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댄 나를 사랑이라 불러 주오
그리되어 드리리 오늘 밤
나 그대의 품에 안겨서
입을 맞추고 -잔나비 <전설> 중

창동역 ‘OPCD 바이닐’에서 LP를 청음하고 있는 기자의 모습. 헤드셋을 통해 생생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가수 잔나비 앨범 색과 같은 노란 LP판이 인상적이다. 사진 이서정 기자
창동역 ‘OPCD 바이닐’에서 LP를 청음하고 있는 기자의 모습. 헤드셋을 통해 생생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가수 잔나비 앨범 색과 같은 노란 LP판이 인상적이다. 사진 이서정 기자

길을 걷다 보면 사람마다 귀에 꽂은 이어폰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저마다 좋아하는 노래와 함께 일상을 보낸다. 그런데 가끔, 디지털 신호로 접하는 음악이 멀게만 느껴질 때가 있다. 음악에 가까이 닿고 싶었던 기자는 가장 생생한 소리를 들려준다는 LP를 찾아 떠났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LP도 그렇다
  
LP는 ‘Long Playing Record’의 약자로 장시간 들을 수 있는 음반을 말한다. 온라인서점 예스24에 따르면 2020년 가요 분야 LP 판매 증가율은 약 262.4%p로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구매층은 30대가 약 31.7%로 가장 많았고 20대가 약 21.2%로 그 뒤를 따랐다. 젊은 가수들도 굿즈 형태로 LP 음반을 발매하고 있다.

  LP와는 거리가 먼 듯한 젊은 세대가 이토록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코로나19 이후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는 임경빈씨(23)는 새로운 취미로 LP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임경빈씨는 LP의 차별화된 매력이 정성과 시간이라고 언급했다. “음원 사이트에서도 음악을 쉽게 들을 수 있지만 LP는 취향을 알려면 하나하나 찾아야 하죠.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앨범을 발견하면 애착이 생겨 더욱 소중해지는 것 같아요.” 실제로 임경빈씨는 취향이 담긴 LP를 추천하는 영상을 유튜브 ‘빈둥’ 채널에 공유하며 사람들과 소통한다.

  다양한 LP를 소개하는 영상을 올리는 유튜브 ‘bomoon보문’의 운영자 최보문씨(23) 역시 시간을 들여 음악을 감상하는 게 LP만이 가진 매력이라고 언급했다. “같은 음악을 듣더라도 LP는 직접 턴테이블에 올려야 하고 원하는 노래가 있어도 그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죠. 음악에 쏟는 시간과 애정은 제가 음악에 온전히 빠질 수 있게 해줘요.”

중고 LP로 빼곡하게 채워진 진열대 앞 사람들. 작은 의자를 밟고 올라가 LP를 고르는 사람이 눈에 띈다. 회현지하상가에서 다양한 LP를 볼 수 있는 ‘리빙사’의 풍경이다. 사진 박서영 기자
중고 LP로 빼곡하게 채워진 진열대 앞 사람들. 작은 의자를 밟고 올라가 LP를 고르는 사람이 눈에 띈다. 회현지하상가에서 다양한 LP를 볼 수 있는 ‘리빙사’의 풍경이다. 사진 박서영 기자

  시공간을 넘어 LP판은 영원을 남기고
  서울시에서 다양한 LP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보물찾기하듯 LP를 발견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회현지하쇼핑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회현역과 명동역 사이에 있는 회현지하상가는 1977년 회현지하도로가 생기며 형성된 곳으로 여전히 그때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었다. 진열대를 빼곡히 채운 중고 LP가 족히 수천 장은 넘어 보였다. 원하는 LP를 찾으려면 아래에 놓인 의자를 밟고 올라서서 손을 뻗어야 할 정도다.

  이곳에서 가장 규모가 큰 LP 가게인 ‘리빙사’의 이석현 대표는 LP를 찾는 연령대가 많이 변화했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LP를 과거에 만지고 듣던 사람들이 왔다면 지금은 LP를 전혀 접하지 않은 20대부터 40대가 많이 와요.” 그는 흐뭇한 표정으로 가게를 둘러보며 LP만이 지닌 소리의 특징을 설명했다. “LP 들어봤죠? LP는 일반 CD보다 소리가 훨씬 좋아요. 원음에 최대한 가깝도록 고음과 저음의 풍성함을 다 담아내기 때문이죠. 소리에 민감한 사람들은 LP를 계속 찾아 듣게 됩니다.”

