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언어가 사라질 때, 음악은 활자 없는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음악과 이야기 사이 경계는 없습니다. 누군가가 살아온 생의 굴곡이 오선지에 오르내리기도 하고, 때론 흐르는 선율이 마치 한 편의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그렇기에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곧 누군가가 살아온 지난날의 궤적이, 혹은 음표가 모여 만들어낸 또 하나의 세상이 여러분에게 다가가는 과정이 아닐까요. 이번 주 문화부는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과 요하네스 브람스의 생이 빚어낸 음악과 이들의 음악이 완성한 숭고한 사랑 이야기를 여러분과 잇고자 합니다.  음악과 이야기를 잇는, 문화부의 ‘이음새’는 낭만주의 시대 한복판에서 사랑과 고독을 외친 슈만·브람스의 음악 세계로 당신을 안내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끝까지 따라와 주세요. 김지우 기자 eraser@cauon.net

사랑이라는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감정을 활자 없이 형용할 수 있을까.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의 선율을 듣는다면, 이 정답 없는 물음 앞에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테다.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슈만의 음악은 인간이라면 겪을 수밖에 없는 감정의 굴곡을 유려하게 풀어낸다. 현재까지도 변함없이 저만의 미학으로 생을 노래하는 음악가 슈만의 길을 거닐어봤다.   

  사랑의 달콤함은 선율에 녹아 흐르고 

  낭만주의의 흐름이 음악사에 서서히 스며들던 1810년, 슈만의 생애는 독일 작센의 자그마한 마을에서 시작됐다. 어린 나이부터 피아노 연주와 작곡에 재능을 보인 슈만의 꿈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확고했으며 동시에 절실했다. 성년에 접어들 무렵 어머니의 희망대로 슈만은 라이프치히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결코 음악을 떨쳐낼 수 없었다. 끝내 그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 프리드리히 비크의 제자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을 키워나가던 슈만은 예기치 못한 불행을 맞이하게 된다. 무리한 연습으로 인한 손가락 부상으로 더 이상 건반을 연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진출처 Britannica
사진출처 Britannica

 

  어두운 미래를 헤매야 했던 슈만에게 그의 연인 ‘클라라 조제핀 비크’는 유일한 삶의 위로이자 이유였다. 사랑의 힘은 슈만에게 끝없이 넘쳐흐르는 음악적 영감을 선물했다. 1838년 발표된 <어린이 정경>은 슈만만이 표현할 수 있는 꿈과 낭만의 이야기를 선율에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오늘의 감정, 클래식』의 저자 김기홍 작가는 어린이의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슈만 자신과 같은 어른에게도 위로를 전하고자 했던 슈만의 작품 의도에 주목했다. “클라라가 무심코 내뱉은 ‘당신은 때로 어린아이 같아요’라는 말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어린이 정경>은 어린이들을 위한 작품이 아닙니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추억하며 현재를 살아 나가는 어른들에게 바치는 위로의 곡이죠. 특히 7번 곡 <트로이메라이(꿈)>는 4도 도약 음을 듣는 순간 슈만이 그리는 꿈의 세계로 이끌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요. 긴장감을 유지하는 상승 조와 이완을 주는 하강 조의 4마디 선율이 반복됨과 동시에 미묘한 화성의 변화가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런 슈만을 향한 비크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클라라는 슈만의 스승 비크의 딸로 당대 최고의 피아노 신동이라 불릴 만큼 미래가 유망한 인재였기에 비크는 슈만을 사위로 들이기를 극구 반대했다. 두 사람은 결국 결혼 허가를 요구하는 법정 소송까지 진행한 끝에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있었다.  

클라라 조제핀 비크와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은 어려움 끝에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사진 출처 Britannica
클라라 조제핀 비크와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은 어려움 끝에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사진 출처 Britannica

  굴곡 끝에 이뤄낸 사랑이었기에 그해 슈만이 빚어낸 선율에는 마르지 않는 사랑과 그 위를 걷는 낭만으로 가득했다. 결혼식 전날 슈만이 클라라에게 헌정한 가곡 <미르테의 꽃>을 시작으로 무려 250여 편의 가곡을 남겼다. 그중 하이네의 시에 곡을 입힌 <시인의 사랑>은 슈만의 가곡 중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으로 클라라를 향한 사랑의 예술적 결실에 비견된다. 김주영 피아니스트는 슈만이 가곡을 통해 사랑의 미학을 노래한 방식을 전했다. “<시인의 사랑>에 수록된 소곡들은 모두 분위기가 다르지만 끊어지지 않고 이어집니다. 이러한 구조는 연속적인 사랑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죠. 가장 잘 알려진 1번 소곡 <아름다운 5월에>에서 들리는 불협화음은 사랑을 시작한 시인의 설렘과 불안이 이상하리만큼 경이롭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울의 수렁에서 외친 삶의 쓰라림  

