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에게 헛된 희망만 심어주었던 부조리한 사회는 사람들을 잉여로 만들었다. 사회가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월간잉여를 구독하고, 웹진을 보고 때로는 실제 만나기도 하며 대안적 주체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황금연휴 막바지 노들텃밭에서 새로운 꿈을 꾸는 잉여들을 만나보았다.
 
[잉여사회 - 증상]
 
 ▲오두막의 잉여들, 준수의 비눗방울 맛 좀 볼래요?

 

 ▲각자 그린 잉여로서 생존하는 법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황금연휴 노들텃밭에 보인
국가대표(?)잉여들
 
사회와 현실을 이야기하며
오늘을 즐기다
 
 
  황금연휴의 막바지였던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 저녁 9시. ‘월간잉여’ 페이스북에는 다음날 사생대회가 열린다는 글이 올라왔다. 사생대회 20시간 전 뜬금없이 올라온 모집 글이라니. 게다가 이 황금연휴에 대체 누가 그림을 그리러 나올 것인가. 진정한 ‘잉여’가 아니라면 참여할 수 없는 잉여들의 사생대회에서 월간잉여 최서윤 편집장과 잉여들을 만났다.
 
  월간잉여는 말이 월간이지 몇 달에 한번 꼴로 나오는 자유로운 독립 잡지다. 
 
  ‘준비생’들이 남겨진 존재인 ‘잉여’로 불리고 ‘쓸데없는 일’이 세속적인 기준에서 ‘잉여짓’으로 치부되는 일에 최서윤씨는 문제의식을 가졌다. 그렇게 2012년 2월 월간잉여는 세상에 처음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자칭 잉집장으로 불린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잉집장은 월간잉여들과의 소통법으로 사생대회를 택했다. 대회의 수상작은 월간잉여의 표지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세 번째를 맞이하게 된 이번 사생대회의 주제는 ‘잉여로서 생존하기’다. 잉집장이 운영하는 웹진인 ‘여잉추(여기 잉여 추가요)’에서 일구고 있는 노들텃밭이 장소로 정해졌다.
 
  공지가 올라온 다음날인 6일, 약속 시간은 오후 네 시. 정해진 시간을 훌쩍 넘겼지만 사생대회가 열리기로 한 원두막엔 흙먼지만 날리고 있었다. 하루 전날 공지를 해서 그런지 망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무렵 어디선가 잉여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사생대회에 참가한 사람은 총 열두 명. 생각보다 꽤 성공적이다. 잉여엄마 김지연씨를 따라 온 네 살짜리 준수는 비눗방울 총을 쏘며 잉여들의 서먹한 분위기를 깨준다. 최서윤 잉집장은 망한 꼴을 못 보여줘서 아쉽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내심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 같다. 작은 오두막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이들은 조용한 침묵 속에서 각자 잉여로 생존하는 법을 그려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만나 어색했던 표정은 주고받는 말 한마디와 서로에 대한 관심에 금세 부드러워졌다.  
 
  사생대회라고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준비물은 간단하다. 16절지 종이 한 장과 그림을 그릴 펜이나 색채도구가 끝이다. 한 가지 준비물이 더 있다면 잉여들의 사이를 돈독하게 해 줄 간식거리. 그림을 그리는 손 반대편엔 군것질 하는 손이 바삐 움직였다. 
 
