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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칼럼의혈창작문학상
제 26회 의혈창작문학상 소설 부문소설 부문 당선: 이정연 학생(동국대 문예창작전공 3), 「 만우절식 고백」
권희정 기자  |  kkhj41@cau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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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05  17:4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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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우절식 고백
  시작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생각한다. 시작을 보고 이러니저러니 왈가왈부하는 것은 갓 태어난 아기를 보고 그 아기의 앞날을 점치는 것과 같다. 대단하게 자랄지 혹은 보잘것없게 자랄지, 이를테면 그런 식으로. 

  사실 모든 아기는 보잘것없다. 겉모습만 봐도 그렇다. 아기의 눈은 고장 난 분수대에 고여 있는 물처럼 혼탁하고 피부는 껍질이 군데군데 벗겨진 플라타너스 가지만큼이나 누리끼리하다. 손가락은 플라타너스 잎사귀를 갉아먹는 송충이보다도 경박스럽게 꿈틀거린다. 그러나 아기가 그 모습 그대로 자라는가? 그렇지 않다. 세월이 흐르면 아기의 눈이 맑아지고 피부에 혈색이 돌고 손가락에도 힘이 생긴다. 아기였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기를 보고 앞날을 점치는 건 무의미하다. 시작을 보고 왈가왈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삶이 보잘것없이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절망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십 년 전에 태어났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해에 외조부의 사업이 망했다. 이십 년 전에 외조부는 많은 재산을 보유한 사장님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외조모는 걱정 없이 사는 사모님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엄마는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게 웃을 줄 아는 사장님의 외동딸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그들은 고작 나의 외조부이고 나의 외조모이고 나의 엄마일 뿐이다. 

  이십 년 전에 나는 갓 태어난 아기였으므로 당시의 삶을 기억하지 못한다. 반면에 외조부와 외조모와 엄마는 기억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곤 한다. 이를테면,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단독주택이 얼마나 으리으리했는지. 단독주택에 달린 정원이 얼마나 드넓었는지. 정원을 에워싼 플라타너스가 얼마나 울창했는지. 정원 한가운데 놓인 분수대에선 또 얼마나 맑은 물이 뿜어져 나왔는지. 모든 것이 얼마나, 얼마나 대단했는지. 

  나는 그런 이야기를 이십 년 동안 들었다. 

  거실에 액자가 하나 걸려 있다. 너무 낡아서 모서리가 뭉툭하게 닳은 나무 액자다. 그 액자에 대단했던 삶을 증명하는 사진이 끼워져 있다. 사진 속, 지금보다 훨씬 젊은 엄마는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민소매 원피스 차림으로 정원 분수대 옆에 쪼그려 앉아 물장난을 치고 있다. 분수대는 벌거벗은 아기 천사 형상이다. 아기 천사의 대추만 한 성기에서 물이 뿜어져 나온다. 손바닥처럼 넓적한 플라타너스 잎사귀가 물 위에 둥둥 떠다닌다. 태양이 영원히 저물지 않을 것처럼 엄마를 향해 강렬한 햇살을 내뿜는다. 엄마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웃고 있다,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게. 엄마 옆에 지금보다 훨씬 젊은 외조부와 외조모가 서 있다. 외조부는 각 잡힌 정장을 입고 있고 외조모는 메이커가 큼지막하게 그려진 핸드백을 들고 있다. 그들 뒤로 단독주택도 흐릿하게 보인다. 단독주택은 디즈니 성 못지않게 으리으리하다. 디즈니 동화 속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사진. 

  나는 그런 사진을 이십 년 동안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단했던 삶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보잘것없는 삶만 기억한다.
 
  나는 느리게 자랐다. 그러나 삶은 빠르게 몰락했다. 

  외조부는 고집 센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의 말은 절대로 듣지 않는 사람. 외조모나 엄마와 상의하지 않고 모든 일을 자신의 생각대로만 밀어붙이는 사람. 사업을 한 차례 거하게 말아먹은 뒤에도 그는 변하지 않았다. 도리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주장하면서 몇 번이고 새로운 사업을 벌였다. 그리고 매번 실패했다.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빚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자 외조부는 재산을 하나둘 팔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충청도 부근의 땅을 팔았다. 그다음엔 경기도와 서울의 땅을 팔았다. 끝내는 단독주택까지 팔았다. 그렇게 전 재산을 탈탈 털어 겨우 빚을 갚고 쥐꼬리만큼 남은 돈으로 경기도 A시에 아파트를 한 채 얻어 이사했다. 

