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서 학술을 읽다

▲ 프랑스 화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7월 항쟁이 배경이다.

함축적인 언어로 수 놓인 가사가 울려 퍼지고 장엄한 뮤지컬이 스크린 위로 펼쳐진다. 지난 2월 초에 누적관객 수 576만 명을 돌파하며 언론계와 출판업계를 들썩이게 한 영화 <레미제라블>(빅토르 위고 원작). 영화를 봤다면 바리케이드를 치고 혁명가를 부르며 깃발을 흔드는 시민들을 기억할 것이다. 청년들의 노래와 어린 소년 가브로슈의 죽음은 분명 마음 한구석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영화 내내 민중시위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는 영화를 관통하는 시대적 배경이 ‘프랑스 혁명’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대혁명으로부터 26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나아지지 않은 상황’이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대부분의 관객은 이 문장의 의미를 깊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1789년에 시작돼 1799년에 끝난 ‘프랑스 대혁명’이 프랑스 혁명의 전부일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혁명 이후 단기간에 체제가 바뀌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이와 다르다. ‘프랑스 혁명’은 1789년 이후 약 100년 동안 지속적으로 발생한 혁명과 반동을 포괄한다는 정의가 정확하다. 레미제라블이 대혁명 26년 이후부터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시민혁명의 모습을 계속 보여주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흔히 알려진 프랑스 대혁명은 1789년, 신분제에 대한 불만과 곡물 가격의 급격한 변동이 계속되는 경제 위기 속에서 일어났다. 밀려오는 혁명의 물결을 피해 국외로 망명하려다 붙잡힌 루이 16세가 처형되면서 프랑스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확고히 하게 된다. 그럼에도 대혁명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국왕이 사형당한 것을 군주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주변 국가들이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공격하기에 이른 것이다. 프랑스는 또다시 피로 물들었고 나폴레옹이 등장하기 전까지 혁명과 반동이 지속됐다. ‘왕’을 몰아내기 위해 시작한 혁명이 나폴레옹 ‘황제’를 세우고 끝났다는 것은 기막힌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이렇게 1799년 프랑스 대혁명은 막을 내렸지만 장발장이 19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가석방된 것은 1815년이었다. 즉 레미제라블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다. 장발장이 가석방되기 4달 전에는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해 프랑스의 정세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국내외로 프랑스가 병폐에 시달리고 있을 때를 배경으로 하므로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의‘레미제라블’의 모습들이 픽션만은 아닌 것이다. 영화에서 혁명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1830년대부터다. 역사상으로는 리마르크 장관의 죽음을 계기로 한 1832년 6월 항쟁(June Rebellion)이 바로 영화 속 마리우스와 그의 친구들이 선동하는 시위다. 6월 항쟁은 7월 항쟁과 2월 항쟁 사이에 학생, 부랑자, 노동자를 주축으로 일어난 혁명 운동이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6월 항쟁이 엄청난 사상자를 남긴 채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의 뜻은 100년의 세대를 넘어 자유를 얻기까지 멈추지 않았다. 6월 항쟁을 이끈 학생들은 대혁명을 주도한 사람들의 후손 세대로서 대혁명의 뜻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6월 항쟁 16여 년 후 그들의 뜻은 다시 2월 혁명으로 나타났다. 삼색기를 휘날리며 혁명의 노래가 메아리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1848년 2월 혁명은 결국 제 2공화국을 수립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에도 프랑스는 민주공화국으로 정착되기까지  홍역을 몇 차례 더 앓게 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프랑스 혁명을 위대한 혁명으로 손꼽는 이유는 시작이 어떻든 분명히 불쌍한 사람들, ‘레미제라블’이 직접 자유를 일구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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