가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더욱 가까이 가서 문 앞에 쪼그려 앉아 귀를 기울였다. 쪼그려 앉아 있어도 그는 노파보다 한참 컸다.
  가까이에서 들으니 노파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누구요- 누구요- 라고 묻고 있었다. 그는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 뒷걸음질 쳤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8층에 멈춰 있었다. 그는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건물주가 바뀌었으니 월세를 다른 계좌로 보내달라는 공고가 붙어 있었다. 그는 그 공고를 보며 몇 주 전을 떠올렸다. 쓰레기를 비우러 나가는 길이었다. 옆방 노파가 엘리베이터 앞까지 기어 나와 덩그러니 엎드려 있었다. 그는 엘리베이터로 다가갔다. 그러자 노파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그의 발목을 잡으며 도움을 청했다. 
  그는 한 손으로는 쓰레기를 들고 한 손으로는 노파를 부축했다. 노파의 쪽진 백발이 조금 헝클어져 있었다. 그는 노파를 부축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노파 역시 가만히 거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1층에 도착해서 노파는 경비실 문을 붙들고 서서 그에게 고마워요, 일 보세요, 라고 했다. 이가 하나도 없어 발음이 다 뭉개졌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 목례를 하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 원룸텔 지상 주차장을 지나 오른쪽으로 몸을 꺾으면 바로 이 일대 원룸텔이나 모텔들에서 쓰레기를 모아 버리는 곳이 나온다. 언뜻 보면 무단 투기한 쓰레기들이 쌓여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곳에 아무렇게나 쓰레기를 던져놓았다. 
  다시 팔레스텔로 들어오자 엘리베이터 앞에서 경비와 노파가 무언가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노파는 경비에게 자신의 아들이 어디로 갔느냐 물었다. 경비는 건물주가 갑자기 바뀌어서 자신도 잘 모른다고 답했다. 그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놓고 은근히 신경을 그들 쪽으로 쏟았다. 대강 얘기를 들어보니 전 건물주가 노파의 친아들인데, 말도 없이 건물을 팔아버리고 어딘가로 잠적했다고 한다. 노파가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노파를 부축했다. 노파는 물에 젖은 종이 인형처럼 흐물거렸다.

*

  그의 몸은 거대해서 남들보다 몸에 빈 공간도 많다. 그 빈 공간 구석구석마다 바람이 불어서, 그래서 추운 것인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옷을 여미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건물 밖으로 나서다가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팔레스텔 주차장에 동생이 서 있었다. 얼굴이며 팔 다리가 심하게 다친 행색으로. 그저 가만히 서서 나오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이 팔레스텔에 산다고 알려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동생이 여기 있다. 여기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 둘은 오랫동안 눈을 마주쳤다. 그는 동생의 새까만 눈동자를 보며 잠깐 어린 시절 동생의 모습을 떠올렸다.
  동생은 그보다 키가 작았지만, 운동을 좋아해 몸이 다부졌다. 그런 동생이 왼손에는 붕대를 감고 오른다리에는 통깁스를 했다. 얼굴은 부었고 눈가와 입가가 찢어지고 멍들어 있었다. 도저히 산에서 굴러 생긴 것이라고는 보기 힘든 상처들이었다. 
  그는 그것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가 묻지 않았으므로 그의 동생은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 알고 왔다, 왜 왔다, 얼굴은 왜 이렇게 됐다, 그런 말이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올라가자. 현우야, 하고 이름을 부를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에 현우는 벌써 그보다 먼저 엘리베이터로 향하고 있었다. 현우라고 직접 불러본 적이 있던가. 어릴 적에 동생을 뭐라고 불렀더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들어오자 공기가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원래 같았으면 정적을 깨고 현우가 먼저 실없는 얘기를 꺼냈을 것이다. 그는 엘리베이터 문에 붙어 있는 ‘기대지 마시오’를 눈으로 따라 그리며 반복해서 읽었다. 기대지 마시오. 기대지 마시오. 현우는 정면을 바라본 채 미동이 없었다.
  803호 노파는 더 이상 누구요- 라고 말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803호를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현우가 그를 따라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면서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와 수건을 빨래통에 대충 쑤셔 넣었다. 현우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는 회전의자에 앉았다. 컴퓨터는 여전히 ‘종료하시겠습니까?’ 창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현우가 그 화면을 빤히 바라보았다.
  형, 나 돈 좀 빌려주라.
  현우는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 말했다. 동생이 이곳에 찾아온 것도 놀랄 일이었지만 동생 입에서 돈 빌려달란 말이 나온 건 더더욱 놀랄 일이었다. 현우는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의젓한 아이였다. 기대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법이 없었고 남에게 부담 주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다. 몇 년 전 그가 집을 나올 때, 현우는 그가 짐을 싸는 것을 바로 옆에서 보았다. 하지만 현우는 부모님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부모님께 알리면 그가 싫어할 것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분명 분쟁이 생긴다는 것을, 그리고 다 같이 상처받는 다는 것을 현우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얼마나?
  그가 현우에게 물었다. 현우는 잠시 한숨을 쉬는 듯 숨을 골랐다.
  한 삼백.
  현우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옛날과 다름없는 눈인데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눈두덩이가 심하게 부어올라 눈을 깜빡이는 게 묘하게 느렸다.
  왜?
  현우는 더 이상 답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다. 그는 성격 좋은 동생이 체대 선배들에게 얻어터지는 상상을 했다. 아무 말도 못했겠지. 또 저 검은 눈으로 저렇게 바라만 봤겠지.

