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를 감춘 정통 사극과 사극의 본질을 해친다는 비판에 휩싸인 퓨전 사극. 사극을 둘러싼 논의는 둘 중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쳐 있다. 한때 브라운관을 달군 사극의 전성시대는 다시 도래할 수 있을까. 사극의 재기를 둘러싼 논의의 장에서 화두에 오른 <고려 거란 전쟁>과 함께 역사와 콘텐츠라는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벌어지는 사극의 고민을 들춰봤다.  

  브라운관 위에 군림한 고려의 기상이여 

  얼마만의 일인가. 지난해 11월 공영방송 50주년 특별기획으로 <고려 거란 전쟁>이 방영됐다. 대하·정통 사극의 복귀는 방영 전부터 여론을 달궜다. 사극의 백화제방 시대를 지나 퓨전의 바람이 사극 시장을 물들이는 과정까지, 한국 사극에 부여된 과제가 과연 <고려 거란 전쟁>을 통해 해답을 얻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귀추가 주목됐기 때문이다. 최희수 교수(상명대 역사콘텐츠전공)는 퓨전 사극의 기조 속에서 대하·정통 사극의 부활이 지니는 의미를 설명했다. “대하·정통 사극은 막대한 제작비용 때문에 <장영실>을 마지막으로 방영이 중단됐습니다. 그러나 현재에 필요한 역사 인식을 함양해야 한다는 공영방송의 책임 의식과 퓨전 사극의 지나친 유행과 함께 불거진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곡해 논란이 번지면서 다시 대하 사극이 부활하는 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죠.” 

  간만의 정통 사극의 부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무색하게 <고려 거란 전쟁>은 방영 초기부터 호평을 거듭했다. 과거 지상파 전성시대 사극들의 인기에 비하면 소소한 편이나 <고려 거란 전쟁>을 통해 본 사극의 발전 가능성은 분명 유효했다. 전쟁을 모티프로 한 기존의 사극들과 달리 <고려 거란 전쟁>은 무엇이 달랐을까.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고려 거란 전쟁>이 단순 전쟁의 영웅담이 아닌 ‘반전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평가했다. “<고려 거란 전쟁>에서 강감찬은 탈출한 전쟁 포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합니다. 이는 장군인 그가 백성이 받는 고통에 진정으로 가슴 아파하는 한 명의 사람이었음을 강조하죠. 그런 강감찬은 섣불리 전쟁을 논하지 않아야 한다는 평화론을 외치는 동시에, 피치 못한 전쟁에 대해선 백성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어떻게든 전쟁을 승리로 끝내려는 자세를 보이는데요. 이처럼 강감찬의 입을 통해 전쟁 속에서도 평화의 중요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죠.” 조혜정 교수(예술경영학과)는 해당 드라마가 균형 잡힌 시각과 발견에서 오는 쾌감을 제공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고려 거란 전쟁>은 야율융서나 소배압을 오랑캐로 폄하하는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이들을 한 국가의 군주와 용장으로 그려내며 객관성과 균형 잡힌 시각을 담보합니다. 또한 조선시대 병법서인 『풍천유향』을 참고해 귀주대첩에서 등장하는 ‘검차’를 사실적으로 구현하고 배우들에게 국궁식 전통사법을 수련하게 하는 등 고증에 노력을 기울이며 드라마의 재미를 배가시켰죠.” 
 

은 공영방송 50주년 특별기획 대하드라마로 여요 전쟁 중 2차·3차 시기를 다룬다. 전쟁을 모티프로 한 기존 사극 드라마와는 달리 고려의 강감찬(좌)만큼이나 거란의 소배압(우) 역시 한 나라의 명장으로 묘사하는 균형 잡힌 시각을 내보인다. 사진출처 KBS
은 공영방송 50주년 특별기획 대하드라마로 여요 전쟁 중 2차·3차 시기를 다룬다. 전쟁을 모티프로 한 기존 사극 드라마와는 달리 고려의 강감찬(좌)만큼이나 거란의 소배압(우) 역시 한 나라의 명장으로 묘사하는 균형 잡힌 시각을 내보인다. 사진출처 KBS

  그에 가해지는 잣대를 거두리 

  찬사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방영 초기에 쏟아진 호평에도 불구하고 <고려 거란 전쟁>은 최근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최수웅 교수(단국대 문예창작과)는 <고려 거란 전쟁>을 둘러싼 왜곡 논란을 필두로 사극 콘텐츠에 가해지는 ‘고증’의 기준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고 전했다. “해당 드라마의 경우 32부작만으로 역사를 재현해야 했기에 캐릭터의 입체성을 살리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왜곡이라고 지적됐던 부분 중 일부는 현종이 유약한 인물로 설정됐고 전쟁보다 궐 안의 암투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었는데요. 왜곡이 작품의 결함으로 간주되려면 역사적 사실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그리는 경우여야 하지만, 앞서 언급한 논란 정도는 사극을 하나의 콘텐츠라는 관점에서 너그러이 바라보는 것이 유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사극의 바람직한 역할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고증’ 문제는 <고려 거란 전쟁> 뿐만 아니라 기존의 숱한 사극이 마주하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역사적 교훈’과 ‘재미’라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내기 위해 고증과 상상력의 저울에 명확한 무게추를 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최희수 교수는 적절한 수준의 고증은 대중들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상상력을 펼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학과 사극은 사건 A와 B 사이에 존재하는 전개 과정을 실증적으로 증명하거나, 상상력을 동원해 ‘있을 법한’ 일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대중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상상력이 가미돼야 한다는 의미죠. 이를 방증하는 일례로 <고려 거란 전쟁>에서 다룬 ‘최질의 난’은 분명히 존재했던 사건임에도 시청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요. 함께 반란을 도모했던 김훈이 최질에게 수모를 겪는 장면이나 가상의 인물 호장박진이 개인적 원한으로 황제를 습격하는 장면이 역사상 개연성도 없을뿐더러 대중들이 가능하다고 인식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상상력이 활용됐기 때문이죠.” 

