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브로는 ‘시네마’와 ‘시나브로’를 합친 단어입니다. 시나브로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의미를 지니는데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 극장·예술계는 조금씩 변화의 흐름이 생겨나고 있죠. 이번 주 문화부는 로맨스 클리셰의 역사와 흐름을 들여다봤습니다. 2022년 영화 <20세기 소녀>부터 2023년 드라마 <킹더랜드>까지, 최근 등장하는 작품들은 ‘클리셰 범벅’이라는 평이 쏟아지고 있는데요. 알면서도 보게 되는 클리셰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진부함과 익숙함 사이에서 보는 이들을 사로잡기 위해 줄타기를 하는 로맨스 클리셰의 양상을 함께 살펴봅시다. 진수민 기자 susky@cauon.net

“로맨스물의 클리셰 중 하나인 신데렐라 서사는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의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를 극복합니다. 기회의 평등, 신분 상승의 가능성, 성실과 정직이 보상받는 체계가 부족한 사회에서 신데렐라 서사는 따뜻한 위로를 전하죠.”-박명진 교수(국어국문학과)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오만과 편견>은 남자 주인공 다아시와 여자 주인공 엘리자베스의 운명적 사랑을 담고 있다. 소설 <오만과 편견>은 고전 클리셰의 대표주자로 평가받는다.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남녀 주인공이 비를 뚫고 달려와 서로를 마주한다. “사랑해요. 열렬히요.” 남자 주인공 다아시는 여자 주인공 엘리자베스에게 담백하고도 강렬한 사랑 고백을 전한다. 영화 <오만과 편견>의 한 장면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처음부터 이토록 로맨틱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해로 인해 다툼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서로에게 끌리는 감정은 갈수록 강해져만 갔다. 서로를 혐오하는 관계에서 시작되는 로맨스를 일명 ‘혐오 관계 로맨스’라 부른다. 혐오 관계 로맨스는 로맨스물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클리셰 중 하나로 현재까지도 다양한 로맨스물에서 활용되고 있다. 영화 <오만과 편견>부터 드라마 <킹더랜드>까지 로맨스물은 어떻게 유사한 흐름의 서사 구조를 지닐 수 있었을까. 로맨스물의 클리셰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클리셰는 어디에서 출발했나
  클리셰(Cliche)는 진부한 표현이나 고정관념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현대에는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진부한 장면이나 판에 박힌 대화, 상투적 줄거리와 전형적인 수법·표현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수사극, 역사극, 코미디 등의 장르에는 저마다의 다채로운 클리셰가 존재한다. 그중 로맨스 클리셰는 사랑과 애정의 서사를 담는다는 점에서 특유의 매력을 지닌다. 

  박명진 교수(국어국문학과)는 장르에 기반해 클리셰의 특성을 이야기했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취향과 욕망이 서로 일치할 때 장르가 형성되고 이에 맞춰 클리셰가 유통됩니다. 수사극·역사극·SF·코미디 등은 각자의 장르별 클리셰를 사용하죠. 그중 로맨스 클리셰의 재미는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 장애물 앞에 흔들리다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전형적인 구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로맨스 클리셰는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고전문학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현대의 로맨스 클리셰와 유사한 서사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이명현 교수(국어국문학과)는 한국 고전문학의 사랑 이야기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서사 구조가 자연스럽게 현대의 로맨스 클리셰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남녀의 애정 갈등이 주된 이야기를 이루는 작품에는 <숙향전>, <숙영낭자전>, <채봉감별곡> 등이 있어요. 모든 작품에서 동일한 서사 구조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천생연분, 초월적 조력자에 의한 낭만적 문제 해결, 이별 이후 운명적 만남 등이 포함된 작품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춘향전>의 변사또와 같이 주인공을 방해하는 인물도 흔하게 등장해요. 한편 주인공의 예외성이나 특별함을 보여주는 출생의 비밀은 신화가 기원이라고 볼 수 있죠. 이러한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현재의 로맨스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윤석진 교수(충남대 국어국문학과)는 현대 로맨스물의 모티프를 과거 문학 작품에서 찾았다. “로맨스는 중세 유럽에서 형성된 문학 장르입니다. 18세기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오만과 편견> 같은 고전 로맨스 소설에서도 로맨스물의 클리셰를 찾아볼 수 있죠. 과거의 로맨스물이 현재 로맨스 클리셰에 모티프가 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다만 윤석진 교수는 특정한 작품을 로맨스 클리셰의 기원으로 보는 시각에는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과거의 드라마나 영화들이 로맨스 클리셰의 모티프가 된 것은 맞지만 특정한 드라마나 영화가 기원이 됐다고 단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김민영 교수(교양대학) 또한 특정 문학 작품의 경향성이 기원이 되어 클리셰로 굳어진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사랑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로맨스라는 장르의 기원을 따지고, 로맨스 클리셰의 기원을 특정 시점으로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요.”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 법이래
 

넷플릭스 영화 <20세기 소녀>의 두 주인공 풍운호와 보라가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영화는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라는 전형적인 클리셰를 주요 서사로 삼아 아련하고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를 풀어낸다.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오랜 역사를 지닌 로맨스 클리셰는 긴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양상으로 발전해 왔다. 박명진 교수는 대표적인 로맨스 클리셰의 전형으로 순애보의 가치를 들었다. “많은 로맨스물이 물질에 대한 낭만적 사랑의 우위를 드러내는 서사 문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193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신파극에는 순수한 사랑을 지키고자 하는 여자 주인공의 순애보가 등장하죠. 출신의 차이 또는 돈과 권력에서 비롯된 폭력 등 어떠한 난관이 닥쳐도 말입니다. 이러한 서사 구조는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어요.”

