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금은 서울역 무료 진료소에서
  • 엄은지 기자, 최아라 기자
  • 승인 2012.12.09 1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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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도 저희에겐 똑같은 환자이고 친구입니다

 

 

프롤로그
의대생은 공부만 할 것 같다는 편견은 잠시 접어두자.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봉사에 일념인 청년들도 있다. 바로 중앙대 의대동아리 ‘청진’ 을 비롯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소속 의사들과 전국 의·약학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다.
1998년 11월부터 인의협과 서울역 노숙인 무료 진료소 다시서기 진료센터의 후원으로 시작된 진료소는 매주 금요일 저녁 7시 30분부터 서울역 8번 출구통로에서 시작한다. 진료소는 모두가 쉬는 ‘빨간 날’에도 어김없이 문을 연다. 그들에게 공휴일까지 봉사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자 “빨간 날이든 쉬는 날이든 매주 금요일마다 무료 진료소 찾는 노숙인과의 약속은 지켜야죠.”라고 반문한다.
아직은 의대생에 지나지 않아 정식 ‘의사’로서의 역할은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청소하고, 줄 세우고, 노숙인과 말동무가 되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말한다.
“환자의 사회적 신분도 명예도 중요치 않아요. 구분하는 행위조차 무의미한 거죠. 여기선 모든 환자가 다 똑같을 뿐이에요.”
학생들 앞에만 서면 어린애가 되는 이야기부터 가슴을 먹먹한 노숙인들의 이야기까지. 그들의 D-day가 지금 시작된다.

인물소개

 

오준석씨
“‘노숙인’들? 제겐 그냥 아저씨, 할아버지에요.”라고 말하는 의과대학 4학년 09학번 오준석씨. 서울역에서 노숙인을 대상으로 의료봉사를 해온지도 올해로 4년째다. 진료소의 터줏대감인 그는 학생들이 우물쭈물하는 일도 능숙하게 해내며 ‘문제해결사’로 통한다.
그의 노숙인에 대한 남다른 친화력은 봉사 첫날부터 증명됐다. 같이 서울역에 도착한 동료들이 먼저 봉사활동 현장에 떠났을 무렵, 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난 서울역으로 향하던 노숙인과 함께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였을 정도로 넉살이 좋다.     
원래 타인의 삶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그는 소외계층의 희로애락이 궁금해 서울역에서 노숙인 의료 봉사를 시작했다. 자율적인 참여가 이뤄져 매주 봉사 참여 인원이 들쑥날쑥한 탓에 고난을 겪은 적도 있다. “사람들이 적을 때는 저 포함해서 3명 끼리 일했던 게 최고 기록이에요. 그땐 완전히 녹초가 됐었죠.”
그는 서울역 의료 봉사뿐만 아니라 다른 봉사에도 참여한다. 의료 환경이 열악한 전라남도 완도군의 작은 섬 소안도에 전국의 의대생들과 함께 모여 매년 의료봉사를 떠난다. 작년에는 그곳의 총대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열정이 넘친다.
매주 월요일마다 시험을 치러야 하는 치열한 본과 생활. 그는 학과 공부로 바쁜 와중에도 넘치는 에너지를 태우느라 학점도 멋지게 태워버렸다.

 

김동현씨
의과대학 2학년 11학번 동현씨가 서울역의 노숙인 진료소에서 봉사활동을 한 지도 어느새 2년이 됐다. “사실 제가 아버지와 사이가 별로 좋지가 않았어요. 사람들과 소통하는 능력을 기르면 아버지와의 관계도 좋아지고 장래에 의사로 일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서울역에서 노숙인 의료봉사를 시작하게 됐죠” 김동현씨는 봉사활동을 하며 노숙인들과 소소한 대화를 하면서 점차 그들과의 소통에 재미를 붙였다. 소통에 자신이 생긴 동현씨는 소원했던 아버지와의 관계도 좋아졌다. 
그의 선배인 오준석씨와의 인연은 의료봉사뿐만 아니라 단과대 동아리 활동에서도 이어진다. 선후배 간 질서가 엄격하기로 유명한 의대이지만 준석씨와는 일주일에도 서너 번씩 만나다 보니 허물은 찾아볼 수 없다. 의대의 풍물패동아리에서 동현씨는 장구를, 준석씨는 꽹과리를 연주하고 있다.
“우리나라 의료계의 시스템엔 사실 문제가 많아요. 전 그런걸 개선하는 게 꿈이에요”라며 당차게 꿈에 대한 포부를 밝히는 동현씨. 사실 당찬 포부 이면엔 의외로 낭만적인 꿈을 갖고 있다. 감성적인 그의 또 다른 소망은 바로 꽃집을 차리는 것. 꽃을 좋아한다고 수줍게 말하는 동현씨의 눈이 반짝인다. 

