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브로는 ‘시네마’와 ‘시나브로’를 합친 단어입니다. 시나브로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의미를 지니는데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 극장·예술계는 조금씩 변화의 흐름이 생겨나고 있죠. 이번 주 문화부는 2023 서울국제공연예술제 SPAF(Seoul Performing Arts Festival)를 통해 공연예술의 현재와 미래를 들여다봤습니다. 예술과 기술의 만남부터 환경 및 젠더 문제까지 오늘날 공연예술의 트렌드는 어떠할까요. 국내 최대 규모의 공연예술제인 2023 SPAF의 현장으로 함께 가보시죠.진수민 기자 susky@cauon.net

 

“무한 성장의 화살이 선선히 쪼개져 가는 지금, 성장으로 계속 달리기보다는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균형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희는 이렇게 익명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공감하는 연극의 힘을 믿습니다.”  -전윤환 공연연출가 



우리 사회가 시나브로 변화하듯, 공연예술계도 시나브로 변화 중이다. 여기 공연예술계의 변화를 선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 SPAF (Seoul Performing Arts Festival)를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이 그 주인공이다. 10월 6일~10월 29일 총 24일간 국내 최대 규모와 역사의 국제공연예술축제인 2023 SPAF가 개최됐다. 올해는 총 19개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29일 문화부는 아르코예술극장에 방문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열기를 체험했다. 

연극 '에너지_보이지 않는 언어'는 관객이 무대 위 단어를 직접 재배열함으로써 다른 관객과 함께 기후 언어를 완성하고 더 나은 에너지 구조를 모색하도록 하는 관객 참여형 연극이다.사진제공 옥상훈
연극 '에너지_보이지 않는 언어'는 관객이 무대 위 단어를 직접 재배열함으로써 다른 관객과 함께 기후 언어를 완성하고 더 나은 에너지 구조를 모색하도록 하는 관객 참여형 연극이다.사진제공 옥상훈

 


  타인과 함께 완성한 기후 언어 

  29일 오후 3시 대학로에 위치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연극 <에너지_보이지 않는 언어>가 열렸다. 극장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익히 볼 수 있는 무대의 모습도, 관객의 모습도 아니었다. 무대 바로 앞에는 좌식 객석이 있었고 단 두 줄의 객석이 원형으로 무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입장한 관객들은 곧바로 좌석으로 향하지 않고 자유로이 무대 안 연극 소품을 구경했다. 종이 박스를 잘라 만든 카드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속가능성’, ‘에코파시즘’ 등 기후 관련 단어부터 ‘2위’, ‘더 이상’ 등 일상적 단어가 적힌 카드. 그리고 수많은 단어 카드 중간중간에 놓인 종이로 만든 화력발전소·풍력발전소·태양광발전소·원자력발전소 모형들. 기후 위기를 다루는 연극인 만큼 대부분의 소품은 박스를 재활용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카드를 찬찬히 훑어보는 학생부터 멀리서 이들을 지켜보는 중년의 관객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극장을 가득 채울 때쯤 연극은 시작됐다. 공연에는 지연과 전환 두 인물이 등장했다. 기후변화 적응 연구자인 지연과 희곡을 쓰고 연극을 연출하는 전환. 두 인물은 각자 자신을 소개한 후 곧바로 관객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공연 초반 전환은 말했다. “오늘 우리는 단어와 단어, 무대와 객석, 극장과 현장을 연결하고 미래를 상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에너지_보이지 않는 언어>의 연출·출연을 맡은 전윤환 공연연출가는 연극에서 관객 간의 의사소통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기후 위기는 한 국가 또는 한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협의하는 것이 중요하죠. 이러한 소통 과정을 연극에서도 구현하고자 관객 참여가 가능하게 했어요.” 


  관객들은 무대 중앙에 나가 저마다 하나씩 기후 관련 단어를 선택했다. 선택한 단어는 연극 안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불렸다. 지연이 딜레마를 고른 관객에게 그 단어를 고른 이유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딜레마님, 딜레마를 뽑으신 이유가 따로 있으실까요?” 관객은 부끄러운 듯 작은 목소리로 딜레마를 고른 이유를 설명했다. “기후 위기에 관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이 많았거든요.” <에너지_보이지 않는 언어>의 작가로 참여하고 출연한 김지연 연세대 기후적응 리빙랩 연구사업단 연구원은 사람들이 기후 관련 단어를 친숙하게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기후 관련 단어를 찬찬히 살펴보면 정치·경제적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후 위기를 전문가가 해결해야 할 영역이라고 착각하죠. 단어 자체가 어려워 기후 위기에 대한 장벽이 생기는 거예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자 이 연극에서는 관객이 직접 멀게만 느껴지는 기후 관련 단어를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활동을 수행합니다.” 


