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행복이란 
자신이 겪는 고통을 통해 
자신의 앎을 증대시키면서 
스스로 생명속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나는 사랑한다. 상처를 입어도 
그 영혼의 깊이를 잃지 않는 자를.
- 니체
 
 역사의 연도를 살펴보면서 가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19세기말을 눈여겨보면 더욱 그렇다. 어떤 사실들은 우연이지만 시대에 대한 명백한 징후로도 읽힌다. 1900년, 독일의 철학자 니체(Nietzsche, Friedrich Wilhelm)가 죽었다. 니체는 19세기 말에서 1차 세계대전 사이의 이른바 ‘아름다운 시기’(Belle epoque)를 살았지만, 그는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에 대한 탄성으로 가득한 유럽을 우울하게 응시했다. 이성과 기술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한 세계의 파국을 예감한 그의 철학은 세계대전을 앞둔 유럽을 향한 일종의 ‘경고’였지만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니체를 다시 해석해낸 것은 그 이후의 세대였다. (인간은 늘 파국을 끝내 겪고 나서야 반성을 시작하는 어리석음을 지녔다) 니체가 채찍을 맞는 말을 끌어안고 광장 한복판에서 오열하면서 죽은 1900년, 자신의 시대와 불화했던 니체와는 달리 당대에 전성기를 맞이한 두 학자의 저서가 나온다. 그 두 사람은 바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이다. 1900년에 나란히 출간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베르그송의 『웃음』은 혁명적인 저서였다. 
 
 이성과 합리를 맹신했던 그 시대에 프로이트는 합리적 통제가 불가능한 ‘무의식’의 존재를 알렸고, 베르그송은 일종의 광기로 치부되었던 인간의 ‘웃음’을 분석하며 거기에 내재된 공범의식과 ‘기계적인 것’의 폭력성을 알렸다. 니체의 언어가 묵시록적인 잠언으로 이루어진 예언서였다면, 프로이트와 베르그송의 연구는 가족과 사회, 국가의 질서에 영향을 받으며 요동치는 인간의 내면에 대한 해부학이었다. 그렇게 19세기가 저물고 맞이한 20세기의 비극은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진보한 기술은 잔혹한 전쟁과 학살의 도구로 이용됐고, 특정한 민족과 사회, 국가에 예속된 인간들은 끊임없이 체제의 의도대로 훈육되며 증오하고 대립했다. 
 
 니체의 죽음, 프로이트와 베르그송의 저서 출간이 겹친 것은 그들이 의도하지 않은 우연일 것이다. 그러나 1900년의 이 얄궂은 우연은 프로이트와 베르그송의 말년에도 이어졌다. 무의식을 연구하면서 인간을 치유하고자 했던 프로이트의 노력과 획일성을 거부하는 생명의 비약(엘랑비탈)을 주장한 베르그송의 노력은 경제 불황과 민족적인 증오심으로 발현된 파시즘과 또 한 번의 세계대전 앞에서 무력했다. 프로이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에 죽었고, 베르그송은 프랑스가 나치에게 점령당한 다음 해인 1941년에 죽었다. 두 사람은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삶을 마감했지만 그들의 연구는 후배들에 의해서 지속되었다.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과 대중심리』(1933-히틀러가 집권한 해이기도 하다)와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는 프로이트의 연구를 기점으로 삼아서 스스로 자유를 반납하고 권력에 예속되던 대중을 분석한 명저이다. 한편 생명의 ‘창조적 진화’를 주창했던 베르그송의 철학은 전후 프랑스 철학의 토대가 되었고 질 들뢰즈라는 걸출한 후계자를 낳았다.
 
 니체, 프로이트, 베르그송을 삶과 죽음의 연대기를 통해서 호명했지만 이것은 단순한 숫자 나열과 우연의 퍼즐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의 삶과 저서는 19세기에서 지금-여기를 향해 발신한 음울한 메시지와도 같다. 신을 거부하고 맞이한 두려움과 허무를 이기기 위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고 했던 니체는 21세기의 인간에게 말을 건넨다. “그대들은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들의 저서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내면에는 강력한 아버지(지도자)에게 기대려는 나약한 아이가 살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베르그송의 저서는 가벼운 웃음을 반복하면서 공감의 능력을 잃어가는 당신을 향해 묻는다. “당신의 웃음은, 어쩌면 집단적 공범의식의 발로는 아닌가.” 특히 일본과 한국에서 최근 사회문제로 떠오른 극우사이트들이 모두 ‘유머’를 표방하면서 확장되었다는 사실은 베르그송의 질문을 더욱 문제적으로 만든다.
 
 소비에 몰두하며 삶을 소비하는, 현실에 대한 순응만이 가득한 ‘피로사회’에서 우리는 점차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하는 중이다. (질 들뢰즈는 이렇게 전락하는 현대인을 ‘소진된 인간’으로 명명했다) 각기 다른 삶을 살았던 세 사람은 비극을 마주하며 생을 마감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의 삶과 저서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치열하게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았으며, 다가오는 파국 앞에서도 변함없이 인간을 응시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19세기에 발신한 그들의 메시지를 지금 우리가 수신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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