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반대에 입법 시도 무산 

물적·인적·제도적 지원 시급해

복지 분야 전문가들과 시청각장애인들은 「장애인복지법」에 시청각 장애를 하나의 유형으로 추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시청각 장애가 하나의 유형으로 인정받지 못한 탓에 시청각장애인들은 시각장애 혹은 청각장애를 지원하는 제도에 몸을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장애는 단순히 시각장애와 청각장애가 더해진 것이 아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시청각장애인에게 필요한 지원을 톺아봤다.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입니다 

  「장애인복지법」 제35조 2항은 국가와 지자체가 시청각장애인을 대상으로 의사소통·이동 훈련·문화와 여가 활동 참여 등을 지원하기 위해 전담 기관을 설치·운영하는 등 필요한 시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장애인복지법」에 따라 2019년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를 시작으로 경기도와 서울특별시(서울시)는 시청각장애인 관련 조례를 제정했다. 서울시는 2021년 5월 .시청각장애인의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바탕으로 시청각 장애 관련 사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지자체의 노력만으로는 시청각장애인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이송희 서울시복지재단 정책연구실 연구위원은 “시청각장애인 특성상 장애 발생 순서와 시기에 따라 지원 방식과 체계가 달라야 한다”며 “이에 따라 지자체들이 사업 수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언급했다.  

  조원석 손잡다 대표 또한 "제주도와 경기도, 서울시를 제외하곤 시청각 장애 관련 조례가 존재하지 않는 게 현실”이라며 “지자체를 넘어 정부 차원에서 국가적으로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법안을 마련할 필요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시청각장애인 권리보장을 위한 법안이 완전히 논의에서 배제된 것은 아니다. 2022년 이명수 국민의힘 의원(충남 아산시갑)은 ‘시청각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한 바 있다. 같은 해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비례대표)도 시청각 장애를 하나의 장애 유형으로 분류하도록 하는 ‘시청각장애인 권리보장 및 복지진흥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그러나 두 발의안에 대해 보건복지부는 기존 제도와 중복 우려가 있어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잘라 말했다. 이후 시청각장애인의 권리보장을 위한 논의에 진전은 없는 상태다. 

  이러한 보건복지부의 의견에 대해 전문가들은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서인환 장애인인권센터 대표는 “보건복지부는 중복장애의 별도 조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한 상태”라며 “모든 책무와 대안을 민간에 미루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시청각 장애 관련 법안은 시청각장애인들이 소수라는 점과 전문가가 부족하다는 점 등의 이유로 계류 중”이라며 “법안 통과는 힘들어 보인다”고 덧붙였다. 

  법안과 기존 제도가 중복될 것이라 우려한 보건복지부의 논리가 타당하지 못하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박경란 교수(세한대 특수교육과)는 “보건복지부가 시청각장애인 관련 법안을 거부한 논리대로라면 기존의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역시 중복의 여지가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법이 만들어져야 현장이 움직인다”며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법령이 먼저 제정돼야 차후 복지나 교육 지원 사업 또한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청각 장애를 온전히 이해해야 

  시청각장애인이 겪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박경란 교수는 “「장애인복지법」이 시청각장애인 복지에 관한 국가와 지자체의 책임을 의무가 아닌 권고 수준으로 두고 있어 강제성이 없다”고 설명했다. 의사소통·교육·생활 자립 등에 대한 시청각장애인 지원이 정부와 지자체의 의무로서 명시돼야 한다는 것이다. 

