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론 줄에 매단 수 천 개의 숯 조각이 아름다운 형상을 빚어낸다. 그의 손길을 통해 가느다란 줄에 매달린 숯 조각들이 이루는 ‘조합체(Aggregate)’의 모습은 기자의 감탄을 자아낸다. 숯이란 재료를 통해 인간문화를 형상화하는 설치미술가 박선기 동문은 순간적인 구상보다 끊임없는 고민의 연속 끝에 작품을 제작해 왔다. ‘매다는 코리안(Suspending Korean)'이란 예칭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박선기 동문. 경기도 남양주시의 작업실에서 다음 작품을 위해 분주하는 그를 만나봤다.
 
 사진 박가현 기자
 
나일론 줄에 숯을 매달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형상화한다

3,000점 이상의
작품제작을 통해
작품의 허점을 제거한다
 
 박선기 동문의 남양주 작업실 한쪽엔 수많은 전시일정으로 작품일정이 빼곡히 차 있다. 국내·외 전시일정, 전국각지에 판매 예정인 그의 작품 설치일정과 더불어 해외에 설치될 작품 일정까지. 한 달에 최소 두 번 해외출장을 나간다는 박선기 동문. 조각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그날부터 지금의 일정만큼 치열한 미술인생을 살아왔다.
 
-작품일정표가 굉장히 빼곡해 보인다.
“조각가로서 일을 시작한 이후 쭉 그래왔듯이 개인전을 열고 화랑의 의뢰를 받아 작품을 제작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이번 달은 중국 상해 공원에 조각상을 설치해달라는 상해 시청의 의뢰를 받아 상해 미팅을 다녀왔다. 얼마 전엔 홍콩 관광청이 홍콩을 상징할 수 있는 조각상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해 8박 9일 동안 홍콩 시내를 샅샅이 확인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의뢰를 받았는데 경로가 궁금하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11년, 영국 런던에서 1년, 독일 만하임에서 2년 동안 유학생활을 했다. 외국에서 수많은 전시회를 하면서 다양한 화랑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작품에 대한 인정이 기반이 되어있으니 많은 의뢰인들에게서 연락이 오고 여기저기 입소문이 나서 지금처럼 수많은 의뢰를 받아오게 된 것 같다.(웃음) 그동안 세계 각국에서 개인전, 2인전, 단체전을 열었던 게 내 미술인생에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전시회의 형태에 따라 마음가짐이 다를 것 같은데.
“예술가는 개인전을 통해 자신의 작품세계를 전부 표현하는 기회를 갖는다. 전시된 작품들을 확인하고 남들이 내 수준이 판가름 내는 게 개인전이다. 조각가 박선기를 보여주는 전시회인 만큼 개인전을 준비할 땐 굉장히 신중해진다. 오히려 단체전을 준비할 땐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한다. 내 색깔이 여러 명 사이에서 가려지다 보니까 그만큼 부담감이 덜하다.” 
 
-미술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경상북도 선산에 있는 독일 성 베네딕트 수도원재단의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선배들의 권유에 따라 미술부에 입부하여 미술을 처음으로 시작하게 됐다. 그런데 미술을 하다보니까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예술이란 게 마약과 같아서 한 번 빠지게 되면 잘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만두기가 쉽지 않아 중학교 미술부에서 매일 그림을 그리면서 지금까지 오게 됐다.”
 
-미술 중에서도 조각을 하게 된 연유는 무엇인가.
“고등학교 땐 조각보단 수채화를 전공하려고 했다. 수채화뿐만 아니라 풍경화부터 정물화 그리고 데생까지 하면서 그릴 수 있는 그림은 다 그려봤던 것 같다. 그런데 고2때 미술 선생님이 나에게 회화보단 조소가 더 잘 어울린다더라. 인력이 과도하게 많던 회화학과에 비해 미술적으로 차별화될 수 있는 조소학과에 입학하라는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중앙대에 입학하게 됐다.”
 
-학부 때 처음 접하게 된 조소는 어려웠을 것 같은데.
“회화와 조소는 예술적인 영역이 달라서 적응하는데 힘들기도 했다. 회화는 평면에 그리는 2차원적인 미술이지만 조소는 입체적인 조각물을 3차원적으로 제작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3차원을 하던 사람이 2차원으로 가는 건 쉽지만 2차원을 하다가 3차원으로 가는 건 힘들다. 고등학교 때까지 했던 미술은 평면인데 조소는 입체적이다 보니 어떻게 해야 될지 어려웠다. 그래도 캔버스의 크기나 색감이 한정적이었던 2차원 미술과는 달리 규모의 한계가 없는 3차원 조소의 자유분방함이 내 적성과 잘 맞았던 것 같다.”
 
