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라는 이름에 애정을 품고 사는 사람이 있다. 마포는 지금의 그가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원동력이다. 구민을 위하는 마음에서 정치의 본질을 찾은 노웅래 동문(철학과 78학번).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국민 곁에 있는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국회의원을 만나봤다.
 
사진 박가현 기자
 
재야에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자신을 돌아보다
 
공정 보도를 위해
단식 투쟁을
불사하다
 
중앙의 정신으로
통일의 모습을
스케치하다

 

  서울 사람이라는 표현보다 마포 사람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남자. 마포갑 지역에서 1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노웅래 동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학창 시절 삼수를 했을 때도 18대 국회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을 때도 마포 사나이는 넘어지지 않았다. 마포를 평생의 고향이라 여기는 노웅래 동문의 이야기를 담았다.
-마포에 애정을 갖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마포는 증조할아버지 시절부터 대대로 지켜온 고향이다. 우리 집안이 마포와 함께한 지도 어느새 100년이 넘었다. 내가 마포를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나.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원래 집안 형편이 어려웠는데 아버지가 자수성가해 마포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50년간 야당 소속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먹고 살기 힘든 형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생계를 주로 담당했다. 학교가 끝나면 어머니 곁에 앉아 편지 봉투를 붙이거나 구슬 꿰는 일을 도와드리는 것이 내 하루 일과였다.”
-아버지가 야속하지는 않았나.
아버지가 마포에 관한 일이라면 집안일보다 더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그 때문인지 아버지처럼 사람들을 위해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인 양 느껴졌다. 오히려 아버지의 모습은 인생을 살아가며 사회적인 책임이 있는 직업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사상적 기반이 됐다.”
-구체적으로 어떤 꿈을 꾸었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목표는 있었지만 특정 직업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반적으로 남을 위해 헌신하는 일에 매력을 느꼈다. 어렸을 때는 법관이 되고 싶기도 했고 뚱딴지처럼 신부님을 꿈꾼 적도 있었다. 우리 집안은 기독교를 믿어서 카톨릭과 아무런 연고가 없었는데 말이다. 실제로 법학과 진학을 고민하기도 했다.”
-결국 철학과에 진학했는데.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넓은 의미에서 신부나 법관이 철학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남을 위해 일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소양을 철학과에서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실적인 이유라니.
삼수를 했기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않으면 무조건 입대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철학과에 대한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처음 목표로 했던 법학과나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컸다.”
-스스로 어떤 학생이었다고 생각하나.
공부를 잘하려고 노력은 했으나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다.(웃음) 그래도 형제 중에선 공부를 열심히 하던 편에 속했다. 사고를 치고 다니지도 않았으니 모범생 축에 속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가 야당 국회의원으로 계셔서 스스로도 행동에 더 신경을 썼다.”
-학과 대표를 했다고 들었다.
삼수를 한 만큼 학생들을 대변하는 대표 일을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다. 내 이름을 가지고 요즘 말로 을 풀었다. 성스러울 ’, 영웅 ’, 자를 쓰는 내가 학과 대표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결국 내가 문과 대표로 뽑혔다.”
-학과 대표로 어떤 일을 했나.
미팅을 주로 담당했다. 다른 학교 학생들과 우리 학교 학생들의 사랑을 이어주는 중매 대표였다. 성사율이 괜찮은 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리를 마련하기 바빠서 정작 내가 미팅에 나가기는 어려웠다.”
-학과 공부는 열심히 하는 편이었나.
철학에 대해 깊게 공부하지 못했다. 행정고시를 공부하고 기자 시험을 준비하는 등 진로를 고민하는 시간이 많았다. 대학생 시절로 돌아간다면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 전반에 대해 열정을 갖고 공부해보고 싶다.”
 
