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자연과학은 모든 학문의 바탕이 된다는 의미에서 기초학문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무게감 있는 명칭과 달리 현실에서의 대우는 그리 좋지만은 않은데요. 기초학문의 위기론은 오래 전부터 제기돼 왔지만 응용학문의 발전 속에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학생사회와 대학사회, 정부 모두에게 소외받는 기초학문의 현실은 어떨까요? 기초학문이 처한 상황을 분석해 보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살펴봤습니다. 권오복 기자 luckyfive@cauon.net
 


일률적 평가 기준,  기초학문 특성 고려 못해
“눈앞의 성과만 좇아선  양질의 인재 양성 불가”


정부는 학령인구 감소에 대응하고 대학의 경쟁력을 확보하고자 지속적으로 구조조정 정책을 시행해왔다. 현 정부는 재정진단을 통해 경영위기대학을 선정하여 대학의 규모를 축소하고 있다. 이에 각 대학은 학문의 근간인 인문·자연계열 학과 구조조정에 나섰다.

  기초학문부터 시작된 가지치기 
  지난해 12월 30일, 교육부는 대학 규제를 대폭 완화시키는 내용의 「대학설립·운영규정」 전부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교육부는 대학 운영 4대 요건(교사·교지·교원·수익용기본재산)과 통폐합 기준을 완화함으로써 대학이 자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대학 구조조정의 필요성에 대해 임희성 대학교육연구소 연구원은 “학생 수는 등록금 수입과 직결되기에 학령인구 감소 상황에서 대학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정원과 함께 규모를 줄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구조조정 방식은 더욱 고민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임희성 연구원은 “각 대학이 정원을 감축하는 과정에서 학생 수요가 적고 취업이 용이하지 않은 비인기 학과가 우선적으로 논의된다”며 “지금의 구조조정 정책은 대학이 기초학문의 정원과 비중을 줄이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1990년대 말부터 이어진 학과 구조조정 정책에 따라 많은 대학에서 학과 통폐합을 단행하며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주요 대상은 인문·자연계열 학과였다. 지난해 9월 20일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충북 청주시흥덕구)이 공개한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22년까지 전국 4년제 대학 전체에서 인문계열 학과 수가 26개 감소했다. 종로학원이 발표한 ‘2019년 전국 4년제대 이공계 기초학문 분야 설치 대학 현황’에서 전국 4년제 180개 대학 중 물리·화학·생물·수학 등 기초과학 학과가 설치된 대학은 절반을 조금 넘는 92개에 불과했다. 부상돈 교수(전북대 물리학과)는 “전국의 물리학과 중 3분의 1가량이 지난 10년 사이 통폐합됐다”며 “기초과학의 폐과로 응용과학의 연쇄적 붕괴가 우려된다”고 전했다. 

  중앙대 또한 일찍이 구조조정의 역사를 지나왔다. 본격적인 구조조정이 시작된 2010년에는 인문대와 자과대의 학부제 전환 논의가 이뤄졌다. 그 결과 일부 어문계열 학과가 아시아문화학부와 유럽문화학부로 통합됐다. 이어 2013년 인문대 비교민속학전공의 신입생 모집 중단이 결정되며 폐과 절차를 밟았다. 비교민속학전공이 없어진 것에 아쉬움을 표한 이찬규 인문콘텐츠연구소장(국어국문학과 교수)은 “학생들의 전과로 학과 운영이 힘들어져 어쩔 수 없이 폐과됐다”고 설명했다. 

  차등 없지만 실질적 배려는 부족해
  2006년부터 2016년까지 10년간 구조조정을 거친 중앙대에서 인문·자연과학의 위상은 어떨까. 인문대학의 학부 통합에 관해 이광진 교수(프랑스어문학전공)는 “프랑스어문학전공 교수로서 유럽문화학부의 정체성을 대외적으로 소개하는 데 불편함이 있지만 학부 통합으로 인해 연구나 활동에 지장을 받은 적은 없다”고 답했다. 김한식 교수(프랑스어문학전공)도 “학과 정원을 조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통폐합이기에 통합 이후에도 실질적으로는 학과 체제로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전했다.