*

  모텔과 원룸텔들이 모여 있는 골목을 빠져나가면 바로 버스 정류장이었다. 그가 나타나자 정류장에 서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는 몸을 최대한 움츠렸다. 모자를 더 깊이 눌러 썼다. 시선은 땅을 보았다.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중지와 약지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꾹 눌렀다. 몇 주째 깎지 않아 손톱이 길었다. 손바닥에 난 무수한 흉터들 위로 붉고 깊은 상처가 또 생겼다. 손바닥으로 되지 않으면 손목을, 그것도 안 되면 팔뚝을 꼬집거나 할퀴었다.
  그는 언젠가 고통을 잊고 싶으면 다른 고통을 주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마음이 불편할 때마다 신체적 고통을 만들었다. 그것은 생각보다 효과적이었고, 잠깐이나마 마음이 나아지곤 했다.
  현우가 그의 오른팔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는 손을 멈추었다. 107번 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을 간 뒤 내려 익숙하게 길을 찾아갔다. 진짜 오랜만에 온다. 현우가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간 곳은 한 주공 아파트 단지였다. 그들은 편의점 맞은편에 있는 아파트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7층에 내렸다. 그리고 복도 맨 끝 집의 문 앞에 섰다. 문에는 ‘714’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익숙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현우는 그의 뒤를 따라와 문 앞에 함께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714호의 문이 열렸다. 신혼부부가 손을 잡고 나왔다. 부부는 나오자마자 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그와 통깁스를 한 현우를 보고는 숨이 넘어갈 듯 놀랐다. 아내가 재빠르게 남편의 뒤로 숨으며 비명을 질렀다. 남편은 놀란 표정을 애써 가라앉히고 그를 노려보며 당신들 뭐야? 누구야? 하고 더듬더듬 소리쳤다. 그는 순간 노파를 떠올렸다. 전혀 닮은 얼굴이 아닌데 남편의 얼굴에 노파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노파의 아들은 어디로 갔을까. 노파는 왜, 언제부터 그런 곳에 혼자 살고 있었을까. 그 하프갤런은 누가 먹은 걸까. 왜 누구 없어요, 가 아니라 누구요, 였을까. 
  당장 비키지 않으면 신고할 거야. 남편이 잔뜩 흥분한 상태로 말했다. 현우가 생각에 빠져 있는 그를 뒤로 이끌었다. 그는 현우에게 끌려 복도를 지났다. 뒤에서 놀란 아내를 달래주는 남편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714호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었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스무 살까지만 해도 이 집에서 자랐다. 이 집에는 그가 아직 작았던 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었다. 그가 이 집에 이렇게나 애착이 있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이 집에는 분명 그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겨 있기도 했지만,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고통스러웠던 날들도 모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또래 애들을 보며 그들이 덜 성숙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폭력을 행사하는 것 외에는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집안에서 당한 폭력과 스트레스를 또래 힘없는 애들에게 풀며 자기 위로를 해대는 멍청한 것들. 그것은 동정할 일이지 두려워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그들을 동정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직 작았던 그에게 있는 힘을 다한다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당시 그의 부모는 아버지의 실직으로 인해 그를 돌봐줄 심적 여유가 없었다. 부모는 어딘가 나갔다가 집에 들어오면 한숨부터 쉬었다. 선생들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상담으로 시작해 훈계로 끝나는 게 일반적이었다. 결국 그는 그 어찌할 줄 모르는 분노를 모조리 한 살 터울 동생에게 쏟아냈다. 열네 살짜리 동생은 종종 영문도 모른 채 얻어맞았다. 
  동생은 지금까지도 그 일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동생이 그런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시키다가도 결국 그들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에 자기혐오에 빠지길 반복했다. 동생은 허우적거리면서 그에게 밟혔다. 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동생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동생을 짓이겼다. 그것은 사실 그 자신을 짓이기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동생의 새카만 눈동자는 그의 분노를 부추겼다. 동생의 눈동자에는 동정이 어려 있었다. 그것은 혈육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우러나오는 동정이었다. 그는 동생이 그렇게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이라 싫었다. 
  그러다 하루는 맞기만 하던 동생이 그를 향해 식칼을 겨누었다. 동생은 세 살 때 혼자 장난을 치다 실수로 칼에 베여 선단 공포증이 있었다. 그 눈. 칼을 겨눈 동생의 맑은 그 눈. 그는 그날 이후 동생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두고두고 동생의 그 눈이 그를 따라다녔다. 그러고 나서는 집안 사정이 더 어려워져 이사를 여러 번 다녔고, 서로 바빠 동생과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 그의 부모는 실직을 만회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느라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는 갈수록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익숙해지다 못해 다른 사람을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에게 있는 힘을 다하는 것에는 이제 지쳐 있었다.

