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는 성공했기 때문에 클리셰로 남아있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 만든 클리셰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시대가 변해도 유의미하죠.” -조연주 나봄미디어심리연구소 대표 

동명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SBS 드라마 '사내맞선'은 신데렐라 서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약간의 새로움을 더해 ‘뻔하지만 지루하지 않다’는 호평을 받았다. 사진출처  '사내맞선' 공식 홈페이지
동명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SBS 드라마 '사내맞선'은 신데렐라 서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약간의 새로움을 더해 ‘뻔하지만 지루하지 않다’는 호평을 받았다. 사진출처 '사내맞선' 공식 홈페이지

 

로맨스물의 모든 클리셰를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드라마 <사내맞선>과<킹더랜드>는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화려하게 종영했다. <사내맞선>의 첫 화 시청률은 약 4.9%였지만 마지막 화에선 약 11.4%에 달했고 <킹더랜드>는 방영 중 넷플릭스 글로벌 톱10 TV부문 통합 1위를 차지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D.P.> 등 다양한 장르물이 쏟아지는 시대임에도 사람들은 2000년대 초반 로맨스물의 단골 소재인 ‘신데렐라 서사’에 또다시 매료됐다. 상투성을 띠는 고전 클리셰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복잡하고 어려운 건 그만 

  ‘깊고 길게 사유하기’보다는 ‘얕고 짧게 느끼기’를 즐기는 시대가 열렸다. 김시우 학생(국어국문학과 2)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로 콘텐츠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이 가벼운 드라마에 눈길을 돌리도록 했다고 말했다. “OTT에서는 언제든지 원하는 작품을 선택할 수 있잖아요. 작품이 시청자에게 사고를 요구하는 순간 이해하기 편한 클리셰 서사의 드라마를 찾게 되는 거 같아요.” 최민영 학생(지식경영학부 3) 또한 간단한 콘텐츠를 선호한다고 밝혔다. “밥 먹을 때 영상을 보는 경우가 많은데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해야 하는 콘텐츠는 보기 힘들어요. 아무 때나 끊어 봐도 이해되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박명진 교수(국어국문학과)는 이러한 현상이 독서 계층의 해체 현상과 연관돼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다른 OECD 국가에 비해 국민들의 연간 독서량이 매우 적습니다. 사람들은 독서를 즐기는 대신 스마트폰을 통해 웹툰·영화·애니메이션 등을 감상하죠. 진지한 주제보다는 단순하고 심각하지 않은 이야기에 익숙해졌어요.” 


  현대인이 복잡한 이야기보다 단순한 전개에 끌리는 원인은 그저 익숙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현실이 힘들고 팍팍할수록 피로도가 적은 드라마가 사랑받는 경향도 상투적인 이야기의 성공에 한몫을 한다. 이지연 학생(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은 <사내맞선>과 <킹더랜드>를 즐겨 본 이유로 ‘이상적인 결말’을 들며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와 비교했다.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나의 해방일지>를 보면 우울한 현실이 떠올라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어요. 반면 <사내맞선>이나 <킹더랜드>의 경우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도 누구나 원하는 이상적인 결말을 볼 수 있어서 좋았죠.” 


  한국의 로맨스물에서 신데렐라 서사와 같은 단순한 클리셰는 예로부터 빈번하게 등장해 왔다. 그럼에도 최근 이러한 소재가 다시 주목받는 경향에 관해 박명진 교수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냉소주의를 원인으로 짚었다. “이상과 현실이 계속 빗나갈 때 사람들은 냉소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작품 속의 행복한 결말이나 사랑의 성취 등을 통해 현실 속 암담했던 감정에서 벗어나 대리 만족을 느끼기도 하죠. 빈부격차의 극복이 어려운 현실이기에 이야기에 더 쉽게 빠지게 되는 겁니다.” 조연주 나봄미디어심리연구소 대표 또한 두 드라마의 흥행에 관해 불안한 현실에서 희망을 보고자 하는 심리가 반영된 것이라고 전했다. “우리는 빠르고 복잡하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예측 가능성은 현대 사회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죠. 안정감을 추구하는 욕구가 커지면 새로운 것보다 기존의 질서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곤 해요. 대중이 클리셰 범벅의 드라마를 찾는 것 또한 불안정한 시대에 안정감을 찾고 싶어 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익숙함의 틈새로 새로움이 