▲ 의료봉사가 끝나면 늘 찍는 단체샷! 주인공은 중앙대 의대동아리 '청진'멤버들


  S#1 세팅과정
진료 시작 40분 전. 진료소가 마련된 자리에 미리 와있던 환자들이 포진해 있다. 선두자리를 지키고 있는 환자들은 누군가 새치기 할까 봐 신경을 곤두세운다.  하나둘씩 도착한 학생들은 곧장 서울역 기계실로 향한다. 하루에도 수백 명이 지나치는 통로에 있는 2평 남짓한 비좁은 공간. 생김새와 달리 기계실은 온갖 물품들로 가득 차 있다. 특히 환자들에게 인기 있는 간이의자까지 있다. 진료 순서를 기다리기 위해선 간이의자만큼 중요한 게 없기 때문이다.
오후 7시부터 시작된 진료소 준비. 간이의자가 보급되자 환자들의 의자 쟁탈전이 시작된다. 오는 순서대로 자리를 배치하려 해도 쉽지 않다. 치열한 간이의자싸움이 진료 전쟁의 시작을 알린다.

▲ 의료봉사 시작전 약국파트 세팅 중

S#2 진료소를 닫아야 할 위기
“추워죽겠는데 왜 아직도 진료를 시작하지 않는 거야!”
순간 눈치 빠른 이준영씨(의학부 2)가 즉각적으로 상황을 수습한다. 벌써 봉사만 2년째. 이젠 눈빛 하나로 환자들과 통한다. 별 탈 없이 상황이 정리되자 접수대를 담당하던 여학생들이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쉰다.
다시 긴장감으로 휩싸인 진료소 앞. 평소 오후 7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시작되는 진료가 시작되지 않는다. 담당 의사선생님이 진료 날짜를 착각한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진료를 보느라 날짜를 착각했다고 한다. 애가 타는 학생들은 멀뚱히 8번 출구를 쳐다본다. 초조한 마음에 추위까지 겹치니 저절로 발이 동동 굴러진다.
그렇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나 보다. 급박한 순간 구원의 손길이 진료소를 향해 뻗쳐왔다. 그 주인공은 바로 서울역 근처 병원에서 근무하던 여자 의사선생님이다. 인의협의 다급한 부름을 받고 지인과의 저녁 약속도 뒤로한 채 한달음에 달려왔다고 한다. 그녀와 함께 온 지인은 졸지에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 아닌 춥고 소란스런 서울역에서 환자들과 저녁을 맞이한다.
그녀가 본진파트에 앉기 무섭게 환자들이 밀려든다. 몇 번 무료 진료소에서 봉사한 경력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만큼은 쉽지 않다. 마음의 준비 없이 달려온 탓인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오늘 오시기로 한 선생님 언제쯤 오시는 거죠? 연락 좀 해주시겠어요?”
애써 괜찮은 척 해보지만 떨리는 목소리만큼은 감출 수 없다. 불안감이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이에 오준석씨(의학부 4)와 이준영씨(의학부 2)는 핸드폰을 꺼내 담당 의사선생님에게 전화를 건다. 하지만 급한 마음을 알 리 없는 통화연결음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S#3 제 속도를 찾아가는 진료소
단정한 차림의 한 남자가 진료소 앞을 서성인다. 몇 번이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한 학생에게 다가간다.
“저… 오늘 진료 보기로 한 선생님 후배인데요. 대신 진료를 먼저 봐달라는 부탁을 받고 왔는데요.”
담당 의사선생님이 자신의 지각으로 환자들이 피해를 입을까 봐 미리 후배를 섭외했던 것이다. 그렇게 또 하나의 구원의 손길이 추가되자 본진파트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젠 본진파트의 속도가 너무 빠르니 약국파트가 뒤처진다. 경험이 부족한 학생들은 약을 제조하는 데만 수십 분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슈바이처(의료기록관리프로그램)도 작동이 잘 안 돼 말썽이다.
오후 8시 30분이 되자 드디어 담당 의사선생님이 도착한다. 헐떡이는 숨과 헝클어진 머리칼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촉박했을지 짐작이 간다. 누구보다도 담당 의사선생님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여자의사선생님은 그제야 마음을 놓으며 자리를 떠난다.