  그와 현우는 잠시 7층에서 6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앉았다. 다리가 하도 길어서 그의 발은 앉아 있는 계단의 네 칸 아래에 있었다. 그는 쇠로 된 계단 손잡이에 머리를 기댔다. 현우는 서 있었다. 아파트 바로 앞에 있는 놀이터에서 어린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숫자를 세는 소리와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가 뒤섞였다. 적절한 크기의 소음이었다. 
  몇 살로 돌아가면 지금이랑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을까?
  현우가 아이들이 뛰어 노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물었다. 그는 아주 어릴 때 현우와 함께 이 손잡이 구멍 아래로 엄마의 슬리퍼를 던지며 놀던 것을 떠올렸다. 어릴 때는 뭐든 아래로 추락시키는 것이 재미있었던 것 같다. 종이비행기라든지 꽃잎이라든지. 현우가 슬리퍼를 던지고 그가 뛰어 내려가 주워오고, 그가 슬리퍼를 던지고 현우가 뛰어 내려가고, 시합하듯 함께 뛰어 내려가고. 그게 재미있었다. 그러다 저녁 먹으러 들어오라는 엄마께 들켜 꾸중을 들었다. 꾸중을 듣고 동생과 마지막으로 슬리퍼를 찾으러 계단을 내려갔지만 어디서도 그 슬리퍼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신고 있는 슬리퍼를 내려다보았다. 슬리퍼에 비해 너무 커다란 발이 밖으로 비죽 나와 있었다. 밴드 끝부분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너덜거렸다. 머리 위에 켜져 있던 센서 등이 꺼졌다. 그는 커다란 등을 둥글게 구부리고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칼 겨눈 거 기억나?
  그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센서 등이 동시에 켜졌다.
  내가?
  현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아, 그거 꿈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구나. 현우는 의외로 태평하게 말했다. 그는 무언가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다행인가, 하고 생각했다.
  삼백까진 없어. 왜 필요한데.
  그는 휴대폰 뱅킹 어플을 켰다. 통장에는 고작 오십만 원 남짓한 돈이 남아 있었다. 
  합의금으로 달래.
  그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현우를 봤다. 합의금? 몰골로 봐서는 현우가 합의금을 받아도 모자라 보였다. 누군가를 때리는 현우의 모습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래주길 현우가 원하는 것 같았다. 
  그는 지금 오십만 원이라도 보내면 남은 몇 만원으로 앞으로 몇 주를 살아야 할지 가늠해 보았다. 버틸 수 있을까 싶었지만 괜히 현우에게 빚진 기분이 들었다. 줘야 마땅한 돈을 아직 주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면 컴퓨터가 정상이 되어 있길 바라며, 오십만 원을 우선 현우에게 이체했다. 막상 이체를 하고 나니 어딘가 후련했다. 삼백의 육분의 일. 나머지 육분의 오는 차근차근. 그는 엔딩을 아직 보지 않은 게임 몇 가지를 떠올려 보았다. 그것들의 엔딩을 보는데 걸릴 시간과 업로드 했을 때 발생할 수익과 모을 수 있는 돈까지…….