  A시는 이십 년 전에 개발되기 시작한 신도시였다. 개발 초기, A시는 계획형 신도시라는 프리미엄에 힘입어 꽤 높은 집값을 자랑했다고 한다. 그러나 머지않아 아파트 건설회사가 자금을 횡령하고 부실공사를 벌였다는 사실이 들통났다. 당연하게도 A시의 집값은 바닥을 쳤다. 그 결과 외조부와 외조모와 엄마와 내가 이사왔을 때 A시는 부실하고 값싼 아파트만 우글대는, 보잘것없는 동네로 전락해 있었다. 

  외조부와 외조모와 엄마와 내가 살게 된 아파트도 부실한 티가 역력했다. 외벽 시멘트가 벗겨져서 외관부터가 얼룩덜룩했다. 주기적으로 덧칠을 해도 시멘트는 계속 벗겨졌다. 내부 역시 부실했다. 거실을 가운데 두고 욕실과 방 두 칸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구조라서 통풍이 잘 안 됐다. 천장과 벽에 푸르스름한 곰팡이도 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지하 주차장에서나 풍길 법한 눅눅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두 칸의 방 중 그나마 덜 좁은 방을 외조부와 외조모가 썼다. 더 좁은 방은 엄마와 내가 차지했다. 아니다. 엄마와 내가 방을 차지했다고 말하면 안 된다. 플라스틱 상자가 방을 차지했다고 말해야 한다. A시로 이사 오면서 대부분의 짐을 버리고 도무지 버릴 수 없는 짐, 이를테면 레이스 달린 민소매 원피스라던가 각 잡힌 정장이라던가 메이커가 큼지막하게 그려진 핸드백 같은 것들만 챙겨 왔는데도 마땅히 놓을 곳이 없었다. 아파트는 단독주택에 비해 터무니없이 협소했으므로.

  그렇게나 많이 버렸는데.

  버릴 만큼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외조부와 외조모와 엄마는 절망하면서 짐들을 플라스틱 상자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상자를 방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았다. 상자들 때문에 방은 더욱 비좁게 느껴졌다. 나는 어지간해선 움직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상자 위에 누워 있었다. 누운 채로 천장과 벽에 핀 곰팡이를 바라보는 게 나의 일과였다. 그러다가 시시해지면 천장 바로 아래 조그맣게 뚫려 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엔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었으므로 바깥 풍경을 볼 수 없었다. 지금이야 자유자재로 커튼을 걷을 수 있지만 당시에 나는 아직 다 자라지 않았었으므로 아무리 힘껏 손을 뻗어도 커튼에 닿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창문 이음새로 바람이 새어들었다. 그때마다 커튼이 펄럭였다, 민소매 원피스 자락이 흩날리듯 미묘하게. 나는 혹시 커튼이 걷히지 않을까, 그러면 바깥 풍경을 볼 수 있을 텐데, 기대했다. 그러나 커튼은 이내 언제 펄럭였냐는 듯 잠잠해졌다. 나는 어서 자라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서 

  커튼을 걷을 수 있도록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마침내 나는 커튼을 걷을 수 있게 되었다. 커튼을 걷자마자 플라타너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플라타너스는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 듬성듬성 솟아 있었다. 키가 꽤 컸지만 울창하지는 않았다. 껍질이 벗겨진 나뭇가지와 너덜너덜하게 구멍 난 잎사귀가 그물처럼 촘촘하게 얽혀 있었다. 게다가 잎사귀마다 송충이 수십 마리가 들끓었다. 송충이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경박스럽게 꿈틀거렸다. 새끼손가락만 한 몸뚱이가 꿈틀. 몸뚱이에 다닥다닥 박힌 촉수와 셀 수 없이 많은 다리도 덩달아 꿈틀꿈틀. 징그러웠다. 나뭇가지와 잎사귀 사이로 분수대도 보였다. 분수대는 아파트 조경용으로 만들어진 듯했는데, 고장 났는지 물이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혼탁한 물에 머리카락 같은 물이끼만 둥둥 떠다녔다. 정말이지 보잘것없는 풍경이었다. 보잘것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나는 종종 커튼을 걷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편이 곰팡이를 바라보는 것보다는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조부와 외조모와 엄마는 나와 달랐다. 그들은 절대로 커튼을 걷지 않았다. 바깥 풍경을 바라보지 않았다. 심지어 나를 돌보지도 않았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들은 하루 종일 곰팡이 피고 눅눅한 냄새가 풍기는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낡은 액자만, 대단했던 삶을 증명하는 사진만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우리가 얼마나 대단했는데,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면서. 