▲ 환자의 당뇨수치를 재기위해 수지침을 놓고 있다

 

S#4 눈코 뜰 새 없는 약국파트
투약파트 앞. 진료를 끝마친 환자들로 북적인다.
“이 XX. 나보다 늦게 온 놈이 왜 먼저 약을 타가! 의사샘들 여기 새치기해요. 새치기!”
일찍이 진료를 끝내고 투약파트에서 약을 기다린 환자는 자신보다 뒷사람이 먼저 약을 받자 열을 낸다.
문제는 스피드. 경험이 많은 학생들은 빨리빨리 제조할 수 있지만, 경험이 부족한 학생들은 약통을 찾는 일부터 쉽지 않다. 게다가 추위 탓에 손마저 굳었다. 알약을 한 알씩 집어야 하는데 자꾸만 머리와 손이 따로 논다. 그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던 최고참 양신호씨(의학부 5)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오준석! 빨리 약국파트 투입해!”
선배의 명령에 검약파트에 있던 오준석씨(의학부 4)는 최종 제조 확인 작업을 하다말고 약국파트로 투입된다. 능력자의 손길은 역시 달라도 다르다. 십 분이 채 지나기 전에 그 많던 처방전이 없어졌다. 덕분에 소란스럽던 환자들도 하나둘씩 약을 받아들고 자리를 떠난다.
“얘들아 나 봤냐? 나 이런 사람이야.”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S#5 한시가 급박한 진료소
“네가 의사냐? 너 나한테 잘못하면 내가 신고해버릴 거야.”
오늘따라 유독 신경질적인 아저씨 한 분이 온 파트를 들쑤시고 다닌다. 다짜고짜 학생들이며 경찰에게도 시비를 건다. 백태 낀 눈동자에선 살기마저 느껴진다.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오준석씨(의학부 4)가 나타나도 소용이 없다.
“저 아저씨 원래 선하신 분이에요. 항상 저희 수고한다고 응원도 해주시고요. 그런데 최근 병원에서 간암 판정을 받으셨대요. 하지만 아저씨가 치료받을 여건이 안 되잖아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늘 오던 무료 진료소를 찾으셨대요. 그런데 여기선 간단한 진료밖에 할 수 없어요. 저도 아직 학생신분이라 어떻게 해드릴 수도 없고… 마음이 참 답답하네요.”
그와 평소 친하게 지내던 김준형씨(의학부 2)는 쓸쓸히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본다.

▲ 예진파트에서 환자의 혈압을 재고 있다.

S#6 뒤늦게 찾아온 할머니 한 분
오후 9시 40분. 이제 환자는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더 이상 올 사람도 없어 보이건만 누구도 문 닫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 분이라도 더 오실까 기다리는 거예요. 사람 없다고 급하게 치울 필요 없잖아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타난 할머니 한 분. 예진파트 학생에게 대리처방을 부탁한다. 자신이 아는 할아버지 한 분이 감기를 앓고 있는데 몸이 불편해 거동을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함부로 처방을 내릴 수도, 약을 내줄 수도 없다. 의료법상 대리처방도 불가능하지만, 환자의 정확한 상태를 모르는 상황에서 처방할 수는 없다. 환자에게 더 큰 피해를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어디 계세요? 제가 의사선생님 모시고 가볼게요.”
그렇게 따라간 곳은 바로 진료소 옆에 있는 노숙인들의 터전. 서울역에서도 가장 추운 곳에 할아버지 한 분이 축축한 이불을 덮어쓰고 잠을 청하고 있다. 담당 의사선생님이 이불을 젖히자 백발의 할아버지가 보인다. 약주를 하신 듯 알코올 냄새와 온갖 찌든 냄새가 뒤섞였지만, 누구 한 명 표정을 찌푸리지 않는다. 담당 의사선생님이 내린 처방에 따라 약을 제조해온 학생이 할머니에게 약봉투를 건넨다.
“이렇게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할머니는 오래도록 학생의 손을 놓지 못한다.
오후 10시 14분. 이제는 정말 끝이다. 하나둘씩 빗자루와 쓰레기봉투를 들고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학생 모두가 반복해서 주변을 쓸고 닦은 뒤에야 끝난다.
D-day의 마무리는 역시 단체 인증샷! 어느새 환자 한 명이 슬며시 다가와 학생들 옆에서 V자를 그린다. ‘찰칵-’   