  천천히 LP판을 구경하던 중 어디선가 잔잔한 클래식 선율이 들려왔다. 회현지하상가 ‘파스텔 레코드’의 신재덕 대표가 클래식 음반을 정리하고 있었다. 신재덕 대표는 젊은 세대가 LP를 꼭 들어보면 좋겠다고 전했다. “요즘 젊은 친구 중에 LP를 수집의 개념으로 사서 보관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음악을 직접 들으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LP를 한 번 감상하면 그 소리의 매력에 빠져 평생 LP로 음악을 듣게 될 거예요.”

  이석현 대표는 음악을 선택적으로 듣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책에서 보는 100대 명반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음악에 선입견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들었을 때 좋은 음악, 그게 가장 훌륭한 음악인 거죠.” 회현지하상가를 빠져나오며 기자는 어쩌면 좋은 LP판을 고르는 특별한 방법이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단지 이곳에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일 뿐이다.

  고가 도로 아래에서 발견한 낭만
  지난 7일, 기자는 창동역 1번 출구 앞 고가 도로 아래 위치한 ‘OPCD 바이닐’을 찾았다. 음악도시를 꿈꾸는 도봉구가 무료로 운영하는 LP 음악 감상실이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과 경적을 울리며 달리는 차들 속 자리한 공간. 파란색 네온사인의 간판이 숨을 돌리고 가라는 듯 선명하게 빛나고 있다.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건 자리에 놓인 여러 대의 턴테이블, 음반을 돌리는 동그란 받침대로 LP를 감상하려면 꼭 필요한 준비물이다. 특별히 찾는 가수가 있냐는 직원의 물음에 기자는 가수 ‘잔나비’를 좋아한다고 답했다. 즐겨 듣는 앨범이자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라는 유명한 곡이 수록된 정규 2집 <전설>을 건네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앨범을 여니 둥글고 노란 LP판 두 장이 들어있다. 하나를 꺼내 조심스레 끝을 잡고 턴테이블에 올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나무의 나이테처럼 얇은 선들이 그려져 있다. LP의 소리골로, 골마다 깊이와 폭에 따라 다른 음원을 담는다. LP가 소리를 내려면 턴테이블에서 팔 역할을 하는 톤암을 움직여야 한다. 톤암 끝에 달린 바늘을 적당한 위치에 둔 뒤 천천히 내려 LP판과 맞닿게 한다. 헤드폰을 끼고 ‘Start’ 단추를 누르자 판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한다. 바늘이 부드럽게 소리골 위를 움직이자 익숙한 선율이 들려온다. 평소에 듣던 노래와는 전혀 다른 울림이다. 어느새 그 소리는 주변을 지우고 음악이 가득한 세계로 기자를 이끈다.

  낭만은 도시 곳곳에 울려 퍼지네
  LP는 다채로운 소리를 가진다. 특히 LP 특유의 지글대는 잡음은 오히려 소리를 자연스럽게 만든다. 턴테이블을 멈추면 ‘뚝’하는 소리 대신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음악이 서서히 꺼진다. 마치 오래된 영화 필름이 감기는 듯한 아날로그 감성을 느낄 수 있다.

  기자는 OPCD 바이닐에서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LP판을 정리했다. 어둑어둑한 밖을 보니 문득 같은 자리에만 머무르며 앨범 전체를 감상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박한울 OPCD 바이닐 관계자에게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물었다. “주민들이 가장 많고 가끔 경기도 성남시나 의정부시에서 오는 분들도 계세요. 이 공간을 LP 감상뿐만 아니라 근처를 지나갈 때 편히 방문하는 휴식처로 여겨주시면 좋겠습니다.”

  창동역에 위치한 OPCD 바이닐부터 신당동의 LP 카페인 ‘모자이크 서울’, 동묘앞역 인근 오래된 음반 가게 ‘돌 레코드’, 다양한 LP를 판매하는 동교동의 ‘김밥레코즈’까지. LP에 눈을 뜨고 보니 이미 곳곳에서 그 선율은 흐르고 있었다. 바쁘고 바쁜 현대 사회 속 둥근 판이 들려주는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여보면 어떨까. 수많은 선이 그려진 LP판 위에서 고심 끝에 바늘을 옮기는 시간, 그 시간은 일상의 여유로움이자 낭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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