  그들은 계단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런데 이삿짐인지 웬 가구들이 가득 차 있고 사람도 몇 명 타고 있었다. 현우가 먼저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엘리베이터에 발을 올렸다. 그가 발을 올리기 무섭게 정원초과를 알리는 경보음이 울렸다. 경보음이 울리는 순간 그는 목장갑을 끼고 장롱에 손을 올리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그에게 울리는 경보음 같았다. 정신 차려. 정원 초과야.
  현우도, 그 엘리베이터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현우의 그 검은 눈. 그 눈들. 그는 뒷걸음질 쳤다. 현우는 엘리베이터 안에, 그는 그 선 밖에. 그는 뒷걸음질 치다가 도망쳤다. 현우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도망치는 그를 따라오진 않았다.

*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하늘이 흐렸다. 습기 때문에 체감 온도가 높았다. 그는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버스 세 정거장 거리를 어떻게 달려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동물병원을 지나 모텔 골목으로 들어갔다. 젊은 남녀들이 쌍쌍이 붙어 걷고 있었다. 어디선가 아득하게 사이렌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발을 바라보며 슬리퍼가 찢어질까봐 주시하고 있었다.
  팔레스텔로 들어가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지상 주차장에 웬 구급차 하나가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소란스러운가 싶더니 구급차가 다급하게 떠나갔다. 귀를 찢을 듯한 사이렌 소리도 구급차를 따라 떠났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잠시 멈추어 떠나가는 구급차를 바라보았다. 그도 구급차를 한참 눈으로 좇았다. 구급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원룸텔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금색으로 ‘팔레스텔’이라고 큼지막하게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 집에 오고 난 뒤 ‘팔레스텔’에 대하여 찾아본 적이 있었다. ‘팔레스’는 고대 로마 신화에 나오는 가축 보호의 신이자 복수의 신이었다.
  그는 8층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계단을 세 칸씩 네 칸씩 건너뛰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803호 앞에 섰다. 노파의 방문이 처음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그의 입술에서 피가 터졌다. 그는 손등으로 피를 문질러 닦은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회전의자에 주저앉았다. 게임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종료 창에 머리가 가려진 아시아물소가 보였다. 그는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그 물소가 단단한 앞발을 들어 옳은 방향을 가리켜줬으면, 하고 바랐다. 방 안 가득 쿨러 돌아가는 소리만 웅웅 울리고 있었다. 먼지가 많은 탓인가, 그는 생각했다. 방에 난 커다란 창문으로 습하고 뜨거운 공기가 흘러 들어왔다. 방 안이 열기에 부풀어 터질 것 같았다. 습한 공기가 그의 몸을 감쌌다. 게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숨이 막혔다. 그는 침착하게, 숨을 한번 고른 뒤 종료 버튼을 다시 눌렀다.
  그때 802호에서 돌연 남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간헐적으로 신음이 들려왔다. 익숙한 일이었지만 오늘따라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귀를 막고 CD를 제거해보려고 했으나 CD가 나오지 않았다. 콘솔 전원도 누르고 컴퓨터 본체 전원도 눌렀다. 하지만 모니터는 그가 어떤 짓을 해도 결코 꺼지지 않았다. ‘종료하시겠습니까?’에 머리가 가려진 캐릭터의 멍청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예’ 버튼을 수십 번, 수백 번 클릭했다. 예, 종료하겠습니다. 종료하겠습니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옷이 몸에 달라붙어 캐릭터의 근육질 몸이 드러나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신음과 쿨러 돌아가는 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여 구역질이 났다. 그는 모니터의 종료 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팔레스텔자평: 각자의 방식으로