  어린 시절 마포구민을 위해 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란 노웅래 동문은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속 한 구석에 간직하고 있었다. 대학에 진학한 뒤 어떠한 삶이 사람들을 돕는 삶인지에 대해 고민을 거듭했고 그는 기자란 직업에서 그 답을 찾았다.
-기자를 생각하게 된 배경이 있나.
남을 위해 사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대학교 3학년 때 언론에서 일하는 것을 생각하게 됐다.”
-처음 취직했던 곳은 언론사가 아니었는데.
취업이 어렵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졸업 후 근무할 수 있는 곳이 다양했다. 처음엔 제약 회사에서 일하다가 보험 회사로 이직했다. 보험 회사는 근무 환경이 자유로워서 틈틈이 언론사 공부를 준비할 수 있었다. 탈락의 고배를 여러 번 맛봤지만 최종적으로 매일경제신문 합격 통지를 받았다.”
-MBC로 다시 한 번 직장을 옮긴 이유가 있나.
정확히 말하면 나는 매일경제신문 내근 기자로 합격한 것이었다. 발로 뛰며 취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편집과 교정 업무를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많이 답답했다. 큰 보람을 느끼지 못해서 2년 만에 그만두게 됐다. 몇 개월 더 공부한 끝에 1985MBC 방송기자로 합격했다. 그때의 기분은 이루 말하기 어렵다.(웃음)”
-방송기자가 적성에 맞았나 보다.
현장을 취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재미를 느꼈다. 경찰서 취재기자 시절에는 이한열 열사, 박종철 열사의 변사체를 목격하기도 했다. 그런데 실제로 방송을 해보니 외향적인 사람에게 더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적은 편이었던 내게 조금은 힘든 부분이었다.”
-몸 담았던 방송 프로그램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시사매거진 2580>, <카메라 출동>과 같은 사회 고발성 프로그램들이 아직까지 인상 깊다. 사회의 어두운 면이나 비리를 밝히고 감동적인 선행들을 조명하는 컨셉이었다. 건강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화면에 담았다. 기자라면 사안을 사실대로 볼 줄 알아야 하고 문제를 취재해서 사회에 변화를 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나와 잘 맞는 프로그램들이었다.”
-기자로서의 가치관이 명확한 것 같다.
기자의 역할은 모두가 ‘Yes’라고 말할 때 ‘No’라고 답할 수 있는 데서 시작한다. 문제를 발견하면 주저하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그때 그때 문제를 지적하고 고발하는 ‘No man’이었다. 명확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노조에서 일했을 때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노조활동 중 힘든 일이 있었나.
기자협회의 총무를 지낼 때 단체 파업을 했던 적이 있다. 기자들의 복지나 근로 개선을 요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불공정보도의 관습을 타파하기 위한 목적에서 단식 투쟁에 나섰다. 당시 시사 프로그램 아이템을 정부에서 정해줄 정도로 불공정보도의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관련된 뉴스는 청와대 측에서 직접 대본을 만들어 주기까지 했다. 단식 농성에 들어간 지 5일 정도 지나니까 일반 노조원은 나 혼자 남았더라. 그 뒤로도 불공정 보도가 계속돼 언론인으로 일하며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다.”
-이후 MBC 연합노조위원장을 지냈는데.
경찰 공권력의 개입으로 파업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일반 노조원으로서 투쟁했던 것을 사람들이 높게 평가해준 것 같다. 전임 노조위원장들이 나를 추천했다고 들었다. 노조간부를 지내지 않고 일반 노조원에서 위원장직에 오른 최초의 사례가 아닐까 싶다.(웃음)”
-보람을 느낀 적도 있을 것 같다.
전교조가 출범했을 때 우리 팀이 처음으로 9시 뉴스에 내보냈다. 전교조와 관련된 내용이 메인 뉴스에 보도된다는 것은 시대상에 비추어 봤을 때 대단한 일이었다. 당시 전교조는 참교육을 추구하는 진정한 교육 집단의 성격이 강했지만 사회주의적 성향 때문에 MBC에서도 보도를 꺼리는 상황이었다. 또한 기성 언론 대부분이 전교조에 대해 관심조차 없던 상황에서 단독 보도에 성공한 데 보람을 느꼈다.”
 