  나는 외조부와 외조모와 엄마를 이해한다.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디즈니 성처럼 으리으리했던 단독주택을 기억하는데 어떻게 부실한 아파트를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울창했던 플라타너스와 맑은 물이 뿜어져 나오던 분수대를 기억하는데 어떻게 송충이나 들끓는 플라타너스와 고장 난 분수대를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대단했던 삶을 기억하는데 어떻게 보잘것없는 삶을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나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니 무엇이든 받아들 수 있었다지만 모든 것을 기억하는 그들은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엔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엔 두려웠다. 외조부와 외조모와 엄마가 사진 속으로 훌쩍 떠나버릴 것 같아서.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당시엔 진심으로 두려웠다. 사진만 뚫어지라 바라보는 외조부와 외조모와 엄마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저들의 혼은 이미 사진 속으로 떠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 곁에 남아 있는 건 저들의 껍데기에 불과한 게 아닐까. 

  실제로 떠난 사람이 있었다.

  나의 아빠.

  믿기 어렵지만 내게도 아빠가 있었다. 나는 아빠가 언제 떠났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A시로 이사 오기 전에 떠났던 것 같기도 하고 이사 온 후에 떠났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아빠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나와 닮았던 것 같기도 하고 닮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낡은 액자 속 사진에도 아빠는 없다. 도대체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물었을 때, 외조부와 외조모와 엄마는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네 아빠는 사람이 아니었어. 

  짐승이었지. 

  네 아빠는 엄마를 사랑했던 게 아냐. 네 아빠가 노린 건 우리의 돈이었어. 아무리 우리가 돈을 잃었어도 그렇지, 제 새끼를 두고 떠나다니. 그게 사람이 할 짓이냐? 네 아빠는 돈에 눈이 먼 짐승이었던 거야.

  나는 반박하고 싶었다. 아빠를 짐승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짐승은 제 새끼를 두고 떠나지 않으니까. 내가 배운 바에 의하면, 열대우림에 사는 코끼리는 새끼 코끼리와 속도를 맞춰서 느릿느릿 걷는다. 남극에 사는 황제펭귄은 밥을 굶어가면서까지 새끼 펭귄을 돌본다. 사막에 사는 미어캣은 꾸벅꾸벅 조는 새끼 미어캣을 대신해서 묵묵히 망을 본다. 만약 정말 돈 때문에 나를 떠난 것이라면, 아빠는 짐승이 아니라 짐승보다 못한 존재라고 불려야 했다. 그러나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내가 반박하면 외조부와 외조모와 엄마는 정말로 떠날지도 몰랐다. 나 혼자 남는 것보단 그들의 껍데기라도 붙잡고 있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말에 반박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그들의 돌봄을 갈구하지도 않았다. 혼자 일어났고 혼자 씻었다. 혼자 머리를 묶었고 혼자 옷을 입었다. 혼자 밥을 먹었고 혼자 잠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두려웠다. 나는 어서 자라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서 어서 

  아무것도 두렵지 않도록
 
  짐승은 제 새끼를 두고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A초등학교에서 배웠다. A초등학교는 동네에 하나뿐인 초등학교였다. A시에 사는 아이들은 모두 A초등학교에 다녔다. 나도 매일 아침, 송충이 떨어지는 플라타너스와 물비린내 풍기는 분수대를 지나 A초등학교로 향했다. 한쪽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다른 쪽 손으로는 코를 막은 채로. 언제나 뛰어서 등교했으므로 교실에 들어서면 숨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교실엔 분필 가루 날리는 칠판이 있었다. 싸구려 목재로 만들어진 교탁과 책꽂이가 있었다. 새까만 아날로그 텔레비전이 있었다. 유리 덮개 깔린 책상이 있었다. 이마가 M자로 벗겨진 사십 대 남자 선생도 있었다. 선생은 바지 앞주머니에 가느다란 드럼채를 넣고 다녔다. 그리고 수업 시간마다 그 드럼채를 꺼내 허공에 휘두르며 국어, 수학, 사회, 과학 따위를 가르쳤다. 교탁을 짚고 서서 드럼채를 휘두를 때면 선생의 팔뚝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 모습은 꽤나 위압적이어서 같은 반 아이들과 나는 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다. 그러는 척했을 뿐이다. 귀 기울이는 척하면서 주변을 둘러 보면, 혼탁한 눈을 비비거나 누리끼리한 피부를 벅벅 긁은 뒤 손톱에 낀 살비듬을 오독오독 씹어 먹거나 손가락에 난 손가시를 물어뜯는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곤 했다. 나는 그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이나 특징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모두 비슷하게 생긴 데다가 비슷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모두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이 교실 밖으로 나가면 아이들은 앞다투어 떠들기 시작했다. 

  집값이 더 떨어졌대. 엄마가 그랬어. 

  한 아이가 입을 열었다. 

  어제 송충이가 내 방에 들어와서 발로 밟았어. 송충이가 터지면서 투명한 액체가 나왔는데, 그건 피일까? 그런데 피가 투명할 수도 있나?

  다른 아이도 중얼거렸다. 