 저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소설도 그림 그리듯 쓰길 좋아합니다. 구상할 때 머릿속에 떠올랐던 장면이나 이미지들을 소설 곳곳에 배치합니다. 소설을 쓰며 다양한 이미지들을 마음대로 배치하고 다듬는 과정이 가장 즐겁습니다. 팔레스텔도 그런 식으로 쓰게 됐습니다. 거인처럼 큰 남자와 닭장 같은 원룸텔, 디스토피아 배경의 게임, 단단한 아시아물소. 그런 것들이 떠올라 하나의 소설로 잘 묶어보았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여전히 같은 화면이었다. 그는 화면을 마구잡이로 클릭했다. 종료 창은 뜨는데 도무지 종료되지 않았다. 종료 창이 뜬 채로 게임이 계속 이어졌다. ‘종료하시겠습니까?’라는 문구가 마치 그를 놀리는 것 같았다.” 팔레스텔을 쓸 당시 살아간다는 건 원하지 않는 게임이 이어지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종료 창이 켜져 있지만 쉽게 게임을 끌 수 없고 그렇다고 계속 이대로 이어나갈 수도 없는 것.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평생 삶은 이런가? 아니면 저런가, 하는 생각을 하며 살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히려 삶을 분명하게 안다고 자부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나이가 더 들고 아는 게 지금보다 많아지면 달라질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숀텐 동화책 속의 아시아물소처럼 옳은 방향만을 제시해주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는 방 안에 먼지가 쌓여가는 걸 보며 인생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 죽어가고 있고 누군가는 태어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버려지거나, 잊히거나, 고통받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행복이나 쾌락에 젖어 있을 것입니다. 뉴스를 보거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종종 미묘한 감정이 들곤 합니다.

 어디서 누가 어떻게 죽어갔다, 누가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살고 있고 다른 누군가는 또 다르게 살고 있을 테지. 이런 식의 생각이 반복됩니다. 딱히 그래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다만 나는 이렇게,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어디선가 살아가거나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문득문득 놀라울 뿐입니다.

‘ 원룸텔은 이런 것들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공간이었습니다. 쓸 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제가 팔레스텔이란 공간에 매력을 느꼈던 것도 그래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합평을 받을 때, 어쩌면 이 소설의 주인공이 인물이 아니라 팔레스텔이라는 장소가 아닐까하고 생각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의도하고 쓴 건 아니었지만 기억에 남는 합평이었습니다. 다만 제목에서부터 너무 팔레스텔에만 집중돼 소설이 도식적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팔레스텔을 쓰면서 거대하고 슬픈 에게 정이 많이 갔습니다. 그는 남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새 이미 조금씩 마음을 주고 있는 인물입니다. 과거의 상처들로 인해 인간과의 깊은 관계를 더 이상 원하지 않지만, 관계가 끊어질 때 여전히 슬픔을 느낍니다. 그도 인간이기 때문에 좋든 싫든 간에 어쩔 수 없이 관계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 팔레스텔은 다시금 위축되고 홀로 남은 그로 끝나지만 그 이후에는 그의 삶에 팔레스텔에서보단 좋은 날들이 펼쳐졌길 바랍니다.

 

소설 부문 당선자 이주현 학생 interview: 세상을 그려낼 물감을 고르다

 “각자의 작품은 그것이 문학이든 음악이든 회화든 건축이든 또는 다른 무엇이든, 항상 그 사람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소설가 새뮤얼 버틀러의 말이다. 소설 또한 글을 통해 작가와 작가가 바라본 세상을 담아낸다. 소설을 그린다는 이주현 학생(동국대 문예창작전공)의 소설 속엔 어떠한 자신이 담겼는지 이야기 나눠봤다.

 -수상 축하드려요!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제가 해외여행을 갔다가 어제 입국했어요. 입국해서 휴대전화 유심(USIM)을 바꿔 꼈는데 당선됐다는 문자가 와있더라고요. 지금까지도 기분이 얼떨떨하고 좋아요.”

 -귀국 선물 같았겠네요. 소설 제목을 주인공이 살고 있는 건물 이름인 팔레스텔로 지은 이유가 있나요?

