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상(聖上)의 효심이 하늘에 닿아 날씨는 맑고 햇살도 빛나니
기뻐하는 소신들의 심정 또한 그지없습니다”
- 기사년 2월 28일 우부승지 박종훈 -


외규장각 의궤는 조선의 정신적 근간이자 500년 역사의 문화를 담은 기록 유산이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가 약탈했던 이후 2011년 외규장각 의궤가 고향에 돌아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외규장각 의궤의 임시 반환 10주년을 기념하며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 전시를 선보였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그곳은 2023년 서울이 아닌 조선시대 외규장각이 된다.

  조선의 글, 길이 남을지어다
  『조선왕조의궤』는 조선 왕실 행사의 준비 및 시행, 사후 처리 과정 등이 기록돼 있어 왕실과 국가에서 진행됐던 의식과 행사의 전 과정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조선왕조의궤』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조선왕조의궤』중 외규장각에 보관됐던 것을 ‘외규장각 의궤’라 칭했다. 외규장각 의궤는 여타 의궤와는 달리 어람용으로 제작됐다. 의궤는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하기 위한 분상용과 왕의 열람을 위해 특별하게 제작된 어람용으로 구분된다. 어람용 의궤는 선조의 예법과 관습을 전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권위와 격식도 상징했다. 어람용과 분상용은 표지의 재질과 색이 다르기에 한눈에 보기에도 그 차이가 뚜렷하다. 어람용은 초록색 고급 비단을, 분상용은 붉은색 삼베를 표지로 삼았다. 어람용의 품격은 내지 속 글씨에서도 드러났다. 어람용은 사자관이라는 외교문서 담당의 관원이 해서체로 글을 정성스레 새겨넣었다. 반면 분상용은 각 관아에서 필사를 맡은 잡직의 서사관이 일반 글씨체로 기록했다.

  임혜경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 학예사는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 속 그림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어람용 의궤는 기록화인 반차도를 매우 섬세하게 정성을 들여 제작합니다. 사람이나 기물을 그릴 때 화원이 붓을 들고 일일이 그린 후 꼼꼼하게 채색하죠. 반면 분상용에서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을 도장으로 찍어 표현합니다.” 

의궤는 왕을 위해 특별하게 제작된 어람용과 분산 보관을 위한 분상용으로 구분된 다. 표지부터 내지의 재질까지 뚜렷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의궤는 왕을 위해 특별하게 제작된 어람용과 분산 보관을 위한 분상용으로 구분된 다. 표지부터 내지의 재질까지 뚜렷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의궤의 기록에 다가가다 ①-『효명세자책례도감의궤』
  기자는 지난 2월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 전시를 관람했다. 조선의 웅장한 기록에서 그에 걸맞은 국격을 느낄 수 있었다. 외규장각 의궤는 국장을 포함하는 흉례, 제사를 행하는 길례, 책봉을 주관하는 가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언뜻 그림과 기록이 비슷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천차만별이다. 의궤에 담긴 수많은 활자 속 왕세자의 책봉, 국모의 장례, 대비의 잔치를 담은 기록에 주목해 의궤의 내용을 살펴봤다.

  조선을 이끌 왕세자를 임명하는 책봉식은 무엇보다 성대하고 완벽하게 이뤄져야 했다. 의궤는 효명세자 책봉식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812년, 순조의 정비 순원왕후 김 씨가 낳은 원자가 4세를 맞이하자 세자 책봉이 논의에 오르게 됐다. 이에 순조는 어머니인 효의왕후와 할머니인 혜경궁 홍씨에게 의논해 세자 책봉에 관한 승낙을 얻었다. 순조는 신하들에게 7월 안으로 길일을 택하라 전했고 예조는 7월 6일에 책봉례를 거행하자는 의견을 올렸다. 책봉례가 거행되기 약 한 달 전인 6월 2일 여러 대신은 빈청에 모여 세자의 이름을 논의했다. 이러한 의궤의 기록을 통해 왕세자의 이름을 대신들이 정하는 것을 알 수 있다.

  1812년 음력 7월 6일 창덕궁에서는 책봉례가 시작됐다. 전례에 따르면 적통 왕자인 효명세자의 책봉례는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 있는 중희당에서 이뤄져야 했다. 그러나 효명세자가 너무 어렸기에 동선을 줄이기 위해 희정당에서 진행됐다. 해당 기록은 권위적일 것만 같은 왕실의 어린 효명세자를 위한 배려를 보여준다. 먼저 인정전에서 왕세자 책봉을 선포하고, 이어 희정당으로 가서 신하들이 왕세자에게 교명, 죽책, 옥인을 전달했다. 조선의 후계자를 정하는 중요한 의례인 만큼 의궤에는 참여자의 세세한 동선과 위치가 일일이 기록돼 있다.

