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영국 ‘펀치드렁크’ 극단의 연극 '슬립 노 모어'로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기 시작한 이머시브 연극은 현재까지 다양한 소재와 형식으로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 기존 연극과는 확연히 다른 매력을 지닌 이머시브 연극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이머시브 연극의 발자취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따라가 보자. 
 

영국 ‘펀치드렁크’ 극단이 제작한 '슬립 노 모어'의 관객은 호텔 안 100개의 방 중 어떤 장소에서 연극을 관람할지 스스로 정할 수 있다.사진출처  펀치드렁크
영국 ‘펀치드렁크’ 극단이 제작한 '슬립 노 모어'의 관객은 호텔 안 100개의 방 중 어떤 장소에서 연극을 관람할지 스스로 정할 수 있다. 사진출처 펀치드렁크

 

  다시 돌아온 관객 참여형 공연 

  ‘연극’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일반적으로 배우가 침묵한 객석을 향해 이야기를 쏟아내는 형식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최초의 연극은 오히려 이머시브 연극과 유사한 형태였다. 이대영 예술대학원장(공연영상학과 교수)은 처음부터 연극 속 관객과 무대가 완전히 분리되진 않았다고 설명했다. “본래 연극은 제사 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제사 의식은 관객과 배우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함께 참여하죠. 의례 형식을 지나 연극이 점차 발전하면서 관객과 무대가 분리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1960년대 다시 관객과 무대가 하나 된 연극이 비주류 형태로 등장했습니다. 극장 밖으로 탈출하는 대안 연극이 그 예죠. 미국의 ‘빵과 인형’ 극단이 선보인 연극에서는 관객이 직접 빵과 인형을 만들고 배우로서 극의 진행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관객을 연극에 참여시키려는 시도는 전부터 있어왔으나 ‘이머시브’라는 명칭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21세기 초 관객과 무대 사이 경계를 없앤 공연이 ‘이머시브’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면서 극장가에서 이머시브 연극은 하나의 뚜렷한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전지니 교수(한경국립대 브라이트칼리지)는 이머시브 연극의 시작점으로 2003년 영국 ‘펀치드렁크’ 극단의 '슬립 노 모어'를 소개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기반한 '슬립 노 모어'는 대략 100개 내외의 공간으로 구성된 건물 안에서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관객이 자신의 취향과 판단에 따라 배우를 따라다니거나 한 공간에 머무르며 능동적인 감상 주체가 되죠. 이 작품은 대중적 성공을 거두면서 현재까지 공연을 이어가고 있어요. 한국에서는 2015년 추리극 '쉬어매드니스'가 흥행하면서 이머시브 공연이 자리 잡게 됐습니다.” 


  나만의 경험으로 채우는 연극 

  21세기 초 이머시브 연극이 주목받기 시작한 배경에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있다. 변혁 트랜스미디어연구소장(성균관대 영상학과 교수)은 1인 미디어의 등장과 이머시브 공연의 상관관계에 주목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콘텐츠 생산·유통·소비 체계의 쌍방향적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스마트폰 등을 통한 모바일 소통이 익숙해진 현대인은 다양한 1인 미디어를 통해 콘텐츠를 생산하기도 하죠. 대중이 공연 콘텐츠를 소비할 때도 일방적 수용이 아닌 참여적 소통에 관심을 두는 추세에요.” 전지니 교수는 이머시브 연극이 기존의 연극에 익숙지 않은 대중을 극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이 될 수 있다고 전했다. “게임의 문법에 익숙한 젊은 관객은 수동적으로 극장에 머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상황에 맞춰 본인의 자율성을 발휘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죠. 이머시브 공연은 이러한 대중을 새로운 관객으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기존 연극과 이머시브 연극의 차이는 관객 개개인의 측면에서 바라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권호창 연구교수(성균관대 트랜스미디어연구소)는 이머시브 연극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으로 ‘개인화된 공연 경험’을 꼽았다. “많은 이머시브 연극은 관객에게 서로 다른 역할을 부여합니다. 관객은 관찰자보다는 참여자로 공연을 경험하기 때문에 집단으로 공연에 참여했더라도 연출가의 의도대로 각기 다른 경험을 하게 되죠.” 이대영 원장 또한 관객이 자신만의 경험을 지니는 현상을 강조했다. “이머시브 연극은 단순히 관객 참여 여부를 따지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어떻게’ 참여하느냐에 방점을 두죠. 이머시브 연극에서 관객은 극에 참여하되 개개인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공연을 감상할 수 있어야 해요. 관객이 같은 연극을 보더라도 체험의 영역이 각기 달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의 작품을 얼마든지 다각도로 해석할 수 있는 길이 열렸어요. 핵심은 이머시브 연극이 높은 개별성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나’만의 경험을 갖게 한다는 것이죠.” 