 “‘팔레스텔은 실제로 존재하는 원룸 건물 이름이에요. 제 친구가 그곳에 살아서 가본 적이 있어요. 그곳에서 느꼈던 감정과 분위기를 배경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런데 팔레스란 단어를 알아보니까 마침 가축 보호의 신을 의미하더라고요. 소설이 주고자 했던 느낌과 비슷하다고 생각 돼서 제목으로 결정했어요. 거주민들이 인간과는 멀게 느껴진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죠.”

 -주인공과 동생 현우는 암묵적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관계예요. 그런데 왜 주인공은 엘리베이터에서 동생과 눈을 마주치고 도망가나요?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일단 주인공의 감정이 표현되는 부분이라 말씀드리고 싶어요. 주인공은 현우가 자신을 이해하고 배려한다 생각해왔지만 그 순간만큼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느껴진 거죠. 동생과 자신 사이에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그렇게 집으로 도망친 주인공은 아직도 멈춰있는 게임을 종료하려 하지만 끝까지 종료되지 않아요.

 “애초에 이 장면을 결말로 생각하고 소설을 썼었어요. 종료 창이 켜져 있는 채 영원히 게임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장면을 결말로 쓰고 싶었죠. 이 장면이 우리가 사는 인생과 되게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살아가는 게 힘들어도 마음대로 쉽게 끝낼 수 없으니까요. 죽고 싶다고 해서 당장 간단하게 죽을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렇다고 계속 살아가는 것은 고통스럽다고 느낄 때가 있잖아요. 이러한 감정을 전하고 싶었어요.”

 -슬픈 결말이네요. 소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주제는 무엇인가요?

 “정확한 주제는 없어요. 뚜렷한 주제보단 전달하고자 하는 느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팔레스텔도 제가 전달하고 싶은 이미지에 중점을 두고 원하는 장면을 그려냈던 소설이에요.”

 -소설을 그리다니 멋있네요. 앞으론 어떤 소설을 그릴 생각이세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이미지를 소설 속에 그려내고 싶어요. 독자들에게 제가 떠올린 장면과 그 장면이 주는 분위기, 느낌을 전하고 싶죠. 제 소설 속에는 제가 보고 있는 세상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심사평: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 독특한 상황

 응모작 대부분에서 투고자들이 기울인 각고의 노력을 느낄 수 있었다. 흥미로운 발상과 독특한 상황이 돋보이는 작품이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이 인물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격 창조에 소홀했다. 상황은 있는데 사람이 잘 보이지 않았다.

 활달한 전개로 독자를 빠르게 낚아채면서 서사의 긴장감을 유지한 작품은 <>, <소년을 위하여>, <행자>, <스타벅스 용담사 점>,<팔레스텔>이었다.

 <><소년을 위하여>는 흥미로운 발상과 잘 다듬어진 문장이 돋보였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이 떨어져 아쉬웠다. 사찰과 스타벅스라는 이질적인 공간을 대비시킨 <스타벅스 용담사 점>도 잘 짜여진 작품이었지만 주제의식이 흐릿했다.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을 고민하게 만든 작품은 <행자><팔레스텔>이었다.

 남자들만 있는 회사에 한 여자가 취직하면서 벌어지는 불편한 상황에 대해 그린 <행자>는 회사 내에 여자 화장실이 없어서 스타벅스의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행자와 구경꾼들을 통해 진짜 문제는 화장실 그 이상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쉽게도 너무 쉽게 문제의 본질을 봉합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팔레스텔>은 원룸텔에 거주하는 동시대인의 삶을 그려낸 소설로 특별히 새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원경에 놓인 매일 싸우는 커플, 미친 여자, 건물주인인 아들에게 버림받은 노파, 그리고 불쑥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는 동생뿐만이 아니라, 2미터나 되는 거구에 게임 동영상을 올리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주인공 , 분노와 죄책감을 동시에 안고 산다는 점에서 이 시대의 보편적인 자아상으로 다가왔다. 여러 번의 클릭에도 종료가 되지 않는 모니터 화면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게임이라는 가상공간을 찾지만 그 가상공간마저 뜻대로 할 수 없는 암울한 상황을 예각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매끄럽게 전개되는 서사의 사이사이에서 느껴지는 작가 시선도 신뢰를 불러일으켰다.

심사위원=박형숙·윤고은·오정희·방현석(대표 집필 방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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