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년의 유랑과 20년의 협상을 거쳐
반환을 에워싼 양국의 꺼지지 않은 불씨

협상의 결과는 마침표가 아닌 쉼표
“우리의 의무는 아직 남아있다.”


조선이란 뿌리 위에 기록 문화의 방대한 꽃을 피운 외규장각 의궤. 역사의 아픔 속에 아스라이 져버린 그 꽃을 다시 피워내기 위해서는 145년이 필요했다. 의식과 규범을 고스란히 담아냄으로써 조선의 예(禮)와 통치 철학을 이야기했던 외규장각 의궤를 둘러싼 한국과 프랑스의 치열한 대립의 현장을 따라가 본다.

  빼앗긴 수백 년의 기록
  수백 년간 조선왕조를 지탱했던 의식과 규범의 기록은 하루아침에 종적을 감췄다. 사건의 발생은 1866년 병인양요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의 천주교 박해 사건을 화근으로 프랑스는 군대를 이끌고 조선의 강화도에 침입했다. 한 달간의 혈투 끝에 프랑스군은 11월에 이르러 함대를 철수하기 시작했다.

  철수를 앞둔 프랑스군이 선택한 마지막 침략지는 ‘외규장각’이었다. 프랑스군은 퇴각 도중 외규장각에 불을 지르고 그 안에 소장돼 있던 도서 340여 권을 약탈했다. 그중 297권이 바로 ‘외규장각 의궤’였다. 수천의 책장에 담긴 조선 왕조의 흔적들은 그렇게 바다를 건너 그 자취를 묘연히 감췄다.

  김경민 교수(해군사관학교 군사전략학과)는 프랑스군이 외규장각 의궤를 약탈해간 이유를 제국주의 국가들의 관행과 관련해 설명했다. “프랑스가 외규장각 의궤를 약탈한 이유는 의궤를 추후 정치·외교적 목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약탈 당시 프랑스는 외규장각 의궤의 가치를 알지 못했죠. 일단 약탈하고 이것이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고 판단되면 여러 목적으로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이 전리품을 활용했던 방식과 같죠.” 약탈당한 외규장각 의궤는 결코 단순한 서적이 아니었다. 외규장각 의궤는 다양한 측면에서 그만의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 기록 정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의궤는 ‘의식’과 ‘규범’을 합친 단어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 왕실과 국가에서 시행한 의식과 행사의 전 과정을 기록해 그 가치가 매우 엄중하다.
의궤는 ‘의식’과 ‘규범’을 합친 단어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 왕실과 국가에서 시행한 의식과 행사의 전 과정을 기록해 그 가치가 매우 엄중하다.

 

  모국의 땅을 다시 밟기까지
  점차 잊혀가던 외규장각 의궤의 존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주역은 고(故) 박병선 박사였다. 박병선 박사는 병인양요 때 없어진 책을 찾아야 한다는 이병도 스승의 가르침을 계기로 프랑스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의궤의 행방을 계속해서 쫓았다. 박병선 박사와 외규장각 의궤의 첫 대면은 1978년 프랑스국립도서관 베르사유 분관 폐지 창고에서 이뤄졌다. 발견 당시 외규장각 의궤는 중국 서적으로 분류돼 창고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돼 있었다. 이후 박병선 박사는 기자회견을 통해 외규장각 의궤의 존재를 알렸고, 프랑스국립도서관의 기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사서직에서 내려와야 했다.

  강문식 교수(숭실대 사학과)는 박병선 박사의 발견은 추후 반환에 있어서 가장 중추적인 일이었다고 전했다. “박병선 박사께서는 프랑스국립도서관 수장고에서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하고 의궤를 연구해 『조선조의 의궤』라는 책을 출간했는데요. 이는 외규장각 의궤의 존재를 세간에 알린 시발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반환 협상에서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됐습니다. 만약 박병선 박사의 외규장각 의궤 발견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환수는 없었겠죠.”

외규장각 의궤 반환의 주역 고(故) 박병선 박사. 외규장각 의궤 연구 내용을 담은『조선조의 의궤』를 펴냈으며 이는 추후 반환 협상의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됐다.
외규장각 의궤 반환의 주역 고(故) 박병선 박사. 외규장각 의궤 연구 내용을 담은『조선조의 의궤』를 펴냈으며 이는 추후 반환 협상의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됐다.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을 둘러싼 협상에는 정확히 20년이 소요됐다. 박병선 박사의 노력을 신호탄으로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 간의 협상이 시작됐다. 당시 프랑스와 한국은 ‘상호 교류와 대여의 원칙’하에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에 합의했다. 그러나 초기 협상을 둘러싼 긍정적 전망은 기대했던 결말로 이어지지 못했다. 영구 대여를 요구했던 한국과 달리 프랑스는 의궤에 상응하는 도서들을 상호 대여할 것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김경민 교수는 당시 프랑스가 의궤 반환에 미온적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프랑스가 의궤의 영구 반환을 꺼린 첫 번째 이유는 해당 반환이 프랑스 문화재법에 저촉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문화재법은 문화재의 한시적인 해외 반출만을 규정한다는 점이 한국이 제안한 영구 대여와는 상충했던 것이죠. 또 다른 이유는 프랑스가 문화재 반환이 초래하는 일종의 도미노 현상을 우려해서인데요. 프랑스가 한국에게 의궤를 반환하는 이례적인 선례를 남기게 된다면 다른 국가들의 반환 요구까지 감당해야 할 공산이 크기 때문입니다.”