  그림그리기가 끝난 후에는 자기소개와 그림을 설명하는 시간이 마련됐다. 대학에서 언론을 전공하고 있는 조태희씨는 언론사 인턴으로 지원하기 위해 여러 번 자기소개서를 썼지만 그 때마다 항목에 ‘인턴 경력’이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인턴을 시작하기 위해 첫 지원을 하는데 인턴 경력이라니요. 과감하게 ‘셀 합치기’를 해서 항목을 없애버렸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뿌듯해서 이미 붙은 것처럼 주변에 자랑하고 다녔는데 현실은 아니었네요”라며 말을 시작했다. 인턴경력에 추가하기 위해 1인 미디어를 설립했다는 그는 그림 대신 글씨로 표지를 꾸몄다. “늦게 와서 색칠은 다 못했어요”라며 보여준 종이 위에는 ‘잉여道 非常잉여(잉여도 비상잉여)’가 쓰여 있었다. 노자의 도덕경 첫머리에 나오는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를 바꿔 쓴 글이다. 잉여라함은 잉여가 아니다라는 역설적인 의미를 담은 그의 글은 취업과 상관없는 쓸데없는 짓도 잉여 짓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잉여라는 용어 자체가 아닌 그 본질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월간잉여의 애독자인 오진석씨는 사생대회가 열린 바로 이곳에서 잉여의 끝을 느꼈다고 이야기했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잉여들끼리 연대하며 놀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단합의 방법으로 춤추기가 떠올랐어요” 그의 종이 위에는 오두막과 텃밭에서 행복해 보이는 잉여들이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취업의 문턱에 서있는 김한솔씨는 잘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손이 가는 대로 그리는 것이 잉여의 정신이라며 종이 위에 오늘 만난 것들을 채워 넣었다. 준수의 비눗방울과 미음(닉네임)씨의 강아지에서 시작한 그녀의 그림은 사생대회에 오기 전에 탄 자전거와 노란리본에까지 다다랐다. 잠깐의 여유조차 없을 것 같은 취준생이 잉여라니. 그녀는 청춘에게 열정 팔이를 권하는 사회 시스템에 딴지를 거는 것이라며 잉여가 하나의 패러다임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그녀는 “제 일상은 과제와 취업 준비로 가득 차 있지만 그나마 소박한 탈출구를 말하자면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이렇게 그림 그리고 허심탄회하게 수다를 떠는 일이죠.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 버거워도 오늘 하루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털어놨다.
 
  ‘감자 먹을래?’ 최서윤 잉집장의 그림 속에는 농부가 못생긴 감자를 들고 씩 웃고 있다. 노들텃밭에 심은 작물 중 제일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나는 감자라며 이 그림을 그렸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보는 사람을 웃게 만드는 잉집장의 그림 이야기도 독특하다. “우리가 1차 산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대 사회로 올수록 상공업은 발전하지만 일자리가 줄어들고 인간은 가치 없어지죠.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자기의 손끝으로 무엇인가 만드는 것입니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정보를 제공하고 싶었던 그녀는 언론인을 희망했지만 언론사 시험을 2년간 줄줄이 낙방하며 생각을 바꾸게 됐다고 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했다는 것. 그 생각의 끝에는 사회 어딘가에서 ‘준비생’으로 살고 있는 이들이 자신을 털어낼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잡지가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잉집장의 잡지를 읽고 이곳에 모인 그들이 생각하는 잉여는 각각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 모든 잉여들은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멋진 사회를 만들고자 했으며 현재의 상황에 왠지 모를 자부심도 느끼고 있었다.
 
  어느새 사생대회 참가자들의 자기소개와 그림설명이 끝난 오두막을 찬 강바람이 휘감는다. 와인을 한 입씩 머금으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텃밭이 문을 닫을 시간이 온 것이다. 다함께 텃밭을 나오는 길 사생대회를 기념하기 위해 단체사진도 한 장 찍었다. 황금연휴의 완벽한 마무리다. 
 
  높은 63빌딩 뒤로 붉은 해가 저물어간다. 한강 대교를 쌩쌩 달리는 차를 뒤로한 채 오늘의 잉여들은 생명의 다리에 새겨진 문구를 음미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는다. 할 일이 없어도 내일 하루를 사는 게 걱정되거나 버겁지 않고, 아무리 바빠도 마음만은 여유로운 자칭 ‘잉여’들은 그렇게 내일도 행복할 것이다.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