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향기 물씬 풍기는 날, 흐드러지게 만발한 여의도의 벚꽃 길에 넋을 잃고 드라이브를 즐겼다면 이제 한강 다리를 건널 차례다. 칙칙한 쥐색의 철교마저 운치 있게 느껴지는 건 봄이 가진 힘.

하지만 시선을 조금 위쪽으로 옮겨보면 다리마다 설치되어 있는 굴림판이 눈에 들어온다. 위에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된 아이디어 장치라는 굴림판. 해마다 몇 명씩은 장치에도 불구, 한강에 투신자살을 하고, 가장 높은 자살 건수를 보이는 계절은 봄이라고 한다.

완연한 기운의 봄빛과 쥐색의 대비만큼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들, 떨어지기 직전의 찰나,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젠 자유로울 수 있을까’하는 생각? 그들이야 인생의 굴레에서 자유로워 졌지만 남겨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족쇄가 채워지는 순간이다.

그들이 추구한 자유. 과연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자살에 대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논의 중 하나가 자살을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다.

자신의 삶을 마감하려는 적극적인 의도인지, 우울증을 동반한 정신병인지 많은 철학자들과 학자들이 지금껏 각기 다른 입장을 고수해 왔다. 과거, 자살은 일종의 범죄 행위로 간주되어 자살한 사람의 사유재산은 몰수되었고 직계 가족에게도 불이익이 돌아갔다.

기독교 중심의 사회에서는 좀더 엄격하게 자살에 대한 처벌이 정해져 있었는데, 당시 사회에선 자살이란 타살과 함께 살인에 속했기 때문이다. 신이 주신 권리를 스스로 박탈하는 것은 살인 이상의 신성 모독 행위였다.

자살과 관련된 법적 제재가 없어진 것은 프랑스 혁명과 인권 선언 이후의 일이다. 지배사회의 대변자들이라 할 수 있었던 심리학자들도 자살을 더 이상 논의할 가치가 없는 악행이라 단정한 때가 있었다.

정신의학자 에스키로르는 자살을 일종의 정신병으로 분류한다. ‘자살은 착란상태에 있는 인간이 자기 목숨을 끊는 행위이다. 그들은 모두 정신병자다(1838)’ 자살자는 곧 정신병자라고 정의한 그는 자신의 미래를 깡그리 파괴하는 자살자에게 용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진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자살 옹호론을 펴는 사람들이 있어 왔다. 아킬델마가 그중 하나. 그는 자살이 명석한 인간만이 행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삶을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사회적 의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한 것도 용기있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자살을 실존과 주체의 문제로 인식했던 바에슐러 역시 죽음을 선택하는 면에서 자살이 ‘실존에 관한 문제의 해결방법을 주체의 자발적인 죽음에서 구하고, 발견하는 행동’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오늘날에 있어 자살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화두는 안락사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좀더 편안한 죽음을 원하는 이들과 기존의 가치관대로 생명 자체의 의미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들. 가치판단의 문제지만 법적 실효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논란이 예상된다. 

죽음을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 하는 환자들과 다르게 충동적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얼마 전 자살방법을 상세히 가르쳐주고 방조한 자살관련 사이트 운영자가 사법 처리를 받은 적이 있었다. 자살을 도와주는 이 엽기적인 행각.

하지만 느닷없이 이루어진 일은 아니다. 30분마다 1명씩 자살한다는 프랑스에서는 80년대부터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위한 협회’가 운영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내몰린 상태에서 택하는 자살이 아니라면, 최대한 고통 없이 죽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 그 협회의 기본 방침이다.

더 먼 과거에서부터 자살을 도와주는 단체가 여럿 있어왔다.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나타난 ‘죽음협회’는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저 세상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보다 확실하고 자유롭게 자살하도록 도와주는 엽기적인 이 단체에서는 매년 선출되는 의장이 자살할 명예와 의무를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자살한 사람들에게 쇼크를 주지 않을 정도의 자살 방법도 연구되었다고. 이 협회는 ‘자살클럽’ 소설의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이러한 단체가 불법적인 형태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면 실제 정부 기관에서 자살과 관련된 특수기관의 창설을 주장한 경우도 있었다.

통과되지는 않았지만 덴마크 의회에서 괴로움 없이 자살할 수 있는 특수기관의 창설을 주장하는 안건이 논의 되었던 것이다.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나 <델마와 루이스>를 보면 자살은 진정한 의미의 해방구처럼 보여진다.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은 공통적으로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평범하고 보편적인 인간상과는 거리가 멀다. 보기에 아슬아슬할 정도로 현실의 경계선을 걷고 있는 그들. 하지만 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걸 받아들일 수 없고 바뀔 수도 없는 사회에서 그들이 택하는 새로운 세상, 거기로 들어가는 매개가 자살이다. 지나치게 자살을 낭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남 눈치 보지 않고 ‘비정상적’인 길을 택하던 이들은 죽음의 순간마저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있다.

자살에서 최고 형태의 인간적 자유가 실현된다고 주장했던 아메리의 테제가 구체적으로 구현되는 모습이기도 하다. 누구는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을 두고 혀를 찬다. 특히 생활고의 위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삶의 한 방식으로 택하는 사람들을 두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 내면의 자유 의미는 그들 스스로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이야 분명 경계해야 할 것이지만 단순한 치기나 순간의 어리석음으로만 치부하기에 무리가 있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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