  삶의 그늘진 부분을 취재한 내용이 사회에 반영되고, 개선될 때 행복을 느끼는 노웅래 동문. 언론인으로서 20여 년의 삶을 살았던 그는 200417대 마포갑 지역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정치인으로서 새 삶을 살게 됐다.
-정치에 대한 생각이 있었나.
평소 정치에 대한 아쉬움은 있었다. 기자 시절 다양한 부서에서 근무해봤지만 정치부를 못 가봤다. 아버지가 야당 국회의원으로 있었고 그 시절 방송은 여당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정치부를 꺼렸던 탓이다.”
-정치에 입문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카메라 출동> 팀장을 맡고 있을 때 한 지인이 정치를 해보지 않겠냐고 지나가듯 물어봐서 못할 건 없다고 대답했다. 그게 소문이 되서 내가 정치를 할 것이란 이야기가 돌더라. 소문을 듣고는 당황스러웠지만 기자로 일했을 때처럼 정직한 마음으로 정치를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정치계에 입문하게 됐다.”
-왜 열린우리당이었나.
열린우리당이 내세웠던 공약이 지역주의 타파다. 새로운 정치, 깨끗한 정치를 해보고 싶은 내 신념과 일치했기 때문에 열린우리당을 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민주당이 강세였지만 열린우리당에 입문하고 3개월 만에 당 지지율이 민주당을 압도했다. 옳은 선택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
어머니를 비롯해 친척들까지 강하게 반대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정치를 했던 아버지를 부양했던 데 다들 지친 상태였다. 내 편이 되어 준 사람은 아버지와 집사람뿐이었다. 아내도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먼 친척들까지 나서서 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하니까 나중엔 오기가 생겼던 것 같다. 자기가 교수 일을 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며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다.”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을 당시 어떤 심경이었나.
낙선 직후에는 섭섭함과 배신감이 들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고 뉴타운 바람이 불면서 야당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낙선될 줄은 몰랐다. 적은 표를 받은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국민들에게 마음을 간절히 구하지 못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국회의원으로서 지역을 위해 열심히 일했고 겸손하게 행동했지만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민심을 읽지 못했던 것이다. 한 표의 소중함과 정치가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 경험이었다.”
-정치가는 어떤 직업이라고 느꼈나.
기자에게는 사실관계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정치가에게는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하더라. 국민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헌법보다 상위에 있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어떤 문제를 판단할 때 정치가는 다수의 민심을 고려해야 함을 알게 됐다. 가치판단이 한층 더 어려워진 것 같다.”
-의원직을 탈환하고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은데.
“1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내 열정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보고 싶었다. 제보를 받고 관련 자료를 꼼꼼히 찾아나갔다. 그리고 결과를 분석해 언론에 공개했다. 꾸준히 보도 자료를 내며 노력한 결과, 노동자 12,000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새정치민주연합 사무총장으로서 지방선거에 참여했다.
국민들은 기존 정치권에 있던 사람들을 올드 보이로 본다. 정치를 한 지 10년밖에 되지 않은 나도 국민들에겐 올드 보이다. 안철수 의원과 같은 구 새정치연합 쪽 사람들만 새정치를 하는 사람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어 곤혹스러웠다. 결국 지방선거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국민들에 대한 믿음과 신뢰의 문제는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지역을 위해 이루고 싶은 일이 있나.
국민들이 경의선을 타고 유럽까지 갈 수 있는 21세기 대륙철도 시대를 열어가고 싶다. 마포는 북한으로 향하는 경의선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지금은 남북관계 때문에 힘들지만 통일이 되면 공덕역에서 티켓을 끊어 북한, 중국, 러시아, 프랑스까지 횡단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지역을 위한 일뿐만 아니라 민족 전체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내 고향 마포는 경의선의 출발지이면서 동시에 남과 북의 경계이기도 하다. 마포를 기반으로 남과 북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 남북 교류를 통해 통일에 한걸음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정치인이라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마음속에 의에 죽고 참에 살자라는 교훈을 심어 준 학교다. 기자로 일하며 많은 언론인들이 이용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때마다 교훈을 되새기며 언론인으로서 정도(正道)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중앙대에서 발견한 중용의 정신을 염두에 두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깨끗한 정치를 만들어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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