  있잖아, 내 방에 핀 곰팡이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아.

  또 다른 아이가 말했다. 

  아이들은 서로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말만 늘어놓았다. 나도 그랬다. 나는 주로 대단했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예전에 나의 외조부는 사장님이었고 나의 외조모는 사모님이었고 나의 엄마는 사장님의 외동딸이었다고. 우리는 디즈니 성처럼 으리으리한 단독주택에 살았었다고. 그 단독주택엔 드넓은 정원이 달려 있었다고. 정원을 에워싼 플라타너스는 울창했다고. 정원 한가운데 놓인 분수대에서는 맑은 물이 뿜어져 나왔다고. 외조부와 외조모와 엄마에게서 들은 이야기만 그대로 반복했다. 

  정말이야. 

  아이들이 믿지 않을까 봐 증거까지 대 가면서.

  우리 집 거실엔 정원에서 찍은 사진도 걸려 있어.

  가끔 책상 유리 덮개에 나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쳤다. 나의 모습도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의 눈도 혼탁했고 나의 피부도 누리끼리했으며 나의 손가락도 힘없이 꿈틀거렸다. 한마디로 나도 보잘것없었다. 그런데 예전엔 대단했다고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선생의 말을 생각했다. 

  아마도 과학 수업 시간이었다. 선생은 언제나처럼 드럼채를 휘두르며 짐승의 수명에 대해 가르쳤다. 코끼리는 칠십 살까지 살고 황제펭귄은 열두 살까지 살고 미어캣은 다섯 살까지 산다고. 반면에 인간은 무려 백 살까지 살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그런데 너희는 몇 살이지?

  열 살이오.

  그래, 열 살이지. 너희는 앞으로 살날이 구십 년이나 남은 거야. 무려 구십 년이나. 너희 삶은 방금 시작된 거나 다름없어. 시작은 중요하지 않아. 

  그 말을 생각하면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비록 내가 보잘것없다 하더라도 절망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나의 삶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시작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선생님도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래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으면 교실 구석에 위치한 책꽂이로 다가갔다. 책꽂이엔 <백설공주>,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인어공주> 같은 디즈니 동화책과 <21세기 어린이를 위한 위인전 시리즈 - 나도 이렇게 되고 싶어요> 전집이 꽂혀 있었다. 디즈니 동화책을 읽는 건 참 재미있는 일이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으리으리한 성, 공주가 입은 반짝이는 드레스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동화책을 덮는 순간 기분이 찝찝해졌다. 맛있는 음식을 먹은 뒤 기름이 덕지덕지 묻은 접시를 닦을 때처럼. 놀이터에서 모래성을 쌓다가 손톱에 낀 모래알을 빼낼 때처럼. 그래서 나는 디즈니 동화책보다 위인전을 더 즐겨 읽었다. 그때 읽었던 위인전의 내용 일부를 나는 지금까지도 기억한다. 

  이를테면, 루이 브라유의 삶을 기억한다. 그는 다섯 살 때 송곳에 눈이 찔리는 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로 인해 시각장애인이 된 그는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글도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글자인 점자를 발명했다. 그 결과 루이 브라유는 시각장애인의 영웅이 되었다. 

  윈스턴 처칠의 삶도 기억한다. 그는 엄한 아버지 아래서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다. 학교에선 따돌림을 당했고 성적도 형편없었다. 어려서부터 극심한 우울증을 겪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자살이 실패로 돌아간 후 그는 항우울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우울증을 관리하면서 공부를 병행하여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2차 세계대전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그 결과 윈스턴 처칠은 영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이 되었다.

  스티브 잡스의 삶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양부모에게 입양되었지만 정체성 고민을 하느라 학창시절 내내 방황했다. 학교도 자퇴했다. 자퇴 후 그는 창업 시장에 뛰어들어 애플이라는 컴퓨터 회사를 창립했다. 애플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 결과 스티브 잡스는 억만장자가 되었다. 

  위인전 역시 시작은 중요하지 않다고 증명하고 있는 듯했다. 루이 브라유와 윈스턴 처칠과 스티브 잡스도 어렸을 땐 보잘것없었지만 자라서는 대단한 업적을 이루지 않았는가? 

  게다가 위인전을 읽으면 선생에게 칭찬도 받았다. 선생이 드럼채를 바지 앞주머니에 꽂으면서 말했다.
  너는 위인전을 열심히 읽으니까 이다음에 자라서 대단한 사람이 되겠구나.

  위인들처럼 대단해지겠구나. 