-어떤 학부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하는가.
“1,2학년 때는 놀기 바쁘다가 3,4학년 때부터 공부를 제대로 하게 됐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면서 사물 주위의 환경과 재료에 따라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조소의 기본적인 원리를 배우게 됐다. 보는 위치에 따라 특정 사물의 분위기를 다르게 연출하는 조형적인 능력을 기를 수 있었던 시기였다.”
 
 
 중앙대 조소학과에서 조각가가 갖춰야 할 조형적인 눈을 발판으로 성장하던 박선기 동문. 1994년도 학부 졸업 이후 그는 청운의 꿈을 품고 밀라노 유학행을 떠나게 된다. 시작은 밀라노였지만 활동영역은 세계전역으로 확대됐다. 
 
-어떻게 유학을 결심하게 됐나.
“기본적으로 서양미술을 전공한다면 전통 서양조소에 조예가 깊은 나라로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뉴욕이나 독일 쪽으로 유학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담당교수님이 밀라노로 유학행을 강력하게 추천하셔서 얼떨결에 밀라노국립미술원(브레라)로 가게 됐다.(웃음)”
 
-조예의 폭이 말할 것 없이 넓어졌을 것 같다.
“브레라에서 정말 제대로 배웠다. 80년대 우리나라의 미대는 학생들에게 감각을 가르치는 편이었다. 선생들이 개인적인 감으로 학생들의 작품을 평가했단 뜻이다. 그런데 밀라노에선 확실히 달랐다. 특정 재료를 통해 발휘하는 미적효과나 평면위의 초안을 3차원적인 조형물로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을 가르치는 게 상당히 이성적인 교육방식인 것 같았다.”
 
-외국생활을 하다보면 시련도 찾아오기 마련일 텐데.
“국립학교를 다녀서 학비 걱정은 없었다. 대신 밀라노에서 생활비를 마련하는 게 만만치 않아 2년 정도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밀라노까지 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부로 굶어 죽으면 죽지, 아르바이트는 절대 안하고 미술로만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제작한 작품들을 보여주는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여러 밀라노 화랑에 제출하다가 1997년 갤러리 로렌스 루빈이란 화랑과 전속계약을 맺게 됐다. 화랑 전속작가로 연봉을 받으면서 작품을 팔게 돼 경제적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었다.(웃음)”
 
-화랑생활이 본인에게 미쳤던 영향이 있다면.
“오전엔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다음날 새벽 2시까지는 화랑작업에 몰두했다. 그렇게 26살 때부터 작업과 공부에만 빠져 치열하게 살았다. 의뢰인들의 요구사항에 맞춰 작품을 제작하면서 개인적인 작품세계도 한층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때부터 화랑작가로서 밀라노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베니스, 프랑스 파리, 미국 워싱턴, 뉴욕 그리고 L.A로 활동영역을 넓혀 작가로서의 입지를 쌓을 수 있었다.”
 
-3,000점 이상을 다작할 수 있던 비결이 따로 있는가.
“비결보다는 다작을 하는 이유를 생각해봐야 된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작품의 수준을 올리는데 제일 쉬운 방법은 최대한 많은 작품을 만들어 보는 것이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다. 화랑에서 작업한 작품 말고도 개인적으로 여러 실험을 하면서 작품에 대한 안목을 넓히게 됐다. 대신 작품을 만들 때는 생각만 해선 안 된다. 그 생각을 내 손으로 실현시키는 과정을 거쳐야 발전할 수 있다.”
 
-작품을 제작하면서 수준이 향상되는 걸 느끼는가. 
“내가 어떤 수준까지 올라왔는지는 항상 느끼고 있다. 아직 더 노력해야 될 부분들이 많은 것 같다. 일류작가와 삼류작가는 작품들의 평균적인 수준에 의해 구분된다. 가끔씩 좋은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가 삼류라면 일류는 항상 일정수준 이상의 작품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일류가 되기 위해선 작품의 빈틈이나 실수를 계속해서 줄여야 하는데 나도 수십 년 동안 작품의 허점을 제거해 나가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작품의 제작방식이 궁금하다.
“스케치를 하면서 초안을 그린다. 작품의 특징을 살리고 깊이를 이끌어내기 위해 초안을 수만 번 발전시켜 그려내는 과정을 거친다. 초안을 그리고 나면 재료를 선정하고 작품의 크기를 조정하는 과정을 통해 작품에 내가 원하는 효과를 주려고 한다.”
 
