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백(Aside)은 연극 용어로 ‘인물이 관객에게 하는 말’을 의미합니다. 인물의 곁에서는 듣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관객에게만 들리는 말이죠. 사회를 하나의 무대로 본다면 어떨까요. 이번 학기 중대신문 사회부는 우리 사회라는 무대 위, 누구도 들어주지 않아 방백을 할 수밖에 없던 인물들을 조명하려 합니다.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이 극의 관객이 되어주시겠습니까? 응하셨다면 이번 주는 ‘도심 속 교통약자, 노인’으로 열어보려 합니다. 끝까지 꼭 자리를 지켜주세요. 이제 시작합니다. 김지우 기자 eraser@cauon.net

세계보건기구(WHO)는 고령친화도시의 첫 번째 조건 항목으로 ‘외부환경과 시설’을 제시했다. 이는 노인이 도시 기반 시설에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지난해 보행 사망자 933명 중 노인은 558명으로 전체 사망자 중 약 59.8%를 차지했다. 한국의 노인이 안전하게 발걸음을 옮기기 위해선 무엇이 변화해야 할까. 노인을 보호하지 못하는 ‘노인보호구역(실버존)’의 실태와 개선 방안을 톺아봤다. 

  ‘실버존’ 들어는 보셨나요  
  한국은 교통약자 교통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2008년부터 실버존을 도입해 시행 중이다. 실버존은 노인들의 안전한 통행을 보장하고자 노인복지시설·생활체육시설 등 노인들의 통행량이 많은 곳을 지정해 필요한 단속이 이뤄지도록 한 구역을 말한다.  

  한국 인구의 약 18.4%를 차지하는 만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보행 사망자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실버존 확대에 대한 사회적 동의는 일찍이 형성됐어야 마땅하지만 현재 실버존의 도입과 운영은 모두 쉽지 않은 실정이다. 이수범 교수(서울시립대 교통공학과)는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은 1995년부터 「도로교통법」에 의거해 오랜 기간 동안 정착돼 온 만큼 스쿨존 지정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충분히 이뤄졌다”면서도 “그에 반해 실버존은 주정차 금지나 속도 제한 규제에 대한 인근 주민들의 반발로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실버존을 지정하고 운영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실제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보행 교통사고 사망자 중 65세 이상의 노인 보행자의 사망 건수는 12세 이하 어린이와 비교해 약 36배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그럼에도 2021년 기준 서울 내 지정된 실버존의 수는 스쿨존에 10%도 채 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실버존 지정 비율이 현저히 낮은 이유로 제도의 대상이 되는 노인 집단의 성격과 실버존의 지정 절차를 들었다. 정재훈 교수(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는 “부모의 요구가 개입돼 이슈화가 상대적으로 쉬운 스쿨존과 달리 노인들은 각기 지닌 신체적 어려움이 다르기 때문에 특별히 보호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모으기가 힘들다”고 분석했다. 심태일 도로교통공단 책임연구원은 “복지시설이나 공원 등 실버존 지정 대상 시설의 범위가 모호하고 해당 시설의 이용자가 노인에 한정돼 있지 않다 보니 실버존 지정·관리 주체인 지자체 역시 소극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밝혔다.  

  스쿨존의 경우 ‘초등학교의 주 출입문 반경 300m 이내 도로의 일정 구간’이라는 설정 기준이 존재한다. 이에 반해 ‘노인들의 통행량이 많고 법으로 정해지는 시설 인근’이라는 모호한 실버존 지정 기준은 실제 노인 보행자의 사고 다발 위험 구역을 현실적으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문제로 이어지기도 했다. 서울지하철 3호선 홍제역 인근에서는 지난해 노인 교통사고 13건이 발생했으며 그중 9건에서 중상자가 나왔으나 서울시는 홍제역 인근에 노인복지시설이 없다는 이유로 실버존 지정이 어렵다고 답한 바 있다.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반복되자 국회는 지난 1월 3일 노인이 자주 왕래하는 곳이라면 지자체의 조례로 실버존 자체 지정이 가능하도록  「도로교통법」을 개정했다. 김회경 교수(동아대 도시공학부)는 “이전까지는 노인 관련 시설 및 기관장이 지자체장에게 실버존 지정을 신청해야 해 어려움이 많았다”며 “법이 개정된 만큼 홍제역의 사례처럼 모호한 지정 기준이 불러온 문제들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동작구 실버존, 직접 찾아가 봤습니다 
  그렇다면 실버존의 관리는 잘 이뤄지고 있을까. 기자가 서울시 동작구에 지정된 실버존 8곳을 방문한 결과 실버존은 실질적인 의미를 잃은 상태였다. 실버존으로 지정된 구역에서는 주정차가 금지됨에도 불구하고 청송경로당 부근 실버존의 경우 주정차 된 트럭 두 대가 도로의 절반 가까이 되는 폭을 차지하고 있었다. 청송경로당 부근에 거주하는 박정자씨(85)는 “워낙 좁은 폭의 도로에서 빠르게 운행하는 차들 때문에 위험했던 적이 많았다”며 “남편이 양쪽의 부축을 받아야만 간신히 걸을 수 있는데 불법 주정차 된 차량 때문에 오가지 못한 적이 많다”고 불편을 호소했다. 
 