  자신이 고른 단어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이 끝나자또 다른 미션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대 중앙에 흩어져 있는 4개의 발전소 중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단어와 어울리는 발전소를 찾은 후 그 앞에 자신의 단어를 두는 미션이었다. 잠시 후 풍력발전소 주변에는 ‘다양성’·‘상상력’·‘깨끗함’ 등의 긍정적인 단어가, 원자력발전소 주변에는 ‘딜레마’·‘위험한’ 등의 부정적인 단어가 놓였다. 발걸음을 옮겨가며 단어를 둘러보던 전환은 태양광발전소 앞 ‘믿음’에 주목한 후 관객에게 질문을 던졌다. “‘믿음’을 태양광발전소 앞에 두신 이유에 대해 알려주실 수 있나요?” 관객들은 이제 머뭇거리지 않고 자신감 있게 단어와 자신이 고른 발전소 간의 연관성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친환경 에너지가 기후 위기의 구원투수가 되어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에 대한 의문이 들어 태양광발전소 앞에 ‘믿음’을 뒀어요.” 


  공연이 후반부에 들어서자 관객과 무대 사이 소통을 넘어 관객 간의 소통도 이뤄졌다.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십여 명의 관객이 하나의 그룹을 이뤘다. 그리고 기후 관련 카드를 활용해 하나의 문장을 완성해 갔다. 어색함도 잠시 관객들은 ‘기후’라는 공통된 관심사 하나로 서로 머리를 맞대며 문장을 만들고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 결과 ‘에너지 주권을 우선 회복해야 한다’, ‘청정한 자연의 권리·탈탄소·다양성을 위한 새롭고 힙한 대안은 어디에 있을까’ 등 각양각색의 기후 위기 관련 선언·질문·구호가 탄생했다. 문장을 완성해나가는 현장은 치열한 공론장을 연상케 했다. 전환은 연극을 마무리하며 연극이 지닌 힘에 대해 강조했다. “저희는 이렇게 익명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공감하는 연극의 힘을 믿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 극장을 둘러보던 임효연씨(23)는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기후 위기 문제가 피부로 와닿는 시간이었다고 전했다. “기후 위기가 하나의 정보·글자·숫자로만 다가오던 날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고른 단어로 문장을 만들고 또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기후 위기는 우리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문제라는 것을 체감했어요.” 강건일씨(25)는 전통적인 연극 형식을 취하지 않은 점이 능동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했다고 말했다. “기존의 연극 형식을 파괴한 이 연극은 연극 도중 제가 직접 움직이고 사고해야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특히 사전적 언어를 제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기후 위기는 지금 우리가 처한 문제이자 함께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죠.” 

연극 '베케트의 방'에는 배우가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베케트의 방이라는 단일한 공간 내에서 오직 사물의 움직임과 헤드폰을 통해 들리는 소리만으로 극이 진행된다. 사진출처 SPAF 홈페이지
연극 '베케트의 방'에는 배우가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베케트의 방이라는 단일한 공간 내에서 오직 사물의 움직임과 헤드폰을 통해 들리는 소리만으로 극이 진행된다. 사진출처 SPAF 홈페이지

 


  지극히 개인적인 베케트의 이야기 

  29일 오후 4시에는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예술과 저항’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 <베케트의 방>이 무대에 올랐다. 작가 사무엘 베케트와 파트너 수잔의 불안과 저항, 치열한 고민이 ‘베케트의 방’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묘사된다. 은 프랑스 레지스탕스에서 두 인물이 맡은 역할뿐만 아니라 전쟁의 영향을 받은 당시 유럽의 모든 이들의 삶을 다룬다. 


  대극장 문을 열고 들어가니 커다란 눈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연극이 시작하기 전 극장은 관객에게 헤드폰을 착용할 것을 당부한다. “헤드폰을 써주세요” 헤드폰을 쓴 관객들은 잠시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스크린 속 커다란 눈이 뜨이자 연극이 시작됐다. 커다란 눈 그리고 헤드폰. <베케트의 방>은 관객의 눈과 귀에 집중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에서 개인의 시선으로 베케트의 이야기를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올해 SPAF의 마지막 작품으로 <베케트의 방>을 택한 홍승현씨(24)는 스크린 속 눈과 베케트의 방이라는 단일한 배경이 인상 깊었다고 전했다. “커다란 눈이 공연 중간중간 계속해서 등장해요. 공연 내내 베케트의 방 안에서 사건이 진행되죠. 개인의 눈으로 베케트 개인의 방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바라보도록 한 것이 가장 흥미로웠어요. 제2차 세계대전 속 고독한 상황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장치라고 생각했습니다.” 


  무대 위에는 배우가 없다. 눈에 보이는 배우는 없어도 담배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주전자의 물은 끓는다.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은 육체의 부재를 통해 관객에게 새로운 신선함을 주고 이를 인물이 아닌 배경과 상황에 집중하는 장치로 사용한다. 공연을 관람한 이수빈씨(21)는 <베케트의 방>이 지니는 독특한 형식이 몰입에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배우가 없는 공연은 처음이에요. 헤드폰을 통해 공연의 소리를 듣는 공연도 처음이죠. 특이한 형식에 이끌려 공연을 관람하게 됐는데, 헤드폰을 통해 소리와 대사에 집중하다 보니 전쟁 속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물들의 상황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올해로 23회를 맞은 2023 SPAF의 현장 속에는 다양한 시도로 연극의 지평을 넓히는 이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에너지_보이지 않는 언어>와 <베케트의 방>은 앞으로도 계속될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행보를 기대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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