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면 그는 심장이 없는 자다. 40대에도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그는 뇌가 없는 자다.” 영국 수상 처칠의 말이다.(그동안 칼 포퍼의 말로 자주 오용되었다) 이 말은 그동안 극우 세력들에 의해서 조롱과 냉소의 도구로 악용되곤 했다. 지금처럼 이념이 ‘낙인’와 ‘배제’의 수단으로 작동되는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개혁’과 ‘변화’, 혹은 ‘평등’과 ‘정의’를 내세우는 자들은 궁지에 몰리기 십상이며 지배층의 가치나 행위를 비판하고 다른 주장을 펼치는 자는 조소의 대상으로 전락하거나 조용히 밥줄이 끊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침묵을 강요당한다. 이 과정에서 ‘차이’에 대한 감수성은 현저히 줄어든다. 차이에 대한 감수성이 사라진 공백에는 이내 폭력과 파시즘이 들어선다.
 

  이탈리아 출신 철학자 알베르토 토스카노(Alberto Toscano)는 최근 국내에 번역된 저서 『광신』(문강형준 역, 후마니타스, 2013)에서 핍박받았던 ‘광신도’들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합리성이 지배하는 근대 이후 서양에서 광신은 사이비 종교부터 폭력시위에 이르기까지 사라져야 할 ‘악’으로 표상되었다고 주장한다. 토스카노가 역사를 추적하면서 호명한 광신도는 천년왕국운동, 노예폐지론자, 농민혁명가들, 아나키스트들, 마르크스주의자들, 이슬람교도들이다. 토스카노는 이 광신도들의 핍박받은 역사로부터 지금-여기에서 ‘악’으로 낙인찍힌 자들에게로 시야를 넓히고 그들에 대한 편견을 전복하는 사유를 펼친다.
 

  토스카노의 시선을 한국의 현실에 적용한다면 이런 식이다. 희망버스에 몸을 실은 자들, 정리해고에 반대하여 크레인에 오른 자들, 거대기업에 맞서 길고 무모한 싸움을 벌이는 자들, 고압 송전탑 앞에 드러누운 자들, 타락한 정치를 향해 촛불을 밝힌 자들은 모두 ‘광신도’의 일부다. 이들은 사회의 주류에 의해서 불순세력과 외부세력, 순진한 이상주의자로 낙인이 찍힌 채 배제된다. 토스카노는 광신을 터부시하고 격리와 배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경직되며 변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잃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열거하면서 현대의 광신도들이 오히려 ‘자본주의의 외부를 사유하는 자’라고 다시 정의한다. 광신의 생성요인을 자각하지 못하고 낙인찍기가 만성화된 사회는 발전의 동력을 상실한다는 토스카노의 지적은 오늘날 우리 사회를 해석하는데 매우 적실하다. 광신을 애써 외면하는, 무지한 자들이 지금도 공포를 느끼고 불안을 내면화하는 악순환을 반복하는 중이니까. 무지는 공포를 낳고 공포는 불안을 낳는 법이다.
 

  그러면 ‘차이’를 받아들이는 감각과 전복적 사유는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가. 사회의 안정을 위협할 것 같은 광신도들을 인정하는 것이 불편한 자들에게는 이진경의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후마니타스, 2011)에 대한 일독을 권하고 싶다. 책의 부제는 ‘미천한 것, 별 볼일 없는 것, 인간도 아닌 것들의 가치와 의미’이다. 이진경은 그것을 장애자, 바이러스, 온코마우스(유전공학적 변형에 의해 탄생한 존재), 동성애자, 프레카리아트(노동자계급이 하나의 ‘계급’으로 ‘완성’되는 것을 어렵게 하는 비정규직)로 규정하면서 ‘어디에서나 존재하지만 우리가 애써 외면하거나 잊고 사는 존재’들로 시선을 돌린다.
 

  이 책은 사회 주류에 소속되는 것을 욕망하는 자들이 뜻밖의 것들과 대면할 때 느끼는 불편하고 불안한 감정과 기분을 ‘불온함’이라 정의하면서, 그 불온함을 통해 우리가 ‘온전’하고 ‘정상’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얼마나 빈약한 토대 위에 놓여 있는지를 되묻는다. 장애자들을 응시하면서 자신의 온전함이 일종의 ‘선물’임을 깨닫고, 보이지 않아도 때로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활동을 인식하면서 인간의 오만을 자각하게 되리라. 동성애자를 향한 혐오에 내재된 폭력성을 인식하고 이질적인 존재와의 공존을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가 비정규직으로 전락하면서도 연대를 기피하는 현실을 돌아보며 노동계급 분열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된다. 이렇듯 불온한 존재들에 대한 응시는 인식 전환과 ‘전복적 사유’의 한 과정이다.
 

  토스카노가 ‘광신도’라는 선명한 존재(세력)들을 통해서 경직된 사회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경고하고 열정과 해방, 혁명의 가능성을 타진했다면, 이진경은 미천하고 사소한 존재들을 응시하며 역설적으로 ‘정상적인 것’에 대한 허술한 맹신을 지적하고 공존의 가치를 묻고 있다. 아울러 두 사람이 비슷한 목소리로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먼저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감성을 시급히 회복해야 한다는 것. (공존에 대한 섬세한 감각이 사라질 때, 그 사회는 곧 지옥과 다름없다.) 또한 배제되고 낙인찍힌 존재들을 향한 모욕을 전복적 사유의 계기로 역이용해야 한다는 사실. 이를테면 첫 문단에서 인용한 극우세력들이 자주 악용하는 처칠의 말을, 박가분의 표현을 빌려 그들에게 이렇게 되돌려 줄 수도 있으리라. “마르크스를 읽지 않은 20대가 바보라고 할 수 없지만, 40대를 넘어서도 마르크스를 진지하게 읽지 않았다면 바보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정현 문학평론가(국문과 박사수료)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