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백(Aside)은 연극 용어로 ‘인물이 관객에게 하는 말’을 의미합니다. 인물의 곁에서는 듣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관객에게만 들리는 말이죠. 사회를 하나의 무대로 본다면 어떨까요. 이번 학기 중대신문 사회부는 우리 사회라는 무대 위, 누구도 들어주지 않아 방백을 할 수밖에 없던 인물들을 조명하려 합니다.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이 극의 관객이 되어주시겠습니까? 응하셨다면 이번 주는 ‘법외 가족’으로 열어보려 합니다. 끝까지 꼭 자리를 지켜주세요. 이제 시작합니다. 김지우 기자 eraser@cauon.net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세 살 터울의 언니 김세연씨(35)와 미국 뉴욕에서 혼인 신고를 한 김규진씨(32)는 지난 6월 국내 레즈비언 커플 중 처음으로 인공수정을 통한 임신 사실을 공개했다. 결혼부터 임신 그리고 출산까지, 그저 다른 사랑의 형태를 향한 세상의 시선에 정면으로 맞선 이들을 만나봤다. 

  -국내 최초로 동성 부부의 임신 사실을 밝혔다. 
“언니와의 결혼 생활이 너무나 행복했기에 아이를 기른다면 좋은 부모가 될 것이라 확신했어요. 사실 임신을 결정하는 과정 자체보다 이를 알리는 일이 더 힘들었는데요. 저희의 사례를 알림으로써 조금이라도 빠른 사회의 인식 변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동성 배우자와 국내법상 가족이 아니기에 겪는 현실적 어려움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세관신고서를 작성했는데 동행 가족 수를 ‘0명’이라 쓸 수밖에 없었어요. 극단적으로는 아내가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 전 아내의 법적인 보호자로서 문서에 사인조차 하기 어려웠죠. ‘자매라고 거짓말을 해야 하나’ 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법적 문서를 작성할 때마다 마주하는 현실과 법 사이의 괴리가 큰 좌절감으로 다가와요.” 

  -한 달 전 즈음 태어난 아기(라니)를 키우는데 우려되는 점이 있다면. 
“법적 문서에는 저만 라니의 법적 부모로 명시되고 언니는 세대주이자 동거인으로 등재됐어요. 우리가 아이의 부모라는 법적인 증빙이 불가능하니 아이와 저희 부부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 그저 사회의 선의에 기대야 한다는 점이 걱정돼요. 예를 들어 아내가 어린이집으로 라니를 데리러 갈 때면 어린이집에서 저희의 상황을 이해해 주길 바랄 수밖에 없겠죠. 나중에 제가 죽게 된다면 라니의 친권이 아내에게 갈 방법은 있을까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위해 필요한 변화는. 
“다양하게 실존하는 가족의 형태를 인정하고 보호할 방법을 국가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민의 삶에 맞춰가는 법과 제도를 위해선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라니가 어떤 세상에서 자라나길 바라는지. 
“여러모로 안전한 세상에서 살아갔으면 해요. 신체적으로 안전할 뿐만 아니라 저희처럼 동성 부부라는 이유로 공격받지 않는, 그런 다양한 선택지를 포용하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사진제공 김규진
사진제공 김규진

 

 

나는 당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지만

삶의 목적성에 따라 결혼이 아닌 ‘비혼’을 택한 커플들도 존재한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랑하는 이와 동거를 이어왔던 박미은씨(36)와 현재도 이를 지속해 가는 정송이씨(31)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비혼 동거 생활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정송이: “결혼과 동거 중 동거를 선택한 양자택일식의 결정을 한 건 아닙니다. 서울에서 거주할 적당한 집을 찾는 과정에서 현재의 남자친구와 함께 살기로 했어요. 다만 함께 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결혼까지 진행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을 뿐이죠.” 
박미은: “당초 각자의 원룸에 살던 애인과 저는 월세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동거하기 시작했어요. 이를 기점으로 대전부터 서울, 부산까지 비혼 동거 생활을 이어갔죠. 점차 직장을 얻고 자리를 잡아가며 서로에게서 재정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관계에 있어 비혼 동거만이 갖는 장점은 무엇인지. 
정송이: “‘연인과 나’ 외에 아무도 우리의 관계에 관여돼 있지 않아요. 결혼은 상대의 가족과 이들의 관습까지 내 삶에 유입되는 것이지만 이를 세심하게 조율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봐요. 반면 비혼 동거는 연인과 생활 방식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비전까지 공유하고 조율해 갈 수 있죠. 제 속도에 맞게 타인과 삶을 엮어가는, 자연스러운 공생을 할 수 있답니다.” 