  <사내맞선>과 <킹더랜드>는 클리셰의 활용에 있어 과거의 모방에 만족하지 않았다. 두 드라마는 고전 클리셰를 내세우면서도 세련된 설정을 더하는 방식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김예니 교수(성신여대 창의융합학부)는 기존 클리셰 속 약간의 변수가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전했다. “보수적인 연애 서사 속 작은 틈새를 유의미하게 해석해야 합니다. <사내맞선>과 <킹더랜드>의 여자 주인공 모두 재벌가 남성과 결혼하지만 이를 바라는 여성들은 아니에요. 이들은 항상 본인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주체성이 보수적인 연애 서사 속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 대중에게 어필된 것이죠.” 조혜영 영화평론가 또한 남자 주인공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는 여성 캐릭터에 주목했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과의 사랑만을 향해 달려가는 로맨스물은 지양하는 추세입니다. <킹더랜드>의 여자 주인공은 자신의 커리어와 두 친구와의 우정을 사랑만큼이나 소중히 여기죠. 이러한 캐릭터 설정은 시청자가 현대적 시각에서 드라마를 볼 수 있도록 했어요.” 


  빠른 전개는 고전 클리셰를 지루하지 않게 풀어가는 또 다른 전략이다. <사내맞선>의 여자 주인공 신하리는 맞선 자리에서 회사 사장 강태무를 만나고 가짜 이름 ‘신금희’로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 그 후 신하리는 이중생활을 시작하지만 4회 만에 강태무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키고 만다. 이렇듯 이야기를 지지부진하게 끌지 않는 서사 구조는 시청자에게 통쾌함을 선사했다. 김시우 학생은 두 드라마의 빠르지만 친절한 전개에 흥미를 느꼈다고 전했다. “최근 나오는 드라마와 영화는 모두 과거에 비해 전개 속도가 빠른 것 같아요. 그런데 클리셰 요소를 활용한 드라마는 빠른 전개 중 일부 내용을 놓쳐도 이해하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어서 좋았습니다.” 윤석진 교수(충남대 국어국문학과)는 단기간에 역경을 이겨내는 서사 구조를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이전의 로맨스물에서는 고난을 해결하는 과정이 상당히 길었어요. 그런데 두 드라마는 장애물을 쉽게 해결해버리죠. 심각함을 덜고 경쾌함을 더해 시청자가 보기 편한 드라마를 만들었습니다.” 조연주 대표는 갈등과 해결이 한 회 안에 등장하는 구성을 보여준 <사내맞선>에 더욱 주목했다. “시원한 전개가 시청자들의 피로도를 낮췄습니다. 직선형 서사를 통해 머리를 비우고 마음 편히 즐기기만 하면 되는 드라마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신선했죠.” 


  <킹더랜드>의 남자 주인공 구원의 아버지 구일훈 회장은 여자 주인공 천사랑과 구원의 교제 사실을 안 후 천사랑을 지방으로 좌천시킨다. 그러나 다시 서울로 돌아온 천사랑은 구일훈 회장에게 퇴사 의사를 전하며 구원을 당당히 만나겠다고 선언한다. 김민영 교수(교양대학)는 갈등을 빠르게 해결하는 이야기의 중심에는 여자 주인공의 주체적인 성격이 있다고 설명하며 빠른 서사와 주체적인 캐릭터 사이의 관계성을 강조했다. “두 드라마는 여성이 시련을 경험하는 상황이 당연하다는 인식을 버리고 문제 상황을 상당히 유쾌하게 전개합니다. <사내맞선>과 <킹더랜드>의 여자 주인공들은 모두 장애물에 굴복하거나 멈춰 서지 않죠. 남자 주인공의 부모님이 그들의 사랑을 반대하더라도 여자 주인공은 과거와 달리 헤어질 수 없음을 직접 말합니다.”   



