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 동문의 일원으로서 86학번 고 이내창 후배의 25주기를 맞아 글로써 삼가 명복을 빌고, 유가족에게 애도의 뜻을 표한다. 

 
  이내창이 강원도 고성에서 군복무를 하고 조소학과에 입학한 1986년은 제5공화국 시절로, 이른바 서슬 푸른 공안정국이었다. 그해에 5ㆍ3인천사태, 부천서 성고문사건, 건국대 애학투련사건이 이어졌다. 다음해에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 대한 은폐조작이 폭로되었고, 이한열 최루탄 사망사건 다음날 휴화산이 터지듯 6ㆍ10민주항쟁이 일어났다.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이 열렸고, 광주청문회가 시작되었다. 
이내창이 죽은 1989년에는 시대의 격랑이 한반도를 거세게 때렸다. 문익환 목사 평양 방문, 서경원 의원 밀입북사건, 임수경 북한 방문으로 한반도 전체가 들썩일 때 이내창은 중앙대 안성캠퍼스의 총학생회장이 되어 시위 대열의 선봉에 섰다. 그해 4월 3일에 안기부 등 공안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되었다. 5월 28일에 전교조가 결성되었고 7월 9일에 전교조 합법성 쟁취대회가 열렸다. 정국이 벌집을 쑤신 듯한 나날이 이어지던 그해 8월 15일 저녁, 이내창은 거문도 소재 유림해수욕장 근처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전날인 8월 14일, 신원 미상의 두 남녀가 학교를 찾아와 총학생회장의 소재를 물었다. 내리 중앙슈퍼 앞에서 이 두 사람과 이내창이 30여 분 간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8시 이내창은 여수항에서 거문도행 신영훼리호를 탔고, 그날 저녁 6시 30분, 거문도 유림해수욕장 인근 바닷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상의ㆍ안경ㆍ시계가 없었고, 하의ㆍ양말ㆍ신발은 그대로 착용한 상태였다. 부산의 부림사건도 영화 <변호인>을 통해 세상에 밝혀졌고, 각종 의문사의 진상이 밝혀지고 있는데 왜 아직도 이내창의 주검은 미궁에 빠져 있는 것일까.
 
  검찰과 학교측에서 공동으로 사체를 검안했고 여수 전남병원에서 검찰과 대책위가 공동으로 부검을 실시했다. 당시 의대 교수였던 장임원 의사는 사건현장에 내려가 목격자 인터뷰를 하고 부검에 참여했는데 외상에 의해 실신상태에 이른 다음 익사했다고 했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이내창이 왜 아무런 연고가 없는 그곳에 갔는지, 동행한 두 남녀가 그의 죽음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내창의 시신은 그해 10월 6일 망월동 5ㆍ18묘역에 안장되었고, 검찰은 실족익사로 수사를 종결하였다.
 
  꽃다운 청춘 하나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연고 없는 곳으로 배를 타고 갔고, 바닷가에서 청춘을 마감하였다. 이내창은 학생운동의 열기가 뜨거웠던 시대에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이긴 했지만 과격하거나 무모한 운동권 학생이 아니었다. 많은 친구와 선후배들이 그의 과묵함과 소탈한 성격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적인 매력이 넘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애통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까지 이내창 후배를 만난 일이 없다. 그가 대학생들이었을 때 나는 회사에 갓 입사하여 일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의문의 죽음, 그리고 10년』 책자에 나와 있는 전성태 작가의 약전을 잃고 참 아까운 후배가 이렇게 애석하게 일찍 죽었구나 하는 마음을 계속 지녀왔다. 
 
  이내창은 1962년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서울 청량리와 창신동 일대 셋방을 전전하며 전구 공장, 포목점, 쌀가게 등을 했다고 한다. 사업마다 실패하던 아버지가 한국전력의 전차 차장 자리를 얻고서 신당동 언덕바지에 비로소 집을 마련하였다. 평범한 초, 중, 고교 시절을 보내다가 중동고 3학년 때 광주항쟁을 간접적으로 겪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이후 사회봉사활동 동아리 정우회에 가입해 광주 탄압 규탄대회를 갖고자 유인물을 작성하는 일에 협력한다. 사전에 발각되어 일곱 명 친구가 구속되자 내창은 예비고사 전날까지 사식을 넣어주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지냈다고 한다. 
 
  입시에 낙방을 했고 재수하여 인천대 미술학과에 입학했지만 휴학을 하고 군대를 갔다. 제대 후 다시 입시를 치러 입학한 중대생 이내창은 친구들보다 나이도 많았고 가난한 집안의 막내인지라 학업에 열중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총학생회장 시절, 혈서를 쓰기도 하고 단식투쟁을 하기도 했지만 늘 모범을 보이고 학업에 성실히 임했다고 한다. 
 
  안성캠퍼스 조소과 앞마당에 세워진 흉상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그대 부활하는 반도의 곳곳마다 애국의 함성으로 함께하리라” 바라건대 그의 죽음이 민주화의 재단에 켜진 촛불의 의미임을 지금 대학생들은 잊지 말았으면 한다. 당시 그와 함께 거문도에 갔던 두 사람 등도 그의 죽음에 대해 솔직히 말해 사인이 제대로 규명되었으면 한다. 3월 31일부터 4월 5일까지 흑석동과 안성교정 전시장에서 사진전시회가 열리니 다른 행사에는 참여하지 못할지라도 이 전시회에는 꼭 가보았으면 한다. 우리 학교는 ‘의에 죽고 참에 살자’가 교훈이다. 4ㆍ19 때 숨진 6명의 선배와 이내창 후배 모두 모교의 정신을 빛낸 촛불이다 촛불 앞에서 고개 숙여 다시 한 번 명복을 빈다. 
 
이승하 교수
공연영상창작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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