  -아직 비혼 동거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은데. 
정송이: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산다는 사실만으로 서로에 대한 신뢰나 책임감을 의심받을 때 기분이 좋진 않아요. 저희를 가벼운 관계로 치부하고 결혼하지 ‘못한’ 하자가 있을 거라고 단정하는 시선이 불편하죠.” 
박미은: “저는 남성으로 사는 애인보다 여성인 제가 조금 더 차별적인 시선들을 많이 받는다고 느꼈어요. ‘그러다 헤어지면 시집 못 간다’와 같은 말들을 더러 듣기도 했죠.” 

  -동거로 맺어지는 가족을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정송이: “제도 밖의 다양한 가족이 늘어간다는 건 전통적인 가족 형태가 더 이상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게 아닐까요. 서로만큼은 책임질 수 있는 사람과 삶의 기반을 다져갈 권리는 가치관에 의해 제한받지 않도록 가족의 정의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지길 바라요.” 

사진제공 정송이
사진제공 정송이

 

친구, 가족의 또 다른 이름

‘친구 같은 가족’과 달리 ‘가족 같은 친구’는 현실적으로 멀기만 한 이야기다.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가족처럼 친구와 함께 동거를 경험했던 수련씨(24)와 현재도 이를 이어가는 권나민씨(24)의 삶을 들여다봤다. 

  -친구와의 동거 생활을 결정한 이유는. 
수련: “두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요. 대외적인 이유는 나와 같은 지향점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아갈 때의 힘을 경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원가족으로부터 분리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가족의 경험이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저는 원가족에게서 제가 필요로 하는 정서적인 돌봄을 받을 수 없어서 감정적인 상처나 박탈감을 많이 느꼈는데요. 하지만 혼자 사회에 나온다고 한들 주거비와 생활비를 감당하기 만만치 않은 현실이잖아요.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 이후 6명의 친구들과 3개의 방이 있는 집을 구해 함께 생활하게 됐죠.” 

  -동거 생활을 하며 체감했던 현실적인 어려움은. 
수련: “제가 아팠을 때 함께 동거하는 친구들은 제 진료 비용을 대신 수납하거나 관련 서류를 작성할 법적 자격이 없어 힘들었던 경험들이 생각나요. 사회적인 시선과 관련해서 난감했던 적도 있었는데요. 제가 함께 동거하는 친구들은 남녀 혼성으로 6명이다 보니 집을 계약하기 전에 취소됐었던 적이 3~4번 정도 있었어요. 그저 지향하는 삶의 방식이 맞는 친구들일 뿐인데 편견 어린 시선이 아직도 크게 자리하는 것 같습니다.” 

  -현재 가족의 정의가 갖는 문제점은. 
권나민: “전통적인 가족 개념은 관계에서 발생하는 비대칭성을 간과한다고 생각해요. 예컨대 부모와 자식은 합의에 따라 형성된 관계가 아니라 일방향적인 역학에서 형성된 관계이기에 위계나 가치관의 불일치, 학대를 비롯한 비대칭적 갈등이 존재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현재 법에 정의된 가족 관계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그저 견딜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위해 필요한 사회적 변화는. 
권나민: “여러 사회 단위가 함께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요. 시민단체나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새로운 주거권에 대한 상상을 실천하는 것도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요. 또한 시민연대 형식의 제도 도입 이후에도 논의 주체들이 가족에 대한 의미를 꾸준히 재고해야 하죠.”

사진제공 권나민
사진제공 권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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