동작구 청송경로당 부근 실버존에는 도로의 상당 폭을 차지하는 트럭이 주정차 돼있었다. 해당 구역에는 불법 주정차 감시 카메라 역시 설치돼 있지 않았다.
동작구 청송경로당 부근 실버존에는 도로의 상당 폭을 차지하는 트럭이 주정차 돼있었다. 해당 구역에는 불법 주정차 감시 카메라 역시 설치돼 있지 않았다.

 

  명확한 규제를 위해 필요한 단속 카메라조차도 설치돼 있지 않았다. 실버존 표지판과 함께 단속 카메라 설치 내역이 표시된 실버존은 관내에 2곳뿐이었다. 실버존에서는 단속 카메라 설치가 의무 조항으로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회경 교수는 “실버존은 스쿨존에 비해 교통안전시설이나 단속시설의 설치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며 “실버존에 시설물 설치가 차별적으로 이뤄지는 이유는 어린이 교통사고에 비해 노인 교통사고가 상대적으로 사회적 관심을 덜 받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실버존 표지판과 속도 제한 문구만이 이곳이 실버존임을 말해주고 있다. 어린이보호구역과 달리 실버존은 내비게이션을 통해 따로 안내되지 않는다.
실버존 표지판과 속도 제한 문구만이 이곳이 실버존임을 말해주고 있다. 어린이보호구역과 달리 실버존은 내비게이션을 통해 따로 안내되지 않는다.

  실버존 내 횡단보도에 신호등이 설치된 곳 또한 8곳 중 단 2곳에 그쳤다. 실버존의 낮은 횡단보도 신호등 설치율에 관해 심태일 책임연구원은 “현행 「도로교통법」은 스쿨존의 경우 주 출입문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간선도로 상 횡단보도에 신호기를 설치할 수 있도록 지원하지만 실버존에는 이러한 내용이 명시돼 있지 않다”며 “그렇기 때문에 지자체 측에서는 예산이 소비되는 교통안전시설을 설치하는 것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동작구 사당노인복지관 부근 실버존 내 횡단보도에는 신호등이 설치돼 있지 않아 보행자와 차량이 도로 위에 혼재했다.
동작구 사당노인복지관 부근 실버존 내 횡단보도에는 신호등이 설치돼 있지 않아 보행자와 차량이 도로 위에 혼재했다.

  회색과 은빛의 경계를 넘어라 
 
실버존이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선 우선으로 관련 예산 투자가 시급해 보인다. 2021년  정부의 스쿨존 개선 예산은 약 1988억원이었지만 실버존 예산은 단 70억원에 불과했다. 전문가들은 실버존 자체에 대한 정부의 예산 확보뿐만 아니라 지자체별로 필요에 따른 차등 분배가 이뤄져야 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이수범 교수는 “스쿨존에 집중된 보호구역 예산을 국가적 차원에서 실버존으로도 분배해야 한다”고 전했다. 김회경 교수는 “현재 지자체 단위로 교통안전 지수를 평가하고 있다”며 “해당 지표에 노인 관련 지표를 추가해서 지푯값이 취약한 지자체를 우선으로 예산을 집행한다면 전국 단위의 노인 안전을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언급했다. 

  실효성 있는 실버존을 위한 설계 방안도 고민이 필요하다. 문병섭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단순히 실버존 개수나 신호등 대기 시간을 늘림으로 노인의 보행 안전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라며 “교통약자를 개개인의 신체적 능력으로 세분화하고 그에 맞춘 다양한 보행 보조기구들의 도입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심태일 책임연구원은 “노인 보행자의 시인성을 높이기 위해 실버존 내 차량의 제한속도를 확실히 규제해야 한다”며 “주정차 금지에 대해서는 해당 구역에 거주하는 이해당사자들 간의 의견 수렴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이어 “기술적으로는 야간 노인 보행사고 방지를 위한 조명시설 확충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사회적인 공감대 형성과 인식의 전환이라는 목소리도 존재했다. 문병섭 선임연구위원은 “이제까지 노인의 통행 문제는 개인의 문제로 취급돼 왔지만 통행권은 행복 추구권의 일종이자 엄연한 사회적 문제”라고 강조했다. 정재훈 교수는 “단속을 강화하는 것이 일시적인 효과는 거둘 수 있겠지만 장기적인 효과를 꾀하려면 현재 한국의 자동차 중심 교통 문화가 먼저 변화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실버존은 노인이 외치는 방백의 또 다른 방백이다. 더 이상 방치돼 녹슬어 가는 실버존이 없도록 안전한 노인 보행 문화를 위해 사회와 개인의 노력이 동반돼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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