  한 차례 학부 통합 논의가 있었던 자과대도 현재 각 학과 운영에 어려움은 없다는 입장이다. 서상범 자과대학장(생명과학과 교수)은 “자과대 학과 수와 정원이 오랜 기간 유지되고 있다”며 “자연계열 학과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타대에 비해 잘 유지되는 편”이라고 밝혔다.

  중앙대는 예산과 연구비 지원에 있어 학문 분야별로 차등을 두고 있지 않다. 이강이 예산팀 과장은 “인건비·연구비·장학금 등 총괄 부서 예산을 제외한 단대 운영 예산은 각 단대별 등록금 수입과 재학생·입학생 수를 기준으로 배분된다”고 전했다. 주재범 연구부총장(화학과 교수)은 교내연구비 지원제도에 대해 “양질의 논문을 작성하는 교수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학술지 게재 장려금을 비롯해 해외 공동 연구장려금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교내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러한 차등 없는 지원이 인문계열의 학문적 특성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노영돈 인문대학장(독일어문학전공 교수)은 “전통적 연구 방식을 사용하는 인문학의 학문적 특성상 다른 학문 분야에 비해 연구 실적이 많이 나오기 어렵다”고 전했다. 이찬규 소장도 “인문학은 교육 과정이나 연구 방식을 국제적으로 표준화하기 어려워 국제학술지 게재가 쉽지 않다”며 “학문적 특수성을 감안한 지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첨단 분야 조명에 그림자 진 기초학문 
  일부 전문가들은 기초학문에 소홀한 정부의 대학 정책을 지적했다. 이찬규 소장은 “대학의 평가 기준이 공학적인 기준으로 이뤄져 있다”고 전했다. 교육부는 2023학년도 정부 재정지원제한대학 평가에서 ▲교육 여건과 성과 ▲신입생·재학생 충원율 ▲졸업생 취업률 등을 주요 정량 지표로 활용했다. 임희성 연구원은 “줄세우기식 평가를 통해 저평가받은 경영위기대학을 상대로 폐교를 유도하는 구조조정 정책이 기초학문의 위기를 불러왔다”며 “취업률과 충원율이 낮은 기초학문을 폐과하는 것이 다른 평가지표까지 회복하는 방편이 된다”고 지적했다.

  인문·자연계열의 교수들은 취업률로 기초학문을 평가하는 것에 불만을 표했다. 서상범 학장은 “자연과학 특성상 대학원 진학률이 중요하기 때문에 단순 학부생 취업률 비교는 불합리한 지점이 있다”고 전했다. 위행복 한국인문사회총연합회 이사장은 “현재 한국의 산업 구조가 제조업 중심으로 이뤄져 인문계열의 취업률이 낮을 수밖에 없다”며 “취업률로 평가하기 이전에 인문계열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정부의 노력부터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연구재단이 발표한 ‘2022년도 전국대학 대학연구활동실태조사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기준 4년제 대학의 인문학 과제 수는 5804건인 반면 사회과학 과제 수는 1만 5563건에 달한다. 자연과학의 과제 수 또한 공학 과제 수에 비해 2만 5111건이 적었다. 임희성 연구원은 “현 정부가 모든 고등교육의 역량을 첨단 분야 인재 양성에 투입하고자 하는 의지가 높다”며 “올해 고등교육의 가장 핵심적인 국정 과제로 첨단 분야 인재 양성을 두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기초학문을 겨냥한 재정 지원 정책은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정부의 인문학 연구 지원 정책이 부족한 것에 대해 일부 교수들은 불만을 표했다. 이찬규 소장은 “정부가 인문학적 상상력을 창의적 제품 생산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며 “이는 인문학에 대한 단편적 이해”라고 말했다. 김한식 교수는 “인문학 분야가 연구 지원에서 심각하게 소외되고 있다”며 “연구재단에서 지원하는 연구비 규모가 이공·상경계열에 편중됐다”고 전했다. 명정 한세예스24문화재단 국장은 “이공계 학문 단위는 산업체와 연결돼 규모 있게 지원이 이뤄지는 반면 인문학은 가시적인 결과가 도출되지 않아 지원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고 언급했다.

