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시절, 개강 초 정신없이 술자리를 누비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한 학기가 다 가 있다. 어느덧 찾아오는 허탈감. 입학 전 꿈꾸던 대학생활과는 영 거리가 멀다. 브라운관서 늘상 재미나게 생활하던 대학생 소재의 시트콤을 보며 핑크빛 낭만을 꿈꾸던 새내기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실제로 텔레비전 속에서 재현되는 대학생을 통해 막연히 대학생의 실제모습을 가늠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처럼 현실과 재현 사이엔 어쩔 수 없이 왜곡이라는 틈이 있기 마련이다. 특히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재현의 경우 몇가지 유형을 보인다.

 일단 영웅 만들기의 신화를 들 수 있다. 요즘 연일 나오고 있는 실존인물의 재현에서 그 행적을 찾을 수 있는데, 이순신, 장보고, 역도산, 최배달을 비롯해 시·공간을 막론한 많은 인물들이 브라운과에서, 혹은 스크린에서 영웅적 기치를 발현하고 있다.

 ‘세계는 신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데 신의 의지를 대행하려면 인간을 지배하는 자’를 영웅이라고 한다. 이렇듯 신의 대리자로서 견고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영웅은 민중들의 틈바구니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한다.

사람들은 영웅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켜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고 점차 그에게 책임 지워지는 사회적 책무와 역할도 늘어나게 된다. 움베르트 에코는 슈퍼맨 신화를 통해 영웅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한다.

‘조직을 위한 개인의 특수성을 희생하는 산업사회에서 긍정적 영웅은 소박한 시민들이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만 있는 자립에의 열망과 권력에 대한 꿈을 다소 과다하다 싶을 정도로 한 몸에 체현하고 있어야 한다.’ 그가 바로 슈퍼맨이다. 과다하다 싶을 정도의 특징적인 성장 배경과 아낌없는 선행은 영웅의 필요조건을 충족시킨다.

 슈퍼맨 같이 가공할 만한 상상력 속에서 성장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우리사회의 영웅들도 사람들의 바람을 등에 업고 브라운관에 복귀했다. 하지만 영웅 만들기에 치중한 나머지 극 중 인물들의 캐릭터가 지나치게 단순화 되어 묘사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정의 구현에 앞장서며 앞에 놓여진 난관을 어떻게든 극복하는 모습은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영웅의 정형성을 보여준다. 이것은 주인공보다 오히려 악역의 인간적이고 다양화된 면모에 시청자가 열광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또한 현재 방영되고 있는 사극을 둘러싼 여러 공방들은 기본적으로 과거 인물, 혹은 현존인물의 지나친 미화와 관련되어 있다. 아예 영웅이란 타이틀을 앞세워 현대 경제사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던 드라마 <영웅시대>. 극적 전개를 보면 ‘그들만한 능력의 영웅이 나타나 또다시 이 나라를 재건해주기만 한다면’ 하는 바람이 자연스레 생긴다. 영웅 서사시의 본질은 과장과 상징화에 있다는 말이 허구가 아닌 셈이다.

‘판타지’적 요소도 하나의 흐름이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이야기를 재현하는 경우, 두 가지로 나눠서 설명할 수 있는데, 확실하게 기록되어진 역사를 재현하는 것과 사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자가적 상상력에 중점을 두고 극을 끌어가는 방식이 있다.

후자의 경우는 드라마 <다모>나 <대장금> 같은 퓨전 사극에 해당하는 것으로 실제 역사서에는 이름만 언급되어 있거나 단 한 줄 정도의 묘사만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을 가지고 하나의 완성된 그을 창작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이나 구성 면에 있어 제약이 거의 없는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사실’이란 단어 하나 만에도 각기 다른 네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다. 이 당의적 ‘사실’을 제대로 재현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재현을 논의할 때의 쟁점은 사실을 그대로 구현했는가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 밖에 엇는 재현과 사실 사이 차이를 어떻게 다루었는가에 있다.

데리다는 그 차이가 악용되는 것을 우려하며 ‘호혜’란 용어를 사용한다. 왜곡될 수 밖에 없지만 ‘재현’이 가지는 객관적 실체는 분명히 존재한다. 재현의 윤리를 기억하고 호도하지 말자는 의미다.

꼭 실제했던 역사적 사실을 다룬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구체화된 상황설정으로 웃음을 유발시키는 코메디 프로그램에서는 재현 정도가 더욱 인상적으로 나타난다. 짤막짤막하지만 많은 상황을 효과적으로 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녹화장은 순식간에군대가 되기도 하며, 금방 경찰서가 되고, 홈쇼핑 매장으로도 변하면서 시시각각의 상황에 따라 수많은 일상적 장소를 재현해 낸다. 그리고 그 안의 군인, 형사, 쇼호스트도 비록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저마다의 대표적인 특질을 드러내며 행동한다.

영화를 비롯한 이렇한 영상물들은 시각적 효과 때문에 어떤 재현 방식보다 인상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창작의 자유와는 별개로, 재현 윤리를 상기해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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