 

CUT 진료소의 보디가드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술에 취한 채 난동을 부리던 노숙인들이 단호한 목소리에 움찔한다. ‘서울역의 군기반장’ 장준기 경위(54)가 노숙인 진료소에 뜬 것. 그는 매의 눈으로 담배를 피우려는 노숙인을 발견한다. 노숙인의 손을 붙잡아 제지하고 잇따라 벌어지는 돌발상황을 침착하게 정리한다. 
장 경위는 2007년부터 이 진료소에서 학생들을 도왔다. 근처 쇼핑몰의 경호원이 아무리 말려도 들은 척 만 척하는 노숙인들조차 장 경위의 한마디면 순한 양이 된다. 하지만 그의 겉모습과 말투만으로 그를 판단했다가는 큰코다친다.
“저는 그들과 친구가 되기로 했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노숙인들을 나무라기보다는 살갑게 다가가는 쪽을 택한 장 경위. 노숙인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미용도 배웠다는 그는 오늘도 의료봉사에 오기 전 미용 봉사를 마치고 왔다. 노숙인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갖고 꾸준히 지켜봐온 그의 삶은 이미 언론에서 몇 차례 주목받았다. 오늘도 그가 있기에 진료소가 든든하다.  

NG 1. 날씨가 NG
눈보라와 찬바람이 들이치는 계절이다. 서울역 8번 출구에도 어김없이 추운 겨울이 찾아왔다. 8번 출구 안에 있는 갈림길의 오른쪽 통로엔 낡은 담요에 의존해 차디찬 지하철 바닥에 누워있는 노숙인들이 겨울바람을 몸으로 맞으며 잠을 청한다. 오른쪽 통로를 돌아 왼쪽 통로로 향하면 서울역에 상주하는 노숙인들을 비롯한 소외계층을 위한 의대 학생들의 의료봉사 현장이 보인다.
“검약파트가 출구랑 가까워서 더 추운 거 같아”고 말하는 여학생의 입에서 입김이 나온다.하지만 아무리 추워도 청결을 위해 장갑은 금물. 때마침 모처럼 선물 받은 캔커피를 핫팩 삼아 굳은 손과 언 볼에 온기를 전해본다. 노숙인들에게 먼저 나눠주는 배려도 잊지 않는다. 오늘도 그들은 눈사람이 되어 노숙인들과 함께 서울역 8번 출구를 지키고 있다.

NG 2. 어린이없는 ‘어린이로날정’
오늘도 ‘어린이로날정’은 논란의 대상이다. “여기 오는 환자들은 성인인데 왜 어린이 약이 있나요?” 어린이로날정을 보며 한 초짜 학생이 갸우뚱한 표정을 짓는다. “그거 아스피린 이름이야. 공부 좀 해.” 옆에서 도와주던 베테랑 오준석씨가 말한다.
의료봉사에 처음 참여해 적응기가 필요한 학생들은 약국에 배치된다. 처음이다 보니 약 이름을 헷갈린다거나 잘못 포장하는 실수가 종종 발생한다.
포장지 안의 약이 뒤바뀌었거나 테이블에 떨어뜨리는 경우 아주 소량이어도 곧바로 폐기처리 해야 한다. 추운 날씨에 둔감해진 손으로 약을 싸다 보니 손을 나중에 들여다보면 피나 상처가 남아있기 일쑤다. 각종 약의 사진과 명칭이 정리된 표를 들여다보며 약 봉지를 싸는 손길들이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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