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하지 않는 사람. 김병호 동문(문예창작학과 91학번)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시인관이다. 시에는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난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는 의미다. “가끔 보면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 아는 척하고 연민이 없는 대상에게 연민을 갖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진실된 시가 거지를 구제할 수는 없어도 우리 옆 배고파하는 사람의 존재를 일깨워 줄 수 있다는 시인을 만나봤다.

사진 박가현 기자
놀기 위해 시작한
문예 활동이
시작(詩作)의 밑거름 되다

두 번의 신춘문예로
확고히 자리잡은
일상의 문학 세계

아이와 함께하는
시인의 삶이
즐겁다
 
그는 일상을 소재로 시를 써내려간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시상을 노트에 메모하곤 하는 그. 노트 한 켠에 적힌 시상은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리는 시로 피어났다. 일상의 냄새가 배어 있는 시인 김병호 동문의 이야기를 담았다.
-어렸을 때부터 글에 소질이 있는 편이었는지.
“초등학교 때였나요. 다른 것보단 글쓰기를 잘했어요. 교내 백일장에서 자주 상을 받기도 했고요. 그러다 보니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글을 잘 쓰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은 안했는데 이렇게 시인이 되어 있네요.”
-꿈이 무엇이었나.
“꿈이 많이 바뀌었어요. 처음 장래희망은 의사였어요. 하지만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아무리 공부해도 수학이 절대 안 되더라고요. 문과 체질임을 직감한 순간이었죠. 고등학교 때 교내 문예반 활동을 하고 광주시내 연합 문예동아리에 들면서 나중에 시인이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10대 후반이면 한창 놀고 싶을 나이었을 텐데.
“놀고 싶으니까 문예동아리에도 들어간 거예요.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다른 학교 학생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거든요. 무리를 지어 다른 학교 시화전을 구경하고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교양 프로그램에 참여하곤 했어요. 여학교의 시화전에 가서 신랄한 비평으로 시를 쓴 여학생을 울리고 오는 것이 우리들 사이에선 일종의 훈장이고 그랬죠. 제가 남고를 나와서 조금 짖궂은 면이 있어요.(웃음)”
-어떻게 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인지.
“상을 많이 받다 보니까 자연히 글에 자신감이 생겼고 글을 좋아하게 됐죠. 중학생 때 참가했던 독서 감상문 발표대회에서는 전라남도를 통틀어 1등을 먹기도 했어요. 고등학생 때는 밖에서 놀려고 백일장에 자주 참가했어요. 예전에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학교에 가야 했기에 토요일마다 학교에 빠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백일장이었거든요. 산문에 비해 자유 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시를 주종목으로 삼았죠. 짧은 시간 안에 작품을 써내야 그만큼 놀 시간이 늘어나니까요.”
-문예창작학과에 재수를 해서 입학했다.
“사실 다른 학생들보다 재수 준비를 늦게 시작했어요. 고등학교 졸업식을 한 다음날에 가출을 했거든요. 사춘기 반항과 설익은 사회의식으로 사회를 직접 느껴보자는 호기가 발동했죠.(웃음) 공단에서 일해 보니 정말 힘들더라고요. 세숫비누로는 잘 안 지워지는 때가 얼굴에 묻어 빨랫비누로 세수를 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어요. 결국 3개월 만에 집으로 복귀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죠.”
-뒤늦은 수험 공부가 힘들었겠다.
“재수 준비를 하기엔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제가 자존심이 강해요. 남들처럼 학원에 다니지 않고 시립도서관에서 남몰래 독학했죠. 밥을 먹는 시간을 빼고 공부에만 전념했어요. 제가 공부하던 5층에서 식당이 있는 지하 1층까지 내려가 도시락을 먹고 올라오는 데 정확히 12분이 걸렸어요. 100원짜리 된장국을 곁들여 먹으면 아주 꿀맛이었죠. 열심히 공부한 것에 비해 막판에는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아 힘들었어요.”
-현역 시절에는 문예창작학과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나.
“문학을 사랑했기에 고려는 했었지만 정치외교학과에도 관심이 있었어요. 남자라면 정치란 꿈을 키워볼만 하다고 생각했고 정치외교학과 출신의 기자가 되어 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죠. 검사나 경찰보다 자유롭게 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기자란 직업이 참 멋지게 보였어요.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하면서 종국엔 시인을 생각하게 됐지만 말이에요.”
-문예창작학과 진학을 이야기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반대는 안 하셨지만 어머니는 조금 꺼려하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친구분들에게 제가 광고홍보학과,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다고 이야기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요. 글 쓰는 일은 여자들이 하는 것이라고 여겼던 사회 분위기 때문에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다고 말하기 어려웠나 봐요.”
 