  슈만의 생에 피어난 봄날의 전희는 그리 길지 못했다. 클라라와 결혼한 지 4년째 되던 해부터 슈만 집안의 내력이었던 양극성 정동 장애는 점점 심해졌다. 박소현 바이올리니스트는 슈만의 심각해진 조울증 증세를 그의 삶과 연관 지어 바라봤다. “당시 슈만은 작곡가와 평론가로 큰 명성을 얻긴 했으나 사랑하는 아내의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거듭난 클라라를 지켜보면서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해 생겨난 열등감이 그녀를 향한 사랑만큼이나 커졌을 것으로 추측되죠. 심지어 자신이 제자로 들였던 젊고 촉망받는 청년 요하네스 브람스가 자기 아내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느낀 슈만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울감은 점차 슈만의 내면을 파고들었죠. ” 

  불안한 내면은 슈만에게 있어 창작을 위한 힘이면서 그를 파괴하는 두 얼굴이었다. 김주영 피아니스트는 슈만의 정신 착란이 오선지에 그대로 투영된 사례를 언급했다. “슈만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2번>은 굉장한 대곡인데요. 슈만은 두 쪽가량의 악보에 당김음을 고집스럽게 이어가며 연주하기 매우 어려운 악장을 만들었죠. 이러한 음악적 특징은 슈만의 혼란스러운 정서를 잘 보여줍니다.” 

  슈만은 자신을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라는 두 개의 자아로 명명하며 그 사이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정의 내리려 했다. 김기홍 작가는 두 개의 자아 사이 슈만이 겪은 고뇌가 음악적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슈만은 적극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자아와 내성적이고 부드러운 자아를 각각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로 표현했습니다. 실제 슈만은 음악 평론을 작성할 때면 두 자아가 토론을 펼치는 형식으로 글을 작성하기도 했는데요. 그의 작품 <환상 소곡집>에서는 슈만의 이중적 자아가 음악적으로 표방된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총 8곡에 걸쳐 힘차거나 부드러운 두 자아의 면모가 번갈아 가며 등장하죠.”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내면을 보듬다 

  생의 끝에서 슈만이 쏟아낸 절절한 선율은 1854년 <유령 변주곡>을 끝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스토리 클래식』의 저자 오수현 작가는 당시 슈만의 내면을 이해한다면 <유령 변주곡>에 조성된 정서를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전했다. “<유령 변주곡>은 슈만이 라인강에 몸을 던지기 열흘 전에 쓰이기 시작한 작품입니다. 슈만이 자신의 무너져가는 내면을 다잡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써 내려간 작품이라 볼 수 있죠. 시종 지속되는 처연하고 쓸쓸한 선율의 분위기와 슈만의 불안정한 내면을 투영하는 듯한 허술한 악장 구조는 세상의 끝에 홀로 서 있는 듯한 깊은 고독감을 불러오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을 ‘음악으로 쓴 유서’라고도 말할 수 있죠.” 활자 없는 유언의 마지막을 악보에 그린 다음 날, 슈만은 라인강에 투신했다. 가까스로 구조된 슈만은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가 2년간의 투병 후 세상을 떠났다. 

  슈만의 생은 46년에 불과했으나 그가 음악사에 남기고 간 잔흔은 후대의 낭만주의 시대 음악이 나아갈 판도를 개척할 만큼 진했다. 김기홍 작가는 슈만의 가곡이 후대 음악 발전에 있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전했다. “슈만은 문학와 음악을 하나로 융합하고 자유로운 형식 아래 불협화음과 같은 음악적 장치로서 감정을 풍부하게 녹여냈습니다. 이는 곧 예술가곡이 가진 가능성을 넓힌 시도였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가 꽃피운 가곡의 아름다움은 브람스와 후고 볼프와 같은 작곡가들에게까지 확대됐죠.” 

  유난히도 굴곡이 짙었던 삶처럼 슈만의 음악은 수많은 감정으로 채색돼 있다. 박소현 바이올리니스트는 슈만의 음악이 더없이 진솔하기에 대중들의 마음을 울린다고 말했다. “슈만의 음악에는 행복한 결혼을 축하하는 음악에서도 불안함이 존재하고 죽음의 기로 앞에 쓴 작품에도 실낱같은 희망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입체적이면서도 양면적인 인간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 있기에 대중들은 슈만의 음악을 사랑할 수밖에 없죠. 그의 역설적인 선율은 고독과 벅참 속에서도 행복을 찾아가려는 현대인의 하루하루를 잔잔하게 위로해 주는 것 아닐까요.” 

  누구나 영원한 사랑과 바래지 않는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아름다우면서도 아플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자 곧 생의 모습이다. 모순과 역설로 가득 찬 우리의 하루 끝자락에는 아직도 슈만의 음악이 흐른다.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