  그러면 얼마나, 얼마나 좋을까. 나는 생각했다. 그러면 나의 삶을 다룬 위인전이 출간될 것이다. 위인전을 읽은 사람들은 나를, 보잘것없는 동네에서 보잘것없는 아이들과 섞여 보잘것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끝내 대단하게 자란 인간 승리의 표본으로 기억할 것이다. 어쩌면 나는 돈을 많이 벌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면 나는 외조부가 판 재산을 도로 사들일 것이다. 땅을 사들이고 단독주택을 사들이고 주택에 달린 정원을 액자 속 사진과 똑같이 꾸밀 것이다. 울창한 플라타너스를 심고 맑은 물이 뿜어져 나오도록 분수대를 고치고 햇살도 잘 들어오게끔 꾸밀 것이다. 버리고 온 짐들도 되찾을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되돌아갈 것이다. 외조부는 다시 많은 재산을 보유하게 될 것이다. 외조모는 다시 걱정을 안 하게 될 것이다. 엄마는 다시 사랑스럽게 웃게 될 것이다. 떠난 아빠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대단하게 살게 될 것이다, 보잘것없는 삶은 까맣게 잊고서. 상상만으로도 벅찼다. 눈물 날 정도로 벅찼다. 나는 어서 자라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서 어서 어서 

  대단해질 수 있도록
 
  언젠가부터 습관이 생겼다. 하교하자마자 샤워하는 것이었다. 집에 도착하면 나는 책가방을 내려놓고 욕실로 돌진했다. 욕실 문을 걸어 잠근 뒤, 양말부터 팬티까지 모조리 벗고 샤워기 아래 섰다. 샤워기 온수 레버를 힘껏 잡아당겼다.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나는 샤워를 일종의 소독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더러운 것, 이를테면 곰팡이 포자나 내 머리 위로 떨어졌을지도 모르는 송충이나 교실에 떠다니던 먼지 같은 것들이 씻겨 내려가도록 오랫동안 뜨거운 물을 맞고 서 있었다. 너무 뜨거워서 살이 익을 것 같은 지경이 돼서야 샤워기 레버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았다. 세면대 거울 앞에 섰다. 수증기가 욕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거울에도 수증기가 뿌옇게 서려 있었다. 손바닥으로 거울을 쓱 닦았다. 닦인 부분에 나의 모습이 비쳤다. 

  나는 나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얼마큼 자랐는지.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키가 조금 크고 살도 조금 찐 듯했지만 확실한 건 아니었다. 가슴은 여전히 평평했다. 사타구니에 거뭇한 털이 몇 가닥 돋아난 것도 같았는데 다시 보니 그냥 솜털이었다. 눈동자는 여전히 혼탁했으며 피부도 누리끼리했다. 도대체 나의 눈은 언제쯤 맑아지고 나의 피부엔 언제쯤 혈색이 도는가. 도대체 나는 언제쯤 자라서 이 보잘것없는 모습을 탈피하는가. 
 
  절망하는 사이 거울에 다시 김이 서렸다. 

  욕실에서 나가면 언제나처럼 눅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천장과 벽은 점점 더 많은 곰팡이로 뒤덮였다. 플라스틱 상자 위에 먼지가 수북이 쌓였으며 창문에 달린 커튼은 꼬질꼬질해졌다. 커튼을 살짝 걷으면 더욱 얼룩덜룩해진 아파트와 더욱 누리끼리해진 플라타너스와 더욱 혼탁해진 분수대, 그리고 엄지손가락 크기로 자란 송충이가 보였다. 

  커튼 쳐. 

  외조부와 외조모와 엄마가 말했다. 그들은 살이 매우 많이 빠져 있었다. 민소매 원피스와 각 잡힌 정장, 예전에 입었던 옷들이 더이상 맞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다. 살이 빠졌다기보다는 몸의 수분이 모두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들의 피부는 점점 더 누리끼리해졌고 쭈글쭈글해졌다. 그렇게 그들은 껍데기, 라는 표현과 딱 들어맞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나의 변화는 도무지 눈에 띄지 않는데 그들의 변화는 확연히 눈에 띄었다. 그들은 살짝만 건드려도 송충이가 벗어놓은 껍데기처럼 바스러질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다. 나는 어서 자라고 싶다고 생각했다. 