어렸을 때부터 각종 백일장에서 두각을 보였던 소년은 글에 대한 열정으로 문학의 길을 선택했다. 고단했던 20살을 마치고 입학한 대학에서 그는 학생운동의 물결에 뛰어들게 됐다. 김병호 동문은 다사다난했던 학창 시절을 추억했다.
-학창 시절 학생운동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들었다.
“신입생 시절 의혈대라는 전투 조직에 들어 데모를 하러 다녔어요. 제가 입학했을 때 강남 수서 비리사건이 드러나 시국이 많이 혼란스러웠죠. 의혈대는 전경이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개입하면 학생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하는 단체였어요. 데모가 가장 강렬하게 일어나는 광주에서 왔다는 이유로 1학년인데도 쇠 파이프를 들게 됐죠. 저녁이면 농구부 선수들도 아닌데 쇠 파이프를 들고 학교를 구보하며 체력 훈련을 했어요.”
-1학년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은데.
“데모에서 헬맷 틈으로 보였던 전경들의 눈빛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맞지 않으려고 죽기 살기로 쇠 파이프를 휘두르는 일은 1학년 학생이 경험하기 힘든 일이었어요. 광주와 다른 시위 분위기 때문에 당황스럽기도 했고요. 한 번은 타대학 학생들과 연합해 수원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데 주민들이 영업 방해한다며 저희를 욕하고 전경에게 저희를 잡아가라고 하더군요.”
-당시 학과 풍경이 궁금하다.
“방학이 되면 자취방에서 일주일에 걸쳐 진행되는 1000점 내기 고스톱 리그전이 열렸어요. 다들 소설책, 시집, 식권 등을 내걸었어요. 새 책이나 자기가 아끼는 책은 내기에 내놓지 않고 다들 고스톱에서 딴 상품만 내놓았기 때문에 나중에 보면 자취방 리그마다 돌아다니는 책이 똑같았죠. 우리에겐 책이 판돈이나 다름 없었어요.”
-고스톱계의 타짜였나.
“초보 중의 초보였어요. 저는 대학교 때 고스톱을 배워서 사회에 나간 사람이에요.(웃음) 지난번에 시인협회 행사에서 대학교 때 갈고 닦았던 실력으로 장석남 시인에게 3만원을 따는 데 성공했어요.”
-학점은 어땠는지.
“시위를 쫓아다니느라 입대 전까지 학점에 신경을 못 썼어요. 1학년 1학기에 수강했던 8과목 중 F학점이 6개였던가요.(웃음) 1학년 2학기 역시 학점이 1점을 넘지 못했고요. 다행이었던 건 학사 경고제가 92년에 도입돼서 1학년 시절에는 학사 경고를 면할 수 있었어요.”
-부모님께서 한 말씀하지 않으셨나.
“군대를 가기 전까지 부모님이 제 성적표를 받아 본 적이 없어요. 지금처럼 인터넷으로도 성적을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당시에는 성적표가 등록금 고지서와 함께 동봉돼 우편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어요. 제 성적을 보고 어떤 부모가 등록금을 내주겠냐는 생각에 친구네 집주소로 거주지를 돌려 놨었어요. 그러다 보니 정기 등록기간에 맞춰 등록금을 낸 적이 없었죠. 매번 추가 등록기간에 어머니에게 전화해 통장으로 등록금을 받아 제가 직접 납부했어요.”
-잔머리가 비상했다.
“군대에 관해서도 부모님이 모르는 사실이 있어요. 부모님은 제가 2학년을 마치고 입대한 줄 알고 있지만 사실 2학년 1학기까지만 학교를 다니고 한 학기는 놀다가 입대했어요. 졸업을 할 즈음이 되니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더라고요. 아들 졸업식이라고 부모님께서 서울로 올라오셨어요. 가족들은 입학한 지 8차 학기가 지났으니 졸업하는 줄 아는데 실제 졸업까지는 한 학기가 남았거든요.”
-부모님에게 사실을 고했나.
“아니요. 일단 졸업 가운을 빌려 입고 학교에 갔어요. 흑석동 교정에서 졸업식을 했는데 졸업식장에는 가지도 못하고 캠퍼스의 후미진 곳만 골라서 부모님과 사진을 찍었어요. 동기들이 괜한 말을 할까 봐 걱정이 돼서요. 그 때 사진을 보면 부모님은 아들이 졸업하니까 싱글벙글 웃고 계신데 저만 똥 씹은 표정이에요. 마음이 불편하니까 사진이 다 울상으로 나온 거예요. 죄 지은 벌을 받은 거죠.”
-언제 바른 생활을 시작한 건가.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생활했던 게 복학한 직후였어요.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가서 밤 10시까지 공부하고 밤 10시부터 한 시간은 선배들과 농구를 했어요. 12시면 잠자리에 꼭 들었고요. 기숙사에서 살 때는 교내 식당에서 새벽 배식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낮에는 예술대학 행정실에서 근로장학생으로 근무하며 일주일에 한두 번은 과외를 하기도 했죠.”
-행실이 달라진 이유가 있나.
“군대를 다녀와서까지 놀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사 경고를 받았던 전과가 있었던 만큼 특히 성적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열심히 공부한 결과 복학한 뒤로는 항상 전액이든 반액이든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어요. 마지막 8차 학기에도 전액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한 학기를 놀았다는 것을 걸리지 않고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죠.”
-등록금은 장학금을 받아 해결했지만 한 학기를 더 다녀야 했는데.
“부모님에겐 한 학기 더 준비해서 대학원에 갈 계획이라고 말씀드려 놓았던 상태였어요. 1학년 때 놀았던 탓에 재수강이 많아서 학기 중에 학점을 메꾸느라 고생을 하긴 했지만 8차 학기 만에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죠.”
 
