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배경 속 낯선 옷을 입은 이가 읊조리는 낯선 말투. 사극은 경험하지 못한 시대로의 시간여행을 가능케 한다. ‘우리다운 것’을 드라마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사극은 분명 매력적인 장르다. 정통과 퓨전을 넘나드는 다양한 장르의 사극들이 앞다퉈 시청자들을 과거 속으로 초대한다. 역사를 표방하는 ‘K-사극’의 형태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떻게 모양새를 달리해온 걸까. 100부작이 넘는 대하 사극부터 허구를 섞은 퓨전 사극까지, 시대적 부름에 응답해 온 K-사극을 조명해 봤다. 

사극의 시작, 역사라는 소설을 펼치다 

  초창기 사극의 형태는 <조선왕조 오백년>·<용의 눈물>과 같이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정사 중심의 사극에서는 역사에서의 기록이 곧 작품의 결말이 되기 때문에 시청자에게 ‘스포일러’로 작용할 수 있다. ‘예측 가능함’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초창기 사극은 내정된 결말을 가능한 실감 나게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 김강원 강사(국어국문학과)는 초창기 정통 사극이 몰입감 있는 연출을 위해 시도한 방법으로 내레이션기법을 꼽았다. “초기 정통 사극 제작자들은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주로 내레이션 기법을 활용했습니다. 무게감 있는 남자 성우의 목소리로 역사적 사실을 읊는 내레이션을 통해 시청자들의 신뢰와 몰입을 동시에 얻어낼 수 있었죠.” 

  <조선왕조 오백년>의 경우 7년 가량에 걸쳐 방영된 정통 사극이자 대하 사극의 장르에 속하는 대표 작품 중 하나이다. 대하 사극이란 큰 강(大河, 대하)과 같은 역사를 짧으면 20부작, 길게는 100부작 정도의 장편 드라마로 다룬 장르를 말한다. 기경량 교수(가톨릭대 국사학과)는 <조선왕조 오백년>을 일례로 들어 대하 사극 장르의 정통 사극이 제작된 이유를 설명했다. “하나의 주인공으로 구성되는 일반적 소설과 달리 실제 역사는 수많은 인물이 얽혀 만들어내는 군상극입니다. 그렇기에 <조선왕조 오백년>처럼 실제 역사를 드라마로 구현하기 위해선 다양한 등장인물을 통해 긴 호흡의 여러 이야기를 긴밀히 엮어 전개하는 대하 사극이 적절하죠. 역사라는 하나의 흥미로운 소설을 영상화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왕조 오백년>의 방영을 끝으로 사극 방영은 잠시 공중파에서의 자취를 감춘다. 침체 상황을 반전시킨 변곡점은 <용의 눈물>이었다. <용의 눈물>은 거시사에 초점을 맞추던 사극과는 달리 인물 간의 미시사에 집중하는 흐름의 변화를드러낸다. 김강원 강사는 해당 작품의 초점이 위인의 업적에서 주요 등장인물의 개인적 측면으로 옮겨갔다고 말했다. “사극의 초점이 ‘왕(=용)의 업적’에서 ‘왕(=용)의 눈물’이라는 개인의 고뇌와 갈등으로 옮겨간 것은 사극이 연성화되는 흐름의 첫 발돋움이라 볼 수 있죠. 오래전 인물로부터 시청자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이유는 극의 핵심이 인물 간의 서사에있기 때문입니다. 개인 주체로서의 등장인물들이 맞닥뜨리는 희로애락에 동감하는 것이죠. 이는 시청자와 드라마 캐릭터사이의 거리감을 줄이고 등장인물이 실존하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만듭니다.”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사극의 백화제방’ 시대가 도래했다. <용의 눈물> 이후로 등장한 <태조 왕건>, <대장금>, <대조영> 등 긴 호흡의 사극이 안방극장에서 성공을 거두게 된다. 김민정 교수(문예창작전공)는 대중들의 시대적 요구와쇄신을 향한 열망에 대하 사극이 응답했다고 전했다.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한 대한민국은 특수상황이었습니다. 세기가바뀌며 경제적 환란(IMF)이 도래하고 정치적 격변기를 겪었죠. 새로운 시대를 향한 비전과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열망으로 뜨거웠는데요. 조선 최초 여자 어의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대장금>처럼 당대의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고 자기만의길을 개척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들의 이목을 끌기에 매우 흥미로운 서사였죠.” 

  하지만 대하 사극의 황금기도 2000년대 후반부로 서서히 저물게 된다. 기경량 교수는 대하 사극의 방영 비율이 줄어든이유로 제작 과정에서 겪는 경제적 어려움을 꼽았다. “대하 사극 한 편을 제작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많은 비용이 소모됩니다. 제작 기간이 길고 다수의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에 출연하는 배우가 많을 뿐더러 그만큼 역사 고증에도 많은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죠. 이는 제작자 입장에서도 부담이 되는 요소입니다. 심지어 사극이기 때문에 제작비를 확보하기 위한 협찬 광고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없죠.” 

현대인을 읽어낸 퓨전 사극 

  무게감 있는 대하 사극의 쇠퇴와 동시에 퓨전 사극은 사극계의 떠오르는 샛별로 자리매김했다. 퓨전 사극은 ‘사극’이라기보다 역사를 배경으로 허구의 이야기를 그린 ‘시대극’의 성격이 강하다. 진중한 대하 사극과 대비되는 특성을 지닌 만큼 시청자들에게 색다른 매력을 제공한다.  