  몰락하는 삶을 되돌릴 수 있도록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이제 시간이 없어 어서 원래대로 되돌려놓지 않으면 안 돼

  어서 자라야 해 어서 대단해져야 해 어서
 
                                *
 
  또다시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 나는 스무 살이다. 나는 곧 A고등학교를 졸업한다. 마침내 교실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A고등학교의 교실은 A초등학교의 교실과 비슷하다. 교실엔 칠판이 있다. 교탁과 책꽂이와 아날로그 텔레비전이 있고 책상이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있다. A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십 년 넘게 알고 지내 온 아이들이다. 나와 아이들은 모두 A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A중학교에 진학했고 A중학교를 졸업한 뒤 A고등학교에 진학했다. A시에 사는 아이들에겐 그게 당연한 과정이었다. 그런데 A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나와 아이들은 어디로 가는가? 대학엘 가야 하나? 그러나 수능은 이미 몇 달 전에 끝났고 나와 아이들의 점수는 바닥이다. 분명 그 점수로는 좋은 대학에 못 갈 것이다. 좋은 대학이 아니라면 가지 않는 편이 낫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가?
  교실에는 선생도 있다. 언제나 칙칙한 쥐색 코트만 입고 다니는 오십 대 여자 선생이다. 수능이 끝난 뒤로 선생은 수업 시간이 되어도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교실 불을 끄고, 아날로그 텔레비전에 영화만 띄워 놓는다. 나와 아이들은 영화엔 관심 없다. 나와 아이들은 그저 어두컴컴한 교실, 수평이 맞지 않는 책상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이야기한다. 짧게 줄인 교복 치마 사이로 아이들의 팬티가 얼핏 보인다. 

  왜 A대학교는 없냐.

  한 아이가 입을 연다. 

  한 동네에 A초등학교, A중학교, A고등학교 다 있으면서 왜 A대학교만 없냐고. 뭘 어쩌라는 거야 씨발. 

  다른 아이가 중얼거린다.

  맞아 씨발. A대학교가 있다면 거길 갔을 텐데. 

  또 다른 아이가 말한다. 

  씨발씨발씨발. 돌림노래처럼 울려 퍼진다. 선생이 팔짱을 낀 채 우리를 흘겨본다. 선생의 코트 주머니엔 두꺼운 나무몽둥이가 꽂혀 있다. 지난 몇 년간 선생은 몇 번이고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때마다 나와 아이들의 엉덩이엔 몽고반점처럼 푸르뎅뎅한 멍이 들었다. 그래도 나와 아이들은 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선생의 말에 귀 기울이지도 않는다. 맞을 때의 고통은 잠깐이니까. 아프다가도 금세 괜찮아지니까.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괜찮아지니까. 

  지금 나와 아이들은 스무 살이다. 나와 아이들의 눈은 더이상 혼탁하지 않다. 서클렌즈와 짙은 아이라인 덕분에 맑고 또렷하게 빛난다. 나와 아이들의 피부는 더이상 누리끼리하지 않다. 메이크업 파우더를 여러 번 두드려서인지 혈색이 좋아 보인다. 나와 아이들의 손가락엔 화려한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다. 그리고 담배 냄새가 배어 있다. 나와 아이들은 스무 살이 되자마자 A고등학교 앞 편의점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라이터를 켜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길거리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웠다. 뿌연 담배 연기를 들이마실 때면 왠지 다 자랐다는 생각이 든다. 다 자랐다. 나와 아이들은 다 자랐다. 다 자랐으므로 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 자랐다는 걸 두려워한다. 이를테면, 다 자랐는데도 바뀐 게 거의 없다는 것. 바뀐 것이라고는 겉모습밖에 없다는 것. 여전히 A시의 부실한 아파트에 산다는 것. 여전히 아빠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여전히 외조부와 외조모와 엄마가 낡은 액자 속 사진만 바라본다는 것. 그들이 완전한 껍데기가 되었다는 것. 

  하루에도 몇 번씩 액자를 던지고 싶다는 것. 그만해. 제발 그만 해요. 사진을 바라보는 짓은 그만해. 이십 년이나 지났어. 그 시절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해. 왜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삶을 그리워해야 해. 당신들도 나도 평생 대단해질 수 없는데. 외조부와 외조모와 엄마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다는 것. 천장과 벽의 곰팡이를 칼로 도려내고 두꺼운 커튼을 갈기갈기 찢고. 욕실 거울과 창문을 깨부수고 방에 즐비한 상자는 깔아뭉개고 싶다는 것. 송충이를 발로 밟아 터뜨리고 분수대의 고인 물에 머리를 처박고 싶다는 것. 그러나 차마 그럴 수 없다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몸을 덜덜 떨면서 두려워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 나는 다 자랐는데도 여전히 보잘것없다는 것.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이 나를 변호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보잘것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도 대단한 업적을 이루니까. 루이 브라유, 윈스턴 처칠, 스티브 잡스처럼. 하지만 나는 안다. 보잘것없는 아기가 대단하게 자라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그런 일이 거의 없으니까, 희귀하니까 위인전도 출간되는 것이다. 만약 누구나 대단해질 수 있다면 왜 루이 브라유와 윈스턴 처칠과 스티브 잡스가 위인이겠는가? 보잘것없는 아기는 대부분 보잘것없이 자란다. 보잘것없이 시작된 삶은 대부분 보잘것없이 끝난다.
 