  백마 탄 왕자와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루는 신데렐라 서사는 로맨스물의 보편적인 구조로 사용된다. 2009년 상영한 드라마 <꽃보다 남자>, 2013년 드라마 <상속자들>, 2023년 <킹더랜드>까지 백마 탄 왕자님은 수많은 로맨스물에서 어김없이 등장한다. 김예니 교수(성신여대 창의융합학부)는 상향혼이라는 개념을 언급하며 신데렐라 서사의 특성을 설명했다. “여성이 자신보다 처지가 나은 남성과 결혼하는 것을 상향혼이라고 불러요. 시대의 변화로 여자 주인공의 주체성은 더욱 높아졌지만 상향혼의 서사 구조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클리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뤄지지 않는 첫사랑’ 또한 로맨스물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다. 영화 <20세기 소녀>는 17세 소녀 보라가 절친 연두의 첫사랑을 이루어 주기 위해 사랑의 큐피드를 자처하며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꼬여버린 사랑의 화살에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의 첫사랑은 결국 이뤄지지 않는다. <20세기 소녀>는 첫사랑의 클리셰를 활용해 관객이 바라는 정서와 감정을 살려 첫사랑의 서사를 표현해냈다.

  서사 구조 외에도 특정 공간을 클리셰의 일종으로 활용하는 경우를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문선영 교수(한국공학대 지식융합학부)는 바다라는 공간이 로맨스물에서 특정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전했다. “로맨스물에서 바다는 남녀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공간이거나, 서로에게 쌓여왔던 감정을 정리해 갈등을 해소하는 공간입니다. 파도나 저무는 노을 등 바다 주변의 여러 풍경을 활용해 남녀가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요소를 제공하기도 하죠.”
 
  사랑으로 전하는 따뜻한 위로 
  로맨스물 속 클리셰는 창작자와 시청자 모두에게 긍정적 감상과 영향을 선사해 왔다. 박명진 교수는 신데렐라 서사를 예로 들어 클리셰가 현실의 모순을 대신 해소하는 경우를 설명했다. “미국의 문학 이론가 프레드릭 제임슨은 대중 예술을 ‘현실에 존재하는 모순을 상상적으로 해결하는 문화’라고 표현했어요. 로맨스물의 클리셰 중 하나인 신데렐라 서사는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의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를 극복합니다. 착하고 성실한 사람은 출생의 비밀이나 출신의 차이와 상관없이 끝끝내 보상을 받아요. 기회의 평등, 신분 상승의 가능성, 성실과 정직이 보상받는 체계가 부족한 사회에서 신데렐라 서사는 따뜻한 위로를 전하죠.”

  김민정 교수(문예창작전공)는 클리셰를 통해 공감의 욕망도 실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실과 다른 허구의 이야기와 현실과 유사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는 서로 다른 위로를 전한다. “클리셰를 사용해 허구를 통한 대리만족과 현실을 통한 공감이라는 두 가지 욕망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클리셰로 이루어진 로맨스물을 좋아하는 이유라고 봐요.”
 
  클리셰의 진부함은 얼핏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진부한 서사는 오히려 클리셰를 향유하는 이들에게 긍정적인 익숙함으로 다가간다. 이명현 교수는 기대 지평이라는 문학 용어를 통해 클리셰가 주는 영향을 설명했다.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을 문학 용어로 기대 지평이라 합니다. 사람들은 예측 가능한 이야기 속에서 안정감을 느껴요. 여기에 시대에 따라 새로운 가치나 의미를 추가하면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받는 이야기가 탄생하죠.”
 
  창작자의 입장에서도 클리셰의 특징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조연주 나봄미디어심리연구소 대표는 클리셰를 제대로 활용하면 더 많은 시청자를 끌어들일 수 있다고 전했다. “창작자는 보다 강렬한 감정을 자극해 시청자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려 클리셰를 활용하기도 합니다. 시청자가 감정에 공감하려면 이야기에 이해하기 쉬운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요. 때문에 뻔한 내용일지라도 이해하기 쉬운 클리셰는 빠질 수 없는 요소죠.”

  로맨스 클리셰는 현재진행형 
  로맨스 클리셰는 오늘날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그러나 영화 <오만과 편견>이 나오던 과거와 달리 유행은 웹소설과 웹툰으로 기울고 있다. 김민영 교수는 현대의 많은 로맨스물이 웹툰과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다고 말했다. “드라마, 영화 등 콘텐츠를 작품보다 상품으로 보는 시각이 많아졌어요. 작품의 의미보다는 상품의 재미에 초점을 두게 된 것이죠. 과거에는 소설 원작의 드라마나 영화가 많았다면 최근에는 클리셰 활용이 용이한 웹툰이나 웹소설 원작의 드라마와 영화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웹툰이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김비서가 왜 그럴까>와 <사내맞선> 등이 대표적인 예다. 두 드라마는 모두 대중으로부터 ‘클리셰 범벅’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김예니 교수는 웹소설이 드라마화되는 과정을 설명했다. “드라마화의 과정에서 욕설 등은 보정을 거쳐 수위를 조정합니다. 하지만 원작의 이야기는 거의 그대로 가져가는 편이에요. 그래서 클리셰로 점철된 웹소설의 서사적 특징이 드라마나 영화에도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로맨스 클리셰의 흐름은 점들의 집합이 아닌 하나의 선이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사랑의 형태를 언제나 반영해 왔기 때문이다. 로맨스 클리셰의 흐름을 쫓아 사랑과 애정을 나누는 우리의 이야기를 향유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익숙함이 주는 반가움과 즐거움으로 로맨스 클리셰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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