  퓨전 사극이 부흥하게 된 요인으로는 사극을 바라보는 현대인의 감성 코드에 변주가 발생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드라마 제작 과정에서 반드시 시청자의 니즈를 반영해야 하기에 퓨전 사극은 해당 시대를 향유하는 대중의 지향을 표방한다. 오늘날 확산된 ‘스낵 컬처’ 풍조는 긴 호흡의 장편물보다는 가볍고 경쾌한 볼거리를 짧은 시간에 소비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경향을 나타낸다. 이러한 맥락에서 속도감이 빠르고 형식과 내용이 변화무쌍한 퓨전 사극은 현대인의 변화된 감성 코드와 적절하게 맞아떨어진다.  

  기경량 교수는 퓨전 사극의 자유로운 구성이 현대인의 감성을 적격했다고 설명했다. “퓨전 사극은 소재 선정과 서사 전개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만큼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 구성이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사극을 편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기에 시청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점이 장점이라고 볼 수 있죠.” 

  또한 김강원 강사는 퓨전 사극의 등장으로 변화한 시청자층에 대해 설명했다. “기존의 정사 중심 사극에서는 중장년층의 남성이 주된 시청자층이었다면 퓨전 사극의 경우 시청자의 폭이 남녀노소로 확대됐습니다. 퓨전 사극은 역사뿐만 아니라 사람을 다루는 이야기로 보편화됐는데요. ‘나라’만 구하는 것이 아닌 ‘사람’을 구하는 휴머니즘을 가미함으로써 멜로드라마적 성격이 강해졌다고 볼 수 있죠.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성격을 띠는 퓨전 사극은 대중에게 소비되기 좋은 콘텐츠가 될 수 있습니다.“ 

사진출처 넷플릭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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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넷플릭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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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은 좀비가 창궐한 조선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미스터리 시대극이다. '킹덤'은 OTT 플랫폼을 통해 국내외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트렌디한 퓨전 사극의 대표작이다. 사진 출처 넷플릭스 코리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은 좀비가 창궐한 조선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미스터리 시대극이다. '킹덤'은 OTT 플랫폼을 통해 국내외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트렌디한 퓨전 사극의 대표작이다. 사진 출처 넷플릭스 코리아

 

  공중파가 점유하고 있던 국내 콘텐츠 시장이 OTT 플랫폼의 판도로 전환된 현상 또한 퓨전 사극의 인기를 한층 더 증가시킨 배경적 요인이다. 실제로 넷플릭스에서 방영되는 퓨전 사극이 국내외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킨 바 있다. 조선시대 역병을 소재로 한 좀비를 등장시킨 사극 <킹덤>이 대표적인 사례다. 

  허인욱 교수(한남대 사학과)는 <킹덤>이 조선 몇백 년의 역사를 조화롭게 압축시켜 그 안에서의 인물 간 갈등이 내밀하게 표현된 점을 우수하게 꼽았다. “<킹덤>은 시대상을 잘 녹여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전후 300~400년의 역사를 한 시점에 녹여내 전달했는데요. 서사 속에 존재하는 정치적 다툼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인물들 간의 대사를 통해 암묵적으로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제작 과정에서 세밀한 부분을 철저히 신경 써 작품의 완성도를 제고했다는 것 또한 차별점이다. 허인욱 교수는 <킹덤>이 세세한 역사적 고증에 굉장한 노력을 들인 작품이라 평했다. “당시 금군이 착용한 갓과 융복뿐 아니라 병사들의 환도패용법은 기존의 드라마에 비해 섬세하게 고안됐습니다. 이러한 고증의 결실은 작품의 질을 배가시키고 시청자가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죠.” 

사극에 남겨진 숙제는 

  하지만 일각에서는 퓨전 사극의 성행 이면의 시청률 만능주의를 향한 우려의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이산>의 경우한때 시청률이 하락하자 동일 방송사의 인기 오락프로그램인 <무한도전> 출연진을 카메오로 출연시켜 눈총을 받기도 했다. 

  기경량 교수는 과도한 수익성에 대한 집착을 경계해야 한다고 전했다. “드라마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상품이기에 광고주유치 등 제작비 확보 목적의 수익을 좇는 것 자체를 문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수익성에만 집착하다가 작품의 완성도가 망가진다면 결국 사극 장르의 멋을 되살리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콘텐츠 시장에서도 성공하기 어렵죠.” 

  퓨전 사극의 등장은 사극이라는 장르의 포용성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시청자들로 하여금 유쾌한 서사를 맛보는 재미를안겨줬다. 그러나 정통과 퓨전을 넘나들며 다양하게 방영되던 사극의 폭이 오히려 좁아지고 있다는 문제 또한 제기되며역사를 담아내는 사극 콘텐츠의 필요성도 재논의되는 시점이다. 기경량 교수는 퓨전 사극과 정통 사극 간 균형 있는 발전이 긴요하다고 전했다. “퓨전 사극의 발전도 의미 있지만 시대를 담은 진중한 사극이 지니는 가치도 중요합니다. 퓨전 사극과 정통 사극이 공존하는 형태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죠. 위인전이나 영웅 일대기 같은 내용 전개를 넘어 인간의 입체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나올 필요가 있어요. 제작 초기부터 다수의 역사 연구자가 협력해 참된 역사 재현물로서의 사극이 탄생하길 바랍니다.” 

  역사라는 장르의 매력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시청자들이 응답할 수 있는 사극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사극을 둘러싼논란이 계속되는 지금, 사극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지속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때를 달궜던 ‘사극 불패’의 발전된 영광은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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