  문득 아날로그 텔레비전을 본다. 영화의 제목은 <해피 투게더>. 홍콩 배우 장국영과 양조위가 연인 사이로 나온다. 영화는 거의 끝나가고 있다. 처음부터 집중해서 봤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다지 아쉽지는 않다. 어차피 모든 사랑은 다 비슷하니까. 비슷하게 만나서 비슷하게 사랑하고 비슷하게 이별하니까. 영화 속 장국영과 양조위의 사랑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장국영과 양조위가 이별하는 장면을 본다. 역시나 뻔한 이별이다. 이별한 뒤, 장국영은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나고 양조위는 도살장에 취직한다. 도살장 바닥에 낭자한 소 피를 닦으면서 그는 말한다. 

  그와의 사랑은 대단히 위력적이다. 그러나 반복하고 싶지 않다.

  양조위가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랑은 영화로 만들어졌다.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진다.

  나는 장국영을 생각한다.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사람.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죽은 사람. 너무 피곤해서 세상을 사랑할 여력이 없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초호화 호텔 옥상에서 투신한 사람. 죽은 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이들에 의해 기억되는 사람. 나는 그의 죽음을 생각한다. 어쩌면 그는 보잘것없어지는 게 두려웠던 게 아닐까. 영원히 대단하게 기억되고 싶어서 대단한 상태로 죽었던 게 아닐까. 

  그래. 시작은 중요하지 않다. 시작보다 중요한 건 끝이다. 죽음이다. 대단하게 살다가 일찍 죽는 삶이 보잘것없이 오래 사는 삶보다 훨씬 낫다. 계속 이렇게 보잘것없이 사느니 차라리 지금 죽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아마도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이렇게 죽지 않고 계속 살다가 늙으면, 당장 내일 죽어도 아쉽지 않을 지경까지 늙어버리면 나는 죽지 않고 잘 살았다, 살아남았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것이 과연 삶일까.
 
 

  「만우절식 고백」 자평: 살아있다는 거짓말
  ‘마음이 피곤하여 세상을 사랑할 여력이 없다.’

  홍콩 배우 장국영의 유서에 적혀 있던 말이다. 그는 2003년 만우절에 초호화 호텔에서 투신자살했다. 마치 거짓말처럼. 해마다 만우절이 되면 영화 채널에서 그가 등장하는 영화를 틀어 준다. 비극적인 동성애를 다룬 <해피 투게더>, 경극 배우의 삶을 그린 <패왕별희>는 물론 <아비장전>, <천녀유혼>까지……. 한 편 한 편 보고 있노라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장국영 스스로가 살기 싫어 끝낸 삶을 내가 억지로 반복하고 되새기는 것만 같아서. 그리고 동시에 영원히 기억되는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열심히 노력해야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충고한다. 루이 브라유, 윈스턴 처칠, 스티브 잡스처럼 성공한 위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이들에게 가르치기도 한다. 반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은 어떻게 죽는지. 죽는 순간 많이 고통스러운지. 그리고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예컨대 천국이나 지옥 같은 사후세계가 존재하는지 아니면 죽는 순간 완전한 무(無)로 돌아가는 것인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항상 죽음이 궁금했다.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됐다.

  소설의 제목은 <만우절식 고백>이다. 만우절에 하는 고백이란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소설 속 화자의 삶은 거짓말 같다.

  ‘나는 느리게 자랐다. 하지만 삶은 빠르게 몰락했다.’

  이것은 화자의 삶을 정리하는 문장이다. 화자가 태어나자마자 외가의 사업이 망한다. 부자였던 외가는 순식간에 빈털터리로 전락하고 디즈니 성처럼 으리으리한 단독주택에서 부실하고 값싼 아파트만 즐비한 A시의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된다. A시에는 울창한 플라타너스도 투명한 물이 뿜어져 나오는 분수대도 없다. 그 충격으로 인해 화자를 제외한 가족구성원이 모두 정신을 놓아버린다.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도 이상한 말만 해댄다. 교사도 별 도움을 주지 않는다. 화자는 성장하면 삶이 달라질 것이라 기대하지만, 다 자란 뒤에도 달라진 건 별반 없다. 겉모습만 달라졌을 뿐이다. 심지어 증오하던 A시를 떠나지도 못한다. ‘어떻게 이렇게 불행하지?’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분명 그런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거짓말 같은 삶을 죽지 못해 꾸역꾸역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아마도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이렇게 죽지 않고 계속 살다가 죽으면, 당장 내일 죽어도 아쉽지 않을 지경까지 늙어버리면 나는 죽지 않고 잘 살았다, 살아남았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것이 과연 삶일까.’