  사극의 ‘공영성’을 둘러싼 양론도 고증만큼이나 뜨겁다. KBS 사극의 경우 ‘대하사극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양승동 사장의 발언처럼 역사 교육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대중성과 흥행성에 휘둘리지 않는 공영성을 갖춘 사극을 조명하는 견해는 통설로 자리했다. 그러나 최근 사극의 동향과 관련해 전문가들은 사극이 지닌 공영성의 가치는 단독으로 존립하긴 어렵다고 강조했다. 기경량 교수(가톨릭대 국사학부)는 사극 역시 콘텐츠라는 점에서 일차적으로 대중의 이목을 끌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일단 많은 사람이 보고 즐겨야 하는 콘텐츠의 특성상 흥행성과 대중성을 무시한 채 공영성만을 강조할 순 없습니다. 다만 역사의 충실한 재현도 충분히 흥미로운 콘텐츠라는 점을 제작자들이 알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죠.” 최희수 교수는 사극이 대중성을 확보해야 공영성의 본질도 이행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공영성과 대중성이 상호 대립하는 지점이라는 의견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일본의 NHK나 영국의 BBC 공영방송이 많은 비용을 들여 사극을 제작하는 이유도 공영성 이전에 사극을 향한 대중들의 수요가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역사학의 연구 성과들을 대중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전달함으로써 대중들의 역사 인식을 자연스럽게 키워나간다는 전제하에 공영성도 의미를 다할 수 있죠.” 

  사극의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렇다면 사극만이 가진 미학과 의의를 되살리기 위해 무엇에 주목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사극이 색다른 관점으로의 전환을 꾀할 수 있는 단초나 참신한 메시지를 도출할 수 있을 때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한 관점에서 지난해 방영된 드라마 <연인>의 의미는 특별했다. 해당 작품은 큰 틀에서의 역사 왜곡을 범하지 않으면서도 고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시대 배경과 인물 특징을 오마주하는 서사 전략을 취하며 많은 호평을 받았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연인>을 예시로 새로운 관점에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극의 의미를 강조했다. “<남한산성>처럼 병자호란을 다룬 기존 콘텐츠들은 왕이 겪은 수모와 치욕을 그린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연인>은 다릅니다. 군주가 아닌 당시 민초들이 겪은 고통에 초점을 맞췄죠. ‘도망간 임금보다 내 옆에 있는 임이 더 소중하다’고 말하는 지극히 민중적인 선비 남주인공은 조선시대에서 보기 힘든 인물입니다.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파기하며 현재에 와닿는 관점으로 서사를 풀어낸 점에서 뛰어난 사극이라 할 수 있죠.” 최희수 교수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의 단편을 재조명할 수 있는 사극의 가치에 집중했다. “<이산>과 <동이>에서는 각각 도화서 화원들과 장악원 악사들의 역할을 널리 알렸죠. 의미 있는 사극은 역사의 한 조각을 담당했던 인물들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합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비추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또한 사극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로 거론된다. 조혜정 교수는 우리의 현실과 맞닿는 사극의 가치에 주목했다. “사극은 역사의 대리 체험을 통해 시청자에게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렇기에 유의미한 사극은 현재와 공명하는 지점을 분명히 지니는데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말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헬릿 카의 표현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가늠하고 미래를 도모하죠. 사극 드라마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촉발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사극 드라마의 존재가치를 높이는 계기로 작용할 것입니다.”  

  기경량 교수는 오늘날의 현실과 맞닿는 메시지를 담는 것은 주의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현재에 유의미한 울림을 제공하는 것은 사극에 있어 매우 어려운 목표입니다. 만약 작가가 시대적 고민에 대한 수준 높은 견해를 갖추고 있다면, 선을 넘지 않는 고증과 재밌는 서사 아래 표방된 현재의 정치적 의제와 공동체적 가치관은 더없는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최수웅 교수는 사극의 현대적 메시지는 독자들의 주체적인 재해석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했다. “<사도>를 본 일부 시청자들은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이로 표상되는 사도 세자의 아픔에 공감하며 기대가 폭력이 되는 사회에 물음을 던집니다. 그렇기에 유의미한 메시지를 창출하기 위해선 제작 과정에서의 고민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의 통찰 또한 중요하죠.”  

  사극이 거닐어야 할 길에 명확한 선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의미 있는 사극을 위한 수없는 고민만이 실재할 뿐이다. 그러한 치열한 고민 속에서 사극의 가치를 빛내기 위해 내딛는 시도들은 어찌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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