  새로운 클리셰의 등장 

  클리셰 자체에도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 기존의 클리셰를 비트는 시도가 대표적이다.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힙하게>는 클리셰의 변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여느 로맨스물이 그러하듯 남자 주인공 문장열은 위기에 처한 여자 주인공 봉예분을 극적인 순간에 구해주곤 한다. 하지만 봉예분이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은 문장열 혼자만의 오해였을 뿐이라는 장면도 드라마 속에 등장한다. 문선영 교수(한국공학대 지식융합학부)는 이러한 <힙하게>의 시도들이 최근 드라마의 클리셰 변주 양상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힙하게>와 같이 클리셰를 비트는 전략을 적절히 활용하면 대중은 익숙한 상황에서도 새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조연주 대표 또한 이러한 전략의 긍정적인 효과를 설명했다. “오랜 시간 만들어진 클리셰가 새로운 시대의 흐름과 만나 뒤틀리는 순간, 시청자는 익숙함과 새로움이라는 모순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곧 쾌감으로 다가오죠.” 

JTBC 드라마 '힙하게'는 기존의 클리셰를 비트는 전략을 통해 신선함을 자아냈다.사진출처 '힙하게' 공식 홈페이지
JTBC 드라마 '힙하게'는 기존의 클리셰를 비트는 전략을 통해 신선함을 자아냈다.사진출처 '힙하게' 공식 홈페이지

 

  변화하는 사회 흐름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클리셰가 탄생하기도 한다. 한 드라마의 서사 구조가 유행하며 여러 로맨스물에 활용되는 것이다. 로맨스물 속 ‘선결혼 후연애’ 서사 구조는 시대에 맞춰 새롭게 떠오르는 유행 중 하나다. 2017년 방영된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속 남녀 주인공은 집이 필요하다는 서로의 경제적 요구에 따라 계약 결혼을 하지만 결국 진실한 사랑을 나누게 된다. 7월 공개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나의 행복한 결혼> 역시 가문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여자 주인공이 명문가의 남자 주인공과 정략결혼을 한 후 스스로를 알아가며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다. 최근 반복되는 이러한 서사 구조에 관해 김예니 교수는 결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중 콘텐츠는 편하게 읽히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현실을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과거에는 결혼 제도를 사랑의 결정체로서 무겁게 여겼으나 최근 결혼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가벼워졌죠. 이를 반영해 최근 몇몇 로맨스물은 기존의 경향성을 탈피했어요. 과거의 로맨스물은 사랑으로 역경을 극복한 후 남녀 주인공이 결혼하는 결말이었다면 최근의 로맨스물은 이야기 초반에 사랑 없이 결혼하기도 합니다.”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는 예로부터 존재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신데렐라 클리셰가 살아남은 이유는 뻔한 클리셰가 뻔하지 않은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클리셰를 전면에 내세워 복잡한 세상 속 쉼터가 되려는 콘텐츠, 우리의 예상을 뒤엎기 위해 클리셰를 역이용하는 콘텐츠 등 다양한 도전들이 이어져 왔다. 다채로운 변주가 등장한 현재, 익숙할대로 익숙해진 클리셰를 현대인의 입맛에 맞도록 ‘잘’ 활용하는 것은 창작자들의 주요한 과제다. 오래된 클리셰가 다시 반짝일 수 있도록 무수히 고민한 작품들. 이들을 보고도 우리는 클리셰를 그저 그런 진부함으로 단정 지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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