  시청각장애인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지원도 필수적이다. 박경란 교수는 “각 지역의 장애인이 보조공학기기 사용진단을 받고 난 후 지자체의 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절차를 의무화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국내 시청각장애인 중 최초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조영찬씨(52) 또한 “점자단말기 의존도가 높은 사람에겐 점자단말기 지원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며 “점자단말기의 단순 이용에 그치지 않고 원활한 통역도 가능하도록 속기사와 손가락 점자 통역사 양성이 동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청각 장애 내에서도 습득한 의사소통 체계와 접근방식에 따라 사용해야 하는 보조공학기기의 종류도 다르다. 이와 관련해 이송희 연구위원은 “장애 특성에 따른 의사소통에 적합한 보조공학기기를 파악하기 위해 시청각장애인 실태조사가 우선적으로 실시돼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나 아동 시기에 시청각 장애가 발견되는 경우라면 빠르게 언어 교육을 시행해 최선의 소통법을 익혀야 한다. 서인환 대표는 “아동의 성장단계에 있어 언어를 배우고 의사소통 능력을 기르는 단계가 가장 중요하다”며 “학교 교육 이전에 유아기부터 시청각 장애를 발견하고 초기에 언어 발달을 촉진해주지 않으면 재능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청각장애인의 소통 창구를 온전히 보장하기 위해서 연계 기관을 통해 부모에게 시청각 장애 관련 정보를 전달하고 필요한 교육을 지원하는 서비스 체계 구축도 실효성 있는 방안으로 거론됐다. 박경란 교수는 “부모들은 자녀가 장애를 진단받은 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장애를 발견한 병원이 부모에게 장애 전문 교육기관을 연결해 줌으로써 자녀의 의사소통 교육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전문가들은 시청각장애인의 교육은 자립의 선제적 기반임을 강조하며 교육 체계 정비를 넘어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교육 인력 양성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이송희 연구위원은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지원 전에 우선시돼야 하는 것은 시청각장애인 전문가 양성과 교육”이라며 “시청각장애인에 대한 이해와 의사소통 교육을 진행할 전문가를 양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경란 교수도 “교사 양성과정에서 시청각 장애 교육도 별도로 마련해 시청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실제 교사들을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진행했을 때 일반 교사들은 시청각 장애 자체에 대해 오해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며 “보조공학기기가 원활히 시청각장애인에게 공급돼도 기기 사용법을 전할 전문가가 없다면 결국 기기를 사용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독립된 장애 유형으로 바라보길 

  전문가들은 보조공학기기의 원활한 공급과 전문가 양성·교육이 모두 중요하지만 시청각장애인의 권리보장을 위해선 근본적으로 시청각 장애가 별도의 장애 유형으로 분류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경란 교수는 “보건복지부는 시청각장애인 관련 법률안이 제도의 중복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기 전에 현존하는 조항이 현장에서 잘 지켜지고 있는지부터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실제 현장에서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원인은 시청각 장애가 별도의 장애 유형으로 인정되지 않아서임을 정부가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조원석 대표 또한 “시청각 장애는 다른 장애와 달리 어디로 이동하거나 주변에 있는 정보를 습득하는 모든 상황에서 항상 통역이 제공돼야 한다”며 “이는 시청각 장애가 별도의 장애 유형으로 인정돼야 하는 중요한 이유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법이 시청각장애인을 정의하고 있지 않기에 한국에 현존하는 시청각장애인의 수도 어느 정도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문제가 존재한다. 이송희 연구위원은 “한국의 경우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에 대한 정의와 기준만 존재해 국내 시청각장애인의 정의로 농맹인, 시청각중복장애인, 시청각장애인 등이 혼용되고 있다”며 “시청각 장애의 정의가 정립되지 않은 채 별도의 유형이 부재한 상황이 결국 정확한 시청각장애인의 수조차도 파악할 수 없는 실정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이어 “소수의 지역 민간단체에서 프로그램을 통해 시청각장애인을 지원하고만 있다”고 덧붙였다.  

  국내 시청각장애인이 마주한 현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도 필요하다. 이는 시청각장애인의 권리보장 제도가 마련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서인환 대표는 “시청각장애인 관련 전문가 모임을 통해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제도 마련에 힘을 보태야 한다”며 “다음으로 시청각장애인의 모임이 활성화돼 당사자의 목소리로 참여정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공감대와 지지 세력 확보도 법안 통과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 조영찬씨는 “미국이나 일본에서 시청각장애인이 법 아래 보호받으며 스스로 능력을 기를 수 있었던 이유는 시민의 관심과 지지 덕분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에서도 현재 시청각장애인의 권리보장을 위한 법제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길 바란다”며 “국내 시청각장애인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발붙일 곳조차 없는 한국의 시청각장애인에게 미래를 그리는 것은 어렵기만 하다. 한국에도 존재하는 수많은 헬렌 켈러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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