  자연계열 또한 첨단 기술을 다루는 응용 분야에 밀려 충분한 지원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2020년  「기초연구진흥 및 기술개발자원에 관한 법률」 제2조에서 기초연구의 정의가 개정되며 기초과학의 범위가 확장됐다. 부상돈 교수는 “2011년 제정 당시 순수 기초과학만을 다뤘던 조항이 공학·의학 등의 응용 분야를 모두 다룰 수 있도록 개정됐다”며 “현재 정부가 지원하는 기초과학 사업 지원비에 응용 분야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서상범 교수는 “기초학문의 예산이 다른 학문에 비해 적게 편성되어 분야 내의 경쟁률이 기본적으로 높을 수 있다”며 “정부의 기초학문 지원·육성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임희성 연구원은 “정부가 산업적 관점으로 대학을 바라보며 다양한 분야를 고려하지 않고 단기적인 인재 육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충분한 교육 여건이 갖춰지지 못한 상황에서 현재의 정책으로는 양질의 첨단 인재를 양성할 수는 없다”고 전했다. 

  첨단 분야를 집중 지원하는 정부의 지원 기조에 따라 대학이 관련 학과를 육성하고 있으며 중앙대 또한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다. 중앙대는 경영학부 글로벌금융전공, 공공인재학부, 소프트웨어학부, AI학과 등을 특성화학과로 선정하여 최초합격자 4년 반액장학금을 비롯한 다양한 지원책을 시행하고 있다. 백준기 교학부총장(영상학과 교수)은 “정부의 8대 핵심 선도사업 분야와 대학의 전략적 핵심육성 분야를 토대로 특성화학과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2021년 다빈치캠에 특성화학과인 첨단소재공학과가 신설되어 공대 정원이 약 11% 증가하기도 했다. 1982년에 비해 2023년 공학계열과 사회과학계열의 중앙대 입학정원은 각각 386명, 584명이 늘었다. 그에 반해 자연과학계열 입학생은 불과 3명 늘었고 인문계열은 오히려 88명이 더 준 것으로 나타났다.

통폐합, 임시방편에 불과 
  기초학문은 학령인구 급감과 정부 구조조정 정책의 영향으로 응용학문과 통폐합되고 있는 실정이다. 2021년 삼육대는 중국어학과와 일본어학과를 항공관광외국어학부로 통합했다. 상명대는 역사학과를 역사콘텐츠학과로 개편했다. 2016년 대진대는 사학과와 철학과를 역사·문화콘텐츠학과로 통폐합했고 2014년 한남대는 철학과를 폐과하고 철학상담학과를 신설했다.

  인문학과 응용학문의 통폐합에 관한 비판도 제기됐다. 이광진 교수는 “인문학과 응용학문의 융복합적 협력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만 둘의 학문적 목적이 다르기에 통폐합은 반대한다”며 “인문학을 응용학문과 통폐합하려는 시도는 각 학문 분야의 본질에 대한 몰이해”라고 전했다. 김한식 교수도 “상당수 어문계열 학과의 통폐합 시도가 학과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오지 못했다”며 “명칭 변경과 몇 개의 강의를 신설하는 것에 그쳤다는 점에서 회의적”이라고 전했다.

  자연계열의 통폐합에 관해 조영금 교수(수학과)는 “자연과학은 독립성이 커 응용학문과 결합할 수 없다”며 “통폐합은 학령인구 감소에 대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송광용 교수(물리학과)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구조조정은 학문의 발전을 목표로 하기보다 대학 정원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추측된다”며 “연구 중심 대학을 위해서는 자연과학 분야를 유지하며 발전시켜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학부제 통합에 관해 “학부제는 각 학과의 학생 수에 변동이 심하고 학생들의 수업 성실도가 높지 않은 경향이 있다”며 “우수한 대학원생 확보에 어려움이 예상되는 제도”라고 덧붙였다.

  대학에서 기초학문의 방향에 대해 위행복 이사장은 “경제발전만을 목표로 대학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며 “학생 선호와 산업 수요에 맞춰 통폐합을 단행하기보다 기초학문의 기반을 다진 다음 응용학문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가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현재 대학은 등록금으로 운영되기에 현실적인 재정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며 “고등교육 기초학문에 대한 정부의 지원 확대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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