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반가운 얼굴들을 더 자주 본다. 대면 학사가 시작되며 보고 싶던 이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매일 함께 식사한다. 나 또한 식사를 핑계로 너에게 더 자주 연락한다.  

  그렇게 너와 만나면 자연스럽게 비건 식당을 찾거나, 비건 옵션이 있는 식당으로 향한다. 다른 친구들과 만날 때와는 다른 풍경이다. 여느 식당이 그렇듯, 들어서면 맛있는 냄새가 풍긴다. 육식 메뉴를 선택할 수 있더라도, 네가 입대는 음식이 아니더라도 최대한 덩어리째로 나오는 고기는 피하고 메뉴를 정한다. 메뉴가 나오면 맛있겠다고 호들갑 떨며 수다를 곁들인 식사를 즐긴다. 그렇게 다른 친구들과 만날 때와 같은 풍경이다. 

  채식주의자 친구를 존중하며 지내는 일은 그리 다른 일상이 아니다. 나는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만, 매운 걸 좋아하지 않는 이와 식사할 때는 떡볶이를 포기한다. 그렇다고 그 친구를 만나는 일이 불편하거나, 꺼려지지 않는다. 떡볶이를 좋아하는 나지만, 그 친구가 못 먹으니까. 그 정도의 존중은 누구와의 관계든 필요한 것이다. 육식을 지양하는 이들에게 채식주의자라는 정체성이 부여됐을 뿐.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가 식탁과 삶의 방식에 드러날 뿐이다. 

  처음엔 미안한 마음에 함께하는 식사에서 육식을 지양했다. 또, 소중한 네가 가치를 지키며 건강하게 식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비건 학식이 도입되길 바랐다. 너의 세상에 함께 하기 위해 비건 제품을 시도해 봤다. 네가 불편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SNS에 육식 전시를 지양한 건 내 일상이 됐다.  

  타자화된 마음으로, 어쩌면 진정한 존중이 아니었을 그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너와 채식주의는 어느새 내 삶에 더욱 가까워졌다. 채식주의를 실천하는 너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나도 한 번 시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건이 될 때는 채식하고 싶어져 비건 학식이 필요해졌다. 동물의 착취 없이도 미각을 충족할 수 있는 대체품은 없는지 찾게 됐다. 그리고 점점 동물권을 생각해본다. 반려동물은 아끼며 가공육류는 죄책감 없이 즐겼던 내가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너무 인간 중심적인 삶을 살지는 않았는지 반성한다. 내 핸드폰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비건 식당 찾기 앱처럼 너로 인해 나의 삶에 비거니즘이 자리했다. 

  너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했던 행동들로 나는 누군가의 희생 없는 선택을 하게 됐다. 너와 먹는 한 끼라도 육식을 지양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이바지할 경험을 한다. 동물성 식품 사진을 게시하지 않음으로 타인에게 육식을 권장하지 않게 됐다. 그리고 또 한 번 내가 채식주의자를 타자화하지 않았는지 반성한다.

  그렇게 너의 존재는 불완전한 채식주의자 한 명을 만들어냈다. 너의 주변 이들 중에는 나처럼 일상 속 변화를 이룬 이들이 많을 것이다. 단 한마디의 충고 없이, 묵묵한 행동만으로 변화하게 만든다. 나는 그래서 너의 친구로 사는 것이 감사하다.

송수빈 뉴미디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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