  단순한 관객 참여형 연극이 이머시브 연극이라 불리는 시대는 지났다. 이머시브 연극을 만드는 연출가는 ‘관객 참여’라는 수단을 통해 관객 개개인에게 어떤 경험을 선사할 수 있는지까지 고려해야 한다. 전지니 교수는 관객 참여의 의미에 관해 깊은 고민을 담은 작품으로 연극 '버닝필드'를 들었다. “연출가는 공연에 참여하는 행위가 관객에게 무엇을 남길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 합니다. '버닝필드'는 참사 현장에 나가는 소방관의 PTSD에 대한 극으로 초연부터 이머시브 방식을 차용했어요. 무대와 객석이 분리되지 않은 공간에서 관객은 재난 상황과 배우들을 따라 움직여야 하죠. 또 관객은 사망한 소방관을 애도하는 과정에 참여해 사건의 ‘당사자’로서의 감정을 느낄 수 있어요.” 


  이머시브에 VR을 더하다 

  최근의 이머시브 연극은 무대와 객석 사이의 경계를 지우는 데 그치지 않고 있다. 무대의 범위는 객석을 넘어 가상 세계까지 넓어졌다. 전지니 교수는 근래의 연극이 가상현실(VR)이나 메타버스 등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 관객의 참여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머시브 연극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 공연과 게임의 경계 등 다양한 경계를 지워가고 있습니다. 이는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통해 감각의 범위를 넓혀가는 노력의 일환이에요. 새로운 장르와의 교섭을 통해 공연의 범위를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죠.” 

현실과 가상 공간을 넘나드는 VR 이머시브 연극 '고스트 인 더 씨어터'는 극의 장면에 따라 적절한 감각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관객의 몰입을 극대화했다.사진출처 프로젝트 밈
현실과 가상 공간을 넘나드는 VR 이머시브 연극 '고스트 인 더 씨어터'는 극의 장면에 따라 적절한 감각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관객의 몰입을 극대화했다. 사진출처 프로젝트 밈

 


  변혁 소장은 이머시브 연극에 VR을 접목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전했다. “‘이머시브’라는 용어 자체가 관객이 허구 세계에 즉각적으로 몰입하도록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머시브 연극에 가상현실 기술을 적용하는 것은 ‘이머시브’를 효과적으로 실현하는 방안이죠. VR 기술은 가상의 정보를 통해 관객이 현실 세계의 경험에 집중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권호창 교수는 코로나19가 이 같은 변화를 가속하는 데 한몫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기술 활용은 현대 이머시브 연극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입니다. 기술·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이머시브 연극은 예술 공간을 확장해 나가죠. 이러한 변화를 가속한 결정적인 요인에는 코로나19가 있었습니다. 공연 연출가나 관객 역시 환경 변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요. 기술·미디어·예술·관객의 개념과 관계가 지속해서 변화하고 있고 이머시브 연극은 이러한 변화를 예민하게 포착했습니다.” 


  이대영 원장은 앞으로 이머시브 연극이 VR 활용 그 이상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예견했다.“언젠가 우리는 코로나19 같은 팬데믹을 또다시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반복되며 사람과 사람 간의 접촉보다는 연결이 더 중요한 시대로 점점 변화할 테죠. 접촉 없이도 세상과 연결되기 위해 기술은 엄청나게 발달하고, 이에 따라 이야기 구조와 연극 참여 형태도 계속해서 바뀔 것입니다.” 


  이머시브 연극이 나날이 더 빛나는 이유에는 시대 흐름을 면밀히 따라가려는 공연 기획자들의 노력이 숨어있다. 이머시브 연극 기획자는 관객 스스로 의미 있는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다양한 연출 방안을 고안해 왔고, 오늘날에는 ‘VR’이라는 해답을 찾았다. 앞으로 다가올 세상 속 이머시브 연극은 또 다른 혁신적인 방법으로 관객을 극의 일부로 끌어들여 우리의 몰입을 도울 것이다. 오롯이 나만의 경험을 가능케 하는 이머시브 연극으로 당신의 발걸음을 옮겨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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