  이것은 소설의 마지막 문단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소설 전체를 통틀어 내 생각이 가장 많이 드러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만 죽지 않은 채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는 삶을 삶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죽지 못해 사는 삶이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삶이 아닌 삶이라고 할 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되길 간절하게 바란다.
 
 
   
 
  소설 부문 당선자 이정연 학생 interview: 허구로 풀어낸 거짓말 같은 현실
  소설은 허구이기에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은 허구이기에 더욱 매섭게 현실을 담아내기도 한다. 이정연 학생(동국대 문예창작전공)과 그의 소설에 담긴 거짓말 같은 현실에 대해 얘기를 나눠봤다.

  -‘만우절식 고백’이란 제목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배우 장국영은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죽었지만 그 죽음은 사실이었어요. 소설 속 ‘나’의 삶도 마찬가지죠. 거짓말 같을 정도로 암울하지만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잖아요. 그들의 이야기를 고백하듯 풀어써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소설도 일부러 사건이 아닌 ‘나’의 독백으로 흘러가게 했죠.”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은 ‘나’와의 관계로만 호칭 되는데요. 이름을 쓰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소설 자체가 ‘나’의 고백인 만큼 ‘나’가 가장 중요하고 다른 사람들은 관계로만 존재할 뿐이죠.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가 보단 ‘나’와 어떤 관계인가가 중요해요. 특정한 이름보다 관계로 써야 독자들이 ‘나’에게 더 집중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나’는 계속해서 성장을 갈망하는데요. 여기서 성장은 무슨 의미인가요?
  “‘나’에게 성장이란 일종의 도피처예요. 지금보다 자라면 삶도 나아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는 거죠. 그 기대 때문에 현재에서의 도피로 성장을 갈망하는 거예요.”

  -하지만 ‘나’의 삶은 성장 후에도 별반 달라진 게 없었어요.
  “일반적인 성장소설에서 성장은 곧 발전을 의미하지만 저는 그 틀을 좋아하지 않아서요. 어릴 땐 어른이 되면 멋있어지고 모든 것이 달라질 거라 생각하지만 막상 커보면 그게 아니잖아요. 어른이 된다는 게 상상만큼 대단하진 않죠. 그래서 성장하고서도 별 변화가 없는 모습을 그려보고자 했어요.”

  -‘나’의 인생이 힘든 이유가 겪어보지도 못한 과거 때문이란 점이 참 신선했어요.
  “사람이 무언가를 그리워한다고 했을 때 그 대상이 정확하기보단 추상적인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해요. 그런 추상적인 이미지를 써보고 싶어서 겪어보지도 못한 과거를 그리워하도록 설정했죠. 추상적인 것을 그리워하고 그것 때문에 삶이 망가져 가는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려보고 싶었어요.”

  -마지막으로 당선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사실 당선될 줄 몰랐는데 돼서 매우 좋네요. 부모님과 글 쓸 때 조언해준 친구들에게 감사해요. 앞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어요.”
 
 
   
 
  심사평: 삶의 다른 측면을 포착한 시선의 새로움
  대학생다운 패기만만한 작품들이 많았다. 고정관념과 기성 문학의 문법에 얽매이지 않는 활달한 상상력이 넘치는 소설, 장르 소설도 여러 편이었다. 우리의 삶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작품에 다채롭게 반영하고 있는 점도 고무적이었다. 합리적 유추와 개연성을 간단하게 무력화시키는 비현실성이 현실을 압도하는 시대에 맞서는 문학적 상상력의 단초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큰 보람이었다.

  그래서 장르와 경향에 대한 특혜나 폄훼를 배제하고 서사적 상상력과 문장의 힘을 중심으로 읽으려고 노력했다. 문학은 언제나 내용이 형식에 선행했다. 형식이 시대의 정신을 담보하지 못할 때 새로운 장르가 출현했다.

  본심에서 남은 마지막 두 편은 「침묵의 소리」와 「만우절식 고백」이었다. 
 
  「침묵의 소리」와 「만우절식 고백」은 인간을 대하는 독창적 태도와 어휘 사용능력이 아주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침묵의 소리」는 대학의 지속적인 존재 이유가 의심받고 있는 현실을 경쾌한 상상력으로 가로지르는 21세기형 ‘대학소설’이다. ‘침묵교육과’를 통해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는 은유의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문장의 오류들이 최종선택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만우절식 고백」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파생된 자신의 존재를 능란한 문장으로 묘파한 작품이다. 훈련만으로 만들어지기 어려운 문장의 역동성은 지금 성취한 것보다 더 많은 성취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삶의 또 다른 측면을 포착하는 시선의 새로움과 예리함은 「만우절식 고백」이 보여주는 더욱 중요한 미덕이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아울러 다른 미덕과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다음으로 기회를 미루게 된 응모자 모두에게도 격려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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