  민간 전문가들의 투입에도 협상의 판도를 바꾸긴 역부족이었다. 2001년 한상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을 중심으로 구성된 민간 전문가 집단은 총 4차에 걸친 협상 끝에 ‘맞교환 방식’에 잠정 합의했다. 해당 방식은 대여의 원칙하에 프랑스가 어람용 의궤를 반환하면 한국은 분상용 의궤를 프랑스 측에 상호 대여하겠다는 내용이다. 이는 “장남을 구출하려 차남을 대신 내어주냐”는 국내 여론의 거센 반발에 결국 무산됐다.

  정체된 협상에도 끝은 있었다. 박흥신 전 프랑스 대사는 2009년 부임을 시작으로 정지돼 있던 반환 협상에 재시동을 걸었다. 그는 프랑스 법률상 완전한 반환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고려해 기간제 대여 방식으로 협상에 나섰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새로 취임한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에게 한국의 민심과 외교적 실리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설득을 이어갔다. 프랑스 전 문화부 장관 자크 랑을 포함한 ‘외규장각 의궤 반환 지지 협회’의 활약도 상당했다. 그들의 지속된 설득은 사르코지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막중한 역할을 했다.

  김민정 교수(서울시립대 국제관계학과)는 외규장각 의궤 반환 지지 협회가 내세운 새로운 반환 논리가 프랑스 측의 반환 명분을 제공했다고 전했다. “이전 협상에서 프랑스는 외규장각 의궤의 소장 경로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요. 하지만 외규장각 의궤 반환 지지 협회와 박흥신 전 프랑스 대사는 외규장각 의궤가 분명한 약탈로 프랑스에 소장됐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반환의 정당성을 주장했죠. 특히 문화 강대국인 프랑스가 선각자적인 관대함을 발휘해 의궤를 반환하는 것이 외교적 이득이 더 크다는 점 또한 부각했는데요. 이러한 새로운 반환 논리가 사르코지 대통령에게 의궤 반환의 명분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년 동안 지속된 협상 끝에 이명박 전 대통령과 사르코지 대통령은 의궤의 5년 단위 임대에 최종적으로 합의했다. 그렇게 2011년 그해 봄 외규장각 의궤는 140여 년 만에 다시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우리 것을 우리 것이라 하기 위해
  반환 협상의 결과는 상당히 역설이었다. 협상 후 의궤가 우리 땅으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실소유주가 프랑스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기간제 대여 방식의 반환’이라는 결과 앞에서 완전한 반환이 가능한가에 관한 물음도 존재했다. 사실상 프랑스 내에서 기간제 대여의 방식으로라도 반환을 합의한 경우는 외규장각 의례가 이례적이었다. 약탈 문화재를 
완전히 반환한다는 것은 그간의 잘못된 역사를 인정한다는 의미와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강문식 교수는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약탈 문화재 환수를 위한 국 가적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기본적으로 해외 유출 문화재 환수를 위해서는 해당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는 국가의 협조가 꼭 필요합니다. 환수 대상 문화재에 관한 학술 연구를 통해 문화재의 역사적 가치를 확인하고 국제법적으로 환수 요구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도 중요하죠. 국가의 외교적 협상을 통해 현 소유국의 협력을 끌어내는 것 또한 필수인데요. 명분과 당위성만을 과하게 내세우다가 현 소유국과의 마찰을 빚는 것은 문화재 환수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김경민 교수는 시민들의 의식적 노력이 환수에 미치는 영향을 조명했다. “국제적 이해관계와 법률적 문제를 고려했을 때 외규장각 의궤의 기간제 대여는 뚜렷한 성과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반환이 현실적으로는 어려울지라도 이를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문화재를 반환해야 하는 입장인 국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여론인데요. 여론은 자국의 문화재를 향한 시민의 관심과 꾸준한 문화재 연구를 바탕으로 합니다. 무엇보다도 시민 또한 약탈 문화재가 마땅히 반환돼야 하는 역사적 맥락을 알아야 반환의 정당성을 입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와 시민단체 그 중간에서 문화재 환수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특수법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관계자 또한 문화재 환수에 적극적인 의지를 비쳤다. “문화재청 산하 공직유관단체인 우리 재단은 단발적인 성과를 위한 성급한 추진을 지양합니다. 환수할 문화재를 장기적인 시각에서 분류해 효과적인 환수 정책을 세워 사업을 진행해오고 있는데요. 재단은 정부나 시민 중심 환수의 문제점인 정치적 혹은 재정적 문제에서 자유로운 만큼 국외 문화재 환수 및 활용에 관한 전반적 사업을 기동성 있게 수행할 것입니다.”

  현재 타지에 흩어져있는 우리 문화재는 무려 약 14만 점에 달한다. 오늘날에 “우리의 의무는 아직도 남아있다”라는 박병선 박사의 말씀은 더욱 진하게 남는다. 외규장각 의궤를 비롯해 아직도 타지에 시들어가고 있는 우리 문화재를 다시 개화시킬 의무는 우리에게 있다. 기나긴 공방 끝에 지켜낸, 혹은 다시 만나게 될 우리 문화재의 꽃씨들이 오래도록 그 고귀함을 활짝 피워나가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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