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1주차 무전여행을 파헤치다
2주차 세 얼간이 기자들의 
       무전여행 체험기
 
 
 
‘세얼간이의 문화체험기’는 새로운 문화적 현상을 기자들이 직접 체험하고 느낀 뒤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전달하는 지면입니다. 문화 전문가를 만나 그들의 언어를 간접 전달하는 것에서 벗어나 기자들의 솔직 담백한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죠. 이번에는 ‘무전여행’을 주제로 2주차 기획을 준비했습니다. TV나 책에서 돈 없이 전국이나 해외를 떠돈 괴짜의 무용담으로 비춰지는 무전여행. 분명히 존재하는 현상이지만 누구도 깊이 생각을 해보지 않은, 무전여행이란 현상을 파헤쳐봤습니다.
 
 
 
 
 
 
●문화돋보기
 
지나는 나그네, 과객에서 시작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까지
무전여행은 청춘의 호기가 아닌 시대에 따라 의미가 변해온 유산
 
 
  침낭과 텐트, 옷가지로 가득 찬 배낭에 의지한 채 자신의 젊음을 시험하듯 떠나는 무전여행. ‘젊음과 열정’, ‘낭만과 로망’, 무전여행에는 이처럼 생기 넘치고 파릇한 청춘을 의미하는 수식어들이 따라붙는다. 무전여행은 자칫 사서도 고생하는 젊음의 패기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혁명가 체 게바라와 마오쩌둥은 무전여행을 통해 당시 사회의 모순을 깨닫고 혁명의 토대를 만들기도 했다. 무전여행이 사회의 현실을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단순한 젊음의 호기가 아닌 배움의 방법이기도 한 무전여행의 역사를 거슬러가며 그 의미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펴보자. 
 
  대한민국에서 무전여행의 근원은 ‘과객’에서 출발한다. ‘지나가는 나그네’라는 뜻을 지닌 과객에는 과거를 치르러 가는 선비, 특정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포함돼 있었다. 과객은 낯선 민가에 하룻밤 묵을 것을 요청했고 사람들은 흔쾌히 이를 허락했다고 한다. 낯선 과객을 대접했던 이유에 대해 이찬욱 교수(국어국문학과)는 과객이 문화 전달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과거 사람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에 정착해 살았어요. 외부에 대한 소식을 접할 길이 없는 사람들은 항상 외부세계를 궁금해했죠. 그러다 보니 외부소식을 들려주는 과객들에게 친절할 수 있었던 거예요.”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과객에 대한 대우는 더욱 좋아진다.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라는 ‘봉제사 접빈객’이 장려됐기 때문이다. 접대문화는 대표적인 양반문화로 자리 잡아 양반의 집은 항상 과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대표적인 예로 경주 교동 최 부자 가문은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가훈을 두고 1년에 약 1000석의 쌀을 과객들에게 대접했다고 한다. 이찬욱 교수는 “남을 도와주고 잠자리를 제공하는 문화가 있었기에 과객들이 자유로이 길을 떠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무전여행은 민족계몽의 수단으로 그 의미가 변모된다. 지식인이 민족의식을 전파하며 전국을 돌았고 여행에 필요한 음식과 숙소를 제공받은 것이다. 특히 불교에서는 이런 계몽운동을 정기적으로 실행했다. 고영섭 교수(동국대 불교학과)는 “1930,40년대 불교학교에선 방학마다 전국을 떠돌며 대한인의 의식과 혼을 깨우는 독립운동을 벌였다”고 말했다.
 
  본격적으로 ‘무전여행’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광복 이후부터 근대화가 활발하게 진행되기 전인 1960년대.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은 이 시기에 무전여행은 학생들이 다양한 경험을 하며 여행하는 방법이었다. 무전여행자뿐만 아니라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도 무전여행은 흥미의 대상이었다. 교통망이 설치되기 이전, 아직 지방에서는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 대학생이라는 지위는 지식인층에 속했기에 특별한 존재였다. 이찬욱 교수는 “당시 서울서 대학생이 왔다고 하면 서울의 이야기와 대학생활을 듣는 교류의 장이 펼쳐졌다”고 말했다. 
 
  이렇게 성행하던 무전여행은 너무 많은 사람이 무전여행을 하게 되면서 폐해를 낳게 된다. 1962년 치안국(현 경찰)에서는 충청남도에만 1860명의 무전여행자가 다녀가면서 지역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같은 해 치안국은 결국 무전여행을 금지하고 무전여행자를 즉시 귀가 조치하겠다는 방침을 내놓는다.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무전여행은 사라지지 않고 90년대까지 그 명맥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는 무전여행이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됐고 TV 프로그램이나 책으로만 접할 수 있는 독특한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무전여행이 사라지게 된 이유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급격하게 진행된 경제화의 영향이 크다. 자본주의가 만연하면서 사람들은 화폐에 의존해 살아가게 됐고 모든 것은 결국 돈과 연결됐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이 여행하는 사람은 돌연변이에 가까운 취급을 받게 된 것. 김성윤 강사(교양학부대학)는 “소비 문명이 발달하면서 모든 것은 상품으로서의 값어치가 매겨졌다”며 “여행도 이 중의 하나로 사람들은 더 이상 돈 없이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됐다”고 말한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무전여행을 떠나는 돌연변이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무전여행을 하는 이유가 자본주의에 맞서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들이 무전여행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그동안의 생활과 다른 환경에서 발견할 특별한 경험. “똑같은 생활이 반복되는 일상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이 없어요. 무전여행은 이런 일상에서 극단적으로 벗어나 본래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일 수 있죠.” 심창섭 교수(가천대 관광학과)는 무전여행이 진정한 자신을 찾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돈이 없다면 식사를 해결할 수도, 추위를 피할 숙소도 구할 수 없어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것이 전혀 충족되지 않는다. 무전여행의 의의는 이러한 체제에서 벗어나 돈이라는 매개체를 제거하고 사람 간의 거리를 좁히는 것에 있다. 돈이 사라진 자리에는 사람이 있고 사람들은 나눔을 통해 기본적인 것을 충족시킨다. 김성윤 강사는 “상품경제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무전여행은 모든 장벽을 제거하고 사람들을 교류하게 해준다”고 말한다. 그동안 돈이 가로막고 있던 인간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 바로 무전여행을 통해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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