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란이 되었던 ‘문학동네’의 『롤리타』 표지.

 

 어린 소녀의 하얀 다리, 한쪽 무릎을 조금 굽힌 채 발에는 단정한 양말과 앙증맞은 신발이 신겨져 있다. 아슬아슬한 길이의 치마, 속이 보일 듯 말 듯한 흑백 사진에서 은근한 ‘금기’의 분위기가 풍긴다. 출판사 ‘문학동네’가 올해 출간한 새 번역본 『롤리타』의 표지다. 지난 2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가 논쟁에 휩싸였다. 소녀의 다리와 무릎이 나오는 표지가 선정적이라는 이유였다. 중년 남성이 고작 열두 살의 소녀를 성적 대상으로 본다는 줄거리 역시 끊임없는 논란을 만들어냈다.


 1955년, 소설 『롤리타』는 출판 후 세계적 반향을 일으키며 ‘롤리타 신드롬’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롤리타 신드롬은 미성숙한 소녀에게 성적 집착을 하는 성도착증의 일종으로 ‘소아애증(기아성도착증)’으로 분류된다. 롤리타 신드롬은 아동성범죄 기사에서 주로 쓰이는 용어이기 때문에 흔히 소설 『롤리타』를 농밀하고 선정적인 포르노그래피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 『롤리타』는 서정적인 문체로 이루어진 고전문학작품이다. 실제로 작가는 ‘에로틱한 장면이 많을 거라 상상한 독자는 지루하고 속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따라서 흉악한 범죄에만 『롤리타』를 연관 지을 것이 아니라, 작품이 담고 있는 사회적 상황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작품 속 배경은 풍요롭지만 극도로 상업화된 1950년대의 미국이다. 세계 2차대전이 1945년에 끝났으니 주인공 험버트는 청춘을 전쟁과 함께 보낸 셈이다. 전쟁이 앗아간 희생자들과 냉전 시대의 긴장 속에서 생겨난 공허감은 치유되지 못한 채 상업주의 속에 심화돼갔다. 험버트 역시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공허감을 느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험버트는 과거 한 소녀와의 사랑에서 실패한 것이 자신이 어린 소녀를 좋아하게 된 이유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사실상 전후의 공허함과 소외감이 어린 여자아이들로 대표되는 ‘환상’을 좇게 한 셈이다. 험버트는 어린 소녀들을 ‘요정’이라고 칭하며 그만의 환상을 견고히 쌓는데, 급기야는 돌로레스라는 소녀를 ‘롤리타’라고 부르면서 집착한다. 돌로레스라는 소녀를 사랑한 나머지 그 어머니와 결혼하고 나중에는 돌로레스를 데리고 떠나기에 이른다. 하지만 환상의 본질은 ‘허구’일 수밖에 없다. 후에 롤리타가 다른 남자와 도망가 임신했을 때의 모습은 그의 환상을 깨버리기 충분했기에 험버트는 무너지게 된다. 


 또한 1950년대 미국은 ‘매카시즘’으로 설명될 수 있다. 매카시즘은 공산주의를 극도로 혐오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틈타 정치적 반대자를 모조리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반공주의 열풍을 뜻한다. 즉 공산주의를 부정하며 사상을 탄압하고 통제했던 것이다. 당시 소련이 원자폭탄을 보유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미국사회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가 만연했는데 이를 이용해 무고한 사람들이 투옥되고 마녀사냥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롤리타는 매카시즘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고 평가받는다. 험버트의 소녀를 향한 사랑은 ‘금지’된 것으로써 사회에서 용납되지 못하는 사상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사상의 자유를 표방하는 민주주의 미국에서 오히려 자유를 탄압하려 드는 모습을 소설을 빌어 비꼰 것이다. 따라서 험버트의 성도착증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후의 공허감과 매카시즘이 맞물려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롤리타』는 롤리타 신드롬이라는 단어가 많이 알려진 탓에 작품의 가치가 제대로 알려지기도 전에 부정당하고 마는 비운의 고전이다. 소설의 시대상을 고려한다면 롤리타 신드롬이 단순한 심리학적 용어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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