학교 생활에 열심이었던 그는 매 학기 장학금을 받는 성실한 학생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대학교 4학년 때 문예잡지 <월간문학>에 투고했던 졸업 작품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김병호 동문은 본격적인 시인의 길을 걷게 됐다.
-성공한 시인의 전형으로 보인다.
“스스로를 절름발이 시인이라고 여겼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렇게 보이나요.(웃음)”
-절름발이 시인이라니.
“졸업 작품으로 준비했던 시들을 투고한  것이 1997년 <월간문학> 신춘문예에 당선돼 신인상까지 받게 됐어요. 기쁜 마음은 컸지만 시인으로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죠. 미흡한 상태에서 얼떨결에 등단을 했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어요. <월간문학>이 70년대에는 인정을 받는 잡지였다고 하지만 80년대부터는 기세가 기울었기 때문에 등단은 했어도 작품활동을 하기 어려웠어요.”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이 도약의 기회였던 건가.
“당선 소식을 듣고 ‘이제 반쪽자리가 아닌 정식 시인이 될 수 있겠다’, ‘더 떳떳한 시인으로 활동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승부를 걸었던 신춘문예에서 좋은 결과를 본 것이라 뿌듯하기도 했고요. 2001년부터 3년간 신춘문예 재등단을 위해 계속 투고를 했거든요.”
-어떠한 시를 추구하나.
“학부생 시절에는 모더니즘 계열의 어려운 시를 쓰고 싶었는데 제 타고난 성향과 맞지 않더라고요. 일상 속에서 느끼는 소회를 소재로 시를 쓰는 것이 제게 가장 편안했어요. 현실에서 미처 찾지 못했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는 것이 시의 몫이기도 하고요.”
-2006년에 첫 시집을 출간했다.
“첫 시집 『달 안을 걷다』에는 스스로의 시 세계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던 1997년부터 2003년 사이의 작품과 2003년 등단한 이후의 작품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어요. 시마다 편차가 있긴 하지만 시인이 되기 위해 썼던 시들과 시인이 된 다음에 썼던 시들이 공존하고 있어요. 그래서 더 애정이 큰 시집이에요. 시인 김병호의 과정이 담겨 있거든요.”
-시에서 직유법이 자주 눈에 띄는데.
“의식해서 사용하는 것은 아니고 독자에게 다가가기 쉬운 방법이라서 저도 모르게 많이 쓰게 되는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직유를 은유보다 한 단계 낮은 수사법이라고 하는데 저는 직유가 은유 못지 않은 고급스러운 수사법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친절하면서도 새로운 의미를 창조할 수 있는 기법이거든요.”
-시인으로서 보람을 느꼈던 적은.
“시를 쓰고 나서 초등학교 4학년인 딸아이에게 초고를 읽어주곤 해요. 아이가 시를 재밌다고 칭찬해줄 때 그렇게 보람이 커요. 아이와 함께 제 시를 읽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에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협성대 교수를 맡고 있는데 이번학기부터 연구년이 시작돼요. 1년간 미국으로 연수를 가게 됐죠.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쉬고 올 생각이에요. 사실 바로 다음주가 출국이라 인터뷰 제의를 받았을 때 살짝 망설여졌어요. 출국 준비를 하는 동시에 그간 밀린 일을 마무리하느라 정신이 없거든요. 막바지가 되니 정리할 일이 참 많네요.(웃음)”
 
  시 하나
밤새 혼자 싼 이삿짐처럼
 
마음의 바깥은
 
애초부터 누구의 몫도 아니었습니다
 
비늘만 잔뜩 묻은 성긴 그물을 들고
 
강가로 나섭니다
 
시를 두고 다시 맨발로
 -이천십이년 가을
 『밤새 이상을 읽다』 중에서
 
 
▲ 대학교 4학년 시절 김병호 동문.
 
  당신에게 중앙대란?
“집 나간 난봉꾼 아버지 같아요. 학교가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어요. 문예창작학과가 학부제로 바뀌면서 공연영상창작학부에 속해 있는 전공으로 바뀌었잖아요. 최근에는 대학원 구조조정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고요. 중앙대가 한국의 번듯한 명문사학으로 발전했으면 좋겠는데 제가 생각하는 방향과 학교가 추구하는 방향에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아버지가 난봉꾼이라고 해서 아들이 사랑하는 아버지를 버릴 수 없듯 제게 중앙대는 그런 애증이 담긴 곳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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