-초안을 형상화시킬 때 중점을 두는 부분이 있다면.
“형태, 재료, 기대효과 등 굉장히 많은 것들을 신경쓰면서 조각을 제작한다. 초안은 단순한 면에서 일어나는 가상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깊은 사고를 요구하진 않는다. 그런데 입체는 가상이 아닌 실질로 일어나는 미술이어서 깊이 있게 사고해야 된다.”
 
 
 3,000점 이상의 다작 활동을 통해 작품을 빚어내는 그의 손길은 더욱 부드러워졌다. 그의 손길을 거친 작품들은 세계 각지에 팔리게 됐고 미술시장에서 조각가 박선기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특히 숯과 매다는 기법(Hanging)을 접목시켜 세계인들을 사로잡은 박선기 동문은 ‘매다는 코리안’이란 예칭을 얻기까지 했다.
 
-숯을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환경이 자연 그 자체인 경상북도 선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자연이 전부였던 나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다가온 건 산과 바람 그리고 나무였다. 처음엔 바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형상화하는 게 어려워서 나무를 재료로 쓰고자 했다. 자연 속에서 고민하다보니 나무를 소재로 출발하여 숯이란 재료까지 도달하게 됐다.”
 
-매다는 기법은 어떻게 창안하게 됐나.
“사실 매다는 기법은 이전부터 일부 작가들이 쓰던 방식이다. 학부시절 때 학교석조장에 널려 있던 돌조각을 낚싯줄에 매달면서 매다는 기법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의 무게 때문에 줄이 끊어지기도 해서 무게가 가볍고 미적효과가 뛰어난 숯으로 재료를 대체하게 된 것이다. 숯과 매다는 기법이 내 작품세계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배경이다.”
 
-숯은 이젠 빼놓을 수 없는 재료인 것 같다.
“숯은 자연의 종착점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작품을 통해 그려내고 싶었는데 숯을 인간의 건축문화와 접목시키기로 했다. 계단, 기둥, 아치같이 인간의 건축물을 숯의 조합으로 형상화한다는 뜻이다. 자연을 상징하는 숯으로 인간건축물을 형상화하여 자연과 인간문화를 미술적으로 연결하려 했다.”
 
-숯이 주는 효과는 무엇인가.
“숯을 자연의 끝으로 생각해 재료로 썼지만 한편으론 숯이 내 작품에 동양적인 분위기를 내는 것 같기도 하다. 또 숯을 통해 자연미를, 나일론 줄을 통해 인공적인 미를 공존시키는 재미가 있다. 나일론 선이 많다보니 조명을 비추면 빛이 생기는데 이럴 때 작품을 보면 긴장감이 생겨 매다는 기법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조각과 숯을 통한 동양적인 매력으로 대중성을 확보하는 박선기 동문. 그러나 여느 예술가처럼 그는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의 경계선에서 고민한다. 
 
-예술인이라면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늘 고민하는 것 같다.
“사실 전업작가를 하려면 대중성을 무시할 수 없다. 내 고집만 부릴 거면 산 속에 들어가서 만들면 된다. 대신 내 작품 수준을 대중에 맞추지는 않는다. 수준을 대중의 눈에 맞춰버리면 미술은 완전히 하향평준화 돼버린다. 가끔씩 한 번 와서 보는 사람들과 매일 미술을 하는 사람들 간의 차이는 굉장히 심하다.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건 작가의 몫인 것 같다.”
 
-작품이 대중성을 확보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사람들이 봤을 때 거부감을 안 느끼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인지 내 작품은 조금 온순한 편이다. 대중들은 신기하고 호기심이 많은 작품에 많이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때도 있다.”
 
-본인의 작품은 대중에게 어떤 매력을 표출한다고 생각하나.
“내 작품은 조각과 매다는 작품,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구성된다. 이런 식으로 작품의 형태를 다변화시켜야 다양한 영역대의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양과 동양은 작품을 보는 눈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나도 그에 맞춰 작품의 폭을 넓혀야 한다. 동양인들이 시각적으로 화려한 작품을 선호한다면 서양권 사람들은 화려하진 않지만 묵직한 분위기의 숯 작품을 좋아하는 편이다.”
 
-예술인이라면 갖춰야 할 덕목이 있다면.
“끈질긴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예술인은 소질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미술하는 사람 입장에서 봤을 때 천재는 없다. 99% 노력이다. 투자하는 노력의 정도에 따라 수준이 달라지는 게 예술이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학생들에겐 대학에서의 학업생활이 인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 중앙대는 젊은 시절 나에게 재미있는 추억을 선사함과 동시에 학업을 통해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게 해준 고마운 곳이다. 대학에서 학생들 인생의 방향이 더욱 원활히 설정될 수 있게 중앙대가 더 발전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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