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개에 자주 빗대어지곤 한다. 감시견(Watch Dog)과 애완견(Lap Dog). 반드시 개가 돼야 한다면 두 선택지 중 어떤 개를 선택할 것인가. 정치권력, 경제권력, 그리고 사회권력 등 각종 권력을 날카롭게 감시·견제할 줄 아는 감시견? 아니면 주인의 따듯한 품 안에서 재롱떨며 간식을 벌어 먹고사는 애완견? 이왕 해야 하는 개라면 필자의 선택은 단연 감시견이다.

  스스로 20대 초반은 곧 중대신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펜데믹에 따라 장기화한 비대면 학사로 아직 이렇다 할 것이 이밖에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간의 희로애락이 전부 담겨 있는 이만한 곳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열정과 야망 가득한 필자의 뭣 모르던 때를 추억할 만한 좋은 요소여서이기도 하다.

  코흘리개 시절엔 나름대로 원대한 꿈을 품고 중대신문에 들어왔더랬다. 약자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위해 발로 뛰어다니는 기자. 이 같은 기자로서 감시견 노릇을 하기 위해 지난 시간 동안 나름 부단히도 애썼다. 학내외 이곳저곳을 끈질기게 살피고, 감시하고, 견제하고. ‘남들은 잘하니 이제 나만 잘하면 된다’라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달려왔다.

  아뿔싸, 그것도 잠시. 세상에 맘대로 되는 일이란 없는 것이랬다. 세상이 규정하는 언론의 바람직한 모습은 감시견이 아닌 애완견인가 보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언론을 애완견으로 취급하는 이들이 많을 리가 없다. 직접 마주한 현실은 말 잘 듣는 강아지 한 마리 분양받길 원하는 이들투성이다. 언론을 전공으로 삼고 있는 입장에서 현실과 책이 말하는 ‘저널리즘’의 괴리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전공생이고 신문사에 나와 일선 체험을 하고 있자니, 말 잘 듣는 강아지를 원하는 이들을 마주할 때는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다. 이따금 ‘이상한 건…. 나인가?’는 생각으로 들어가기에 십상이다. 알려야만 하는 내용을 찾아 발 빠르게 전달하는 기자, 생생히 살아있는 기자가 되고 싶어 때론 벅차더라도 여태 붙어있는 신문사다. 하지만 손발 칭칭 묶인 채 감시견도 애완견도 못 되는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필자를 옥죄어 올 때는 스스로 깊은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코 흘릴 적 순수하고 패기 가득했던 기자는 여기 없다. 이젠 때 타버린 기자가 됐으나 그럼에도 품속에서 귀염받으며 할 수 있는 것이 기관지 역할 뿐인 개노릇은 사양이다. 애완견으로 전락해버리는 건 아닐까 안절부절못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마음 편히 내려놔도 좋습니다, 손안의 애완견에서 집 나간 감시견이 되지 않을까 안달복달하는 이들이 있다면 마음 단단히 먹는 편이 좋을 겁니다.

  실제론 아담하고 작은 체구를 가진 필자지만, 개가 된다면 이왕 되는 김에 되도록 덩치 크고 사나운 감시견이 되고 싶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게 타협한 채 애완견으로 남고 싶진 않으니까 말이다.

박소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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