  조선의 세자 책봉식은 그 절차와 의궤 부수에서 다양한 차이를 보인다. 효명세자의 책봉을 다룬 『효명세자책례도감의궤』는 총 8부 제작됐는데 현재 8부 모두 남아있다. 영조가 정조를 세손으로 책봉할 때는 4부, 정조가 순조를 왕세자로 책봉할 때는 7부가 제작됐다. 이에 관해 고(故) 한영우 명예교수(서울대 국사학과)는 저서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에서 『효명세자책례도감의궤』가 8부로 제작된 까닭은 순조가 효명세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왕세자 책봉 때 수여하는 교명에는 국왕이 왕세자에게 내리는 당부가 담겨있다. 이는 실제로 순조가 효명세자에게 하사한 교명이다.
왕세자 책봉 때 수여하는 교명에는 국왕이 왕세자에게 내리는 당부가 담겨있다. 이는 실제로 순조가 효명세자에게 하사한 교명이다.
효명세자의 왕세자 책봉식을 그린 『효명세자책례도감의궤』의 반차도다. 책봉식의 장엄한 행렬과 인물 각각의 위치를 정확히 묘사했다. 지붕이 달린 가마는 왕실에서 사용하는 '연'이라는 가마로 효명세자가 타고 있다.
효명세자의 왕세자 책봉식을 그린 『효명세자책례도감의궤』의 반차도다. 책봉식의 장엄한 행렬과 인물 각각의 위치를 정확히 묘사했다. 지붕이 달린 가마는 왕실에서 사용하는 '연'이라는 가마로 효명세자가 타고 있다.


  의궤의 기록에 다가가다 ②-『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동쪽의 청룡, 서쪽의 백호, 남쪽의 주작, 북쪽의 현무. 이들은 사수라 불린다. 왕과 왕비의 관은 능에 묻기 전 찬궁이라는 구조물에서 모셔지는데 이때 찬궁 안쪽 벽에 사수를 그려 넣는다. 다만 장례 의식이 끝나면 찬궁은 불태워지기 때문에 사수의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다. 오로지 모든 기록을 남긴 의궤에서만 사수도를 만날 수 있다. 명성황후 시해를 의궤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1895년 10월,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이 즉위한 지 32년을 맞이한 해가 저물 때였다. 1895년 10월 8일 고요한 새벽 경복궁 곤녕합에 자객이 침입했다. 그들은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왕세자와 궁녀를 불러 시신을 확인시켰다. 그런 다음 시신을 곤녕합 뒤의 녹원으로 옮겨 석유를 뿌려 태웠다. 이때 명성황후의 나이는 불과 45세였다. 날이 밝자 친일파 우범선은 타다 남은 명성황후 유골을 경복궁 향원정 연못에 버리려 했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조선군 참위 윤석우가 유골을 오운각 부근에 묻었다.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 김홍집은 명성황후의 죽음을 바로 발표하지 않았다. 왕후를 폐위시켜 그 죽음의 의미를 최소화하고자 했기때문이다. 김홍집으로 인해 10월 10일 명성황후는 서인으로 폐위됐으나 왕세자의 반발로 11월 26일 다시 왕비로 복위됐다.

  1895년 12월 1일 명성황후 시해 55일 만에 그의 죽음이 공표됐다. 12월 3일 시신을 옷과 이불로 감싸고 12월 8일 왕세자는 상복을 입었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명성황후의 국장은 진행이 어려워졌다. 불안정한 국정으로 멈췄던 명성황후의 국장은 12월 7일 재개됐다. 1897년 10월 12일 명성왕후는 고종의 황제 승격에 따라 명성황후가 되었다. 명성황후는 그해 11월 21일 발인되고 22일에 땅에 묻히며 2년 2개월간의 장례식이 끝났다. 의궤는 황후 시해라는 조선의 아픈 역사도 그대로 담아내며 오늘날 우리에게 역사를 반추할 기회를 준다.

  의궤의 기록에 다가가다 ③-『기사진표리진찬의궤』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의 생모이자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는 80여 년의 일생 중 70여 년을 궁중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는 종종 비운의 여인으로 묘사되곤 한다. 남편인 사도세자는 정신병을 앓았고, 기나긴 궁중 생활 속 중전에 오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정조의 죽음 이후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의 그늘에 가려진 혜경궁 홍씨는 손자인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마침내 빛을 맞이했다.

  1809년, 혜경궁 홍씨에게는 입궐한 지 60년이 되던 해였다. 친할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지극히 여긴 순조는 그녀를 위한 60돌 기념 잔치를 열었다. 이 시기에는 잔치를 ‘기사진찬’이라 불렀는데 궁중 잔치이지만 규모가 작은 잔치는 ‘진찬’이라 하였다.

  『기사진표리진찬의궤』 반차도에서는 진찬의 성대함을 볼 수 있다. 수많은 궁인과 화려하게 꾸며진 궁궐, 하얀 천 뒤에서 곡을 연주하는 궁인들을 확인할 수 있다. 혜경궁 홍씨를 위한 장대한 잔치는 순조의 효심을 보여준다.

  순조는 이 진찬을 계기로 혜경궁 홍씨의 종친과 외척을 불러들여 관직을 하사하기 시작했다. 행사 과정을 담은 『기사진표리진찬의궤』는 혜경궁과 순조에게 각 1부 올려졌다. 1부는 현재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고 남은 1부는 병인양요때 불탄 것으로 추정된다.

  전시가 끝나고 난 뒤, 2023년의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조선의 외규장각을 그려낼 수 있다. 외규장각 의궤에 기록된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으며 우리의 눈앞에 생생한 그 날의 현장을 재현한다. 우 리가 의궤 속 내용을 통해 역사의 가치를 느낄 때 그곳은 다시 조선의 외규장각이 될 것이다.
 

순조는 혜경궁 홍씨의 입궐 60주년을 기념하며 성대한 진찬을 열었다. 외규장각 의궤 속 진찬 장면을 통해 그 날을 생생히 볼 수 있다.
순조는 혜경궁 홍씨의 입궐 60주년을 기념하며 성대한 진찬을 열었다. 외규장각 의궤 속 진찬 장면을 통해 그 날을 생생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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