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간 이어온 의문의 죽음과 의도된 죽음 사이의 줄타기
왜곡된 역사 바로잡지 않으면 또 다른 국가폭력 자행될 것
 
 
“우리는 그를 기억해요. 이 기억이 반복되고 이어진다면 언젠가 진실을 은폐했던 자들도 진실을 털어놓을 거예요.”
이내창 열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지 25년이 지났다. 죽음의 진실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진실을 좇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잊지 않았다. 그가 정의를 위해 흘린 피를 잊지 않았다.
 
의혈의 정신으로
 
  1989년 열사가 떠난 안성캠 총학생회실 칠판에는 여전히 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자기로부터의 결사, 자기로부터의 투쟁.’ 그는 이 문구를 좌우명으로 삼고 수첩 어귀마다 적어 놓았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선 다른 사람이 아닌 본인부터 변화해야 한다는 열사의 실천적 신념이 드러난다.
 
  이내창 열사는 1986년 중앙대 조소학과에 입학했다. 이듬해엔 조소학과 학생회장을, 1989년엔 안성캠 총학생회장을 역임했다. 총학생회장 재임 중 그는 8천여 명의 안성캠 학생들을 세 번씩 만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주현 동문(경영학과 89학번)은 “내창이형은 본인이 일정이 없는 한 학우들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왔다”며 “논리로써 사람을 설득시키려 하기보다는 일상생활 작은 부분에서부터 약속을 실천하여 신뢰를 쌓았다”고 말했다.
 
  그는 주위의 삶, 민중의 삶을 외면하는 것은 진정한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1990년 안성캠 총학생회장을 역임한 김성희 동문(문예창작학과 84학번)은 “농활에 가서도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며 미술학도로서 할 수 있는 사회적 실천을 적극적으로 보여준 사람”으로 열사를 회상했다. 열사는 미술학도가 민주화를 위해 현실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 무언인지 고민 하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조소학과 내에 <민족미술연구회>동아리를 창설하고 <청년미술대학여름한마당> 행사를 안성캠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진실규명 ‘불능’의 죽음
 
  이내창 열사는 자신의 예술관을 마음껏 펼쳐보기도 전인 1989년 8월 15일 오후 6시 30분 거문도에 소재한 덕촌리 유림 해수욕장에서 싸늘한 사체로 발견됐다. 예정대로라면 그는 수원역 앞에서 열리는 민족해방절 집회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열사는 가본 적도 없고 지역적 연고도 없는 거문도에 신원미상의 두 남녀와 있었다. 
 
  당시 정부는 이를 실족사라 규정했다. 하지만 의문점은 너무나도 많았다. 책임감이 강했던 그가 예정된 행사를 제쳐놓고 거문도로 간 것부터 의문이었다. 실족사라고 했지만 사고 현장 주변에는 실족할 만한 장소가 없다는 주민들의 의견도 무시할 수 없다. 최초 시신을 검안했던 의사는 시체에 외상이 있다고 소견서를 제출했지만 언론에는 해당 내용이 실리지 않았다. 학생조사단이 밝혀낸 동행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이를 증언한 사람들을 회유하거나 협박하는 등 고인의 행적을 혼자 있었던 것으로 조작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당시 공안 당국이 문제 삼던 운동권세력과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다. 평양축전 관련 그림을 제작하여 평양에 보낸 차일환(회화과 81학번)의 배후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지목됐다. 이내창 열사는 전대협 대의원이었다. 그가 공안당국의 수사 대상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의문의 죽음과 의도된 죽음 사이의 줄타기는 신군부의 정통성에서 시작한다.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정부에게 정통성을 찾긴 힘들었다. 당시 대학생들은 광주민주항쟁의 진상규명을 외치며 저항했다. 신군부는 이를 누르기 위해 보안사령부와 국가안전기획부를 동원해 학생운동을 탄압했다. 시위와 운동에 참여한 대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된 뒤 강제징집됐다. 군대 안에서 그들은 사상전향과 프락치가 될 것을 강요받았다. 이것이 1980년대 학생 운동권과 의문사의 정 가운데 있었던 녹화사업의 실체이다. 이후 미심쩍은 군내 의문사가 연이어 발생한다. 영외에서도 이내창 열사와 같은 의문의 죽음이 계속됐다.
 
진실을 밝히는 불빛
 
  부당한 국가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전국 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유가협),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 연대회의,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등 각종 시민단체는 의문사 및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김대중 정부로 넘어오면서 유가협 가족들은 수사기관 항의방문, 대국민 캠페인, 국민토론회 등을 개최하며 의문사진상규명 관련법 제정을 요구했다. 이들은 422일간의 여의도 천막 농성 끝에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특별법) 제정을 얻어낸다.
 
  대통령 산하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도 설치됐다. 공권력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살해됐다고 의심되는 죽음의 진상을 규명하는 기구다. 위문사위는 1기, 2기 두 차례에 걸쳐 총 82건의 사건을 조사했다. 이 중 30건의 사건만이 의문사로 인정됐다. 이내창 열사 사건을 비롯한 다수의 사건은 조사 불능으로 결정돼 진상 규명을 이루지 못했다. 
 
  이는 위원회에 강제력이 없어 조사 권한이 미약했던 점, 조사 기간이 촉박했던 점, 국가정보원, 국군기무사령부 등 국가기관의 비협조가 심했던 점 때문으로 보인다. 특별법은 실효성이 없다는 이유로 2009년 4월 폐지되기에 이른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는 과거사 청산을 국정 운영 방침으로 삼는다. 2005년 5월 31일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을 공포하고 같은 해 12월 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진실화해위)를 발족한다. 이 위원회는 광복 이후부터 권위주의 통치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반민주적, 반인권적 사건의 왜곡되거나 은폐된 진실을 규명하는 임무를 맡았다. 진실화해위에서 진상이 규명된 사건의 경우 국가가 공식 사과하고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과거사에 있어 이전 정부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원회 과정에서부터 과거사 관련 위원회의 대폭 폐지를 주장했다. 이후 한나라당 중앙당을 통해 제주 4·3사건, 거창 노근리사건을 다루는 위원회 등 9개의 과거사 관련 위원회를 진실화해위 하나로 통합하는 법안을 발의하는 등 그동안의 과거사 진상 규명 노력에 역행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이렇다 할 활동은 많지 않다. 오히려 이전까지 ‘민주열사’라 불리던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의 호칭을 부정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은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다음달 5일 경기도 이천시에 새로 마련된 민주화운동 기념공원으로 묘를 이장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분과회의에서 유가족들에게 합동 안장식 플래카드 및 표지석에 ‘민주열사’가 아닌 ‘민주영령’ 호칭을 쓰라고 제안한 것이다. 유가족들은 이를 반대해 이장을 무기한 연기했다. 같은날 예정된 이내창 열사의 묘 이장 역시 취소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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