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위 대표 인쇄기업 타라그룹 강경중 회장

 

“줄줄이 망하던 98년 IMF, 그때가 우리 기업 시작이죠”

 

▲ 타라 그룹을 국내 굴지의 인쇄회사로 만든 강경중 회장은 최근 외식산업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도전’이었다. 총학생회장을 하면 아무 기업이나 골라갈 수 있던 시절, 그는 편한 길을 포기하고 3형제와 창업에 도전했다. 대교가 회원 10만명을 돌파하고 잘나가던 87년, 건실한 기업을 박차고 나와 새 사업에 도전했다. 그가 전무이사의 널찍한 책상을 뒤로하고 선택한 곳은 20평짜리 인쇄소. 그리고 20년후, 불과 직원 5명에 인쇄기 2대를 두고 있던 영세 인쇄소는 매출 3000억원의 국내 인쇄업계 1위의 그룹이 됐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무한 도전’하고 있다. 바로 외식산업에 진출하는 것. 고향인 경남 진주의 음식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그는 진주비빔밥으로 진주음식을 알리는 것은 물론, 한식의 세계화를 꿈꾸고 있다. 그는 지금을 ‘내 삶의 3번째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의 3번째 시작을 함께할 한식당 ‘하모’에서 강경중 동문을 만났다.

 

▲ 진주 음식을 이야기하며 환하게 웃는 강경중, 박경주 부부. 박경주씨는 진주 한정식 ‘하모’의 음식을 총괄하고 있다.
-인쇄업에 20년 넘게 종사하시던 분이 외식사업을 한다고 하니 의외라는 반응이 많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의외라고 하죠. 말리는 사람도 많았어요. 요즘 문닫는 집이 한둘 이냐면서요. 하지만 외식산업은 제 추억이자 철학입니다. 시골에서 농사지으시던 부모님께서 저희 삼형제를 공부시키기 위해 진주에 와서 시작했던 일이 비빔밥 장사였어요. 부모님을 도와 불도 떼고 나물도 캐던 제 추억이 담겨있죠. 그리고 조선시대 음식을 그대로 재현해, 정통 한식을 세계로 알리려는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원래 형님과 대교를 창업하지 않았다면 비빔밥 장사를 시작했을 거에요. 꿈이 30년 늦춰진 셈이라고 볼 수도 있죠.”

대교그룹 전무이사 강경중

강경중 회장은 타라그룹을 설립하기 전, 대교그룹의 전무이사로 있었다. 대교그룹은 그의 형인 강영중, 동생인 강학중과 함께 삼형제가 75년에 설립한 회사다. 대교를 설립할 때 그의 나이는 25살이었다.
-대학교 3학년때 대교그룹 창업을 했다. 사업을 꿈꿨던 건가.
“삼형제가 교육사업을 해보자! 이렇게 꿈을 갖고 의기투합을 했던 것은 아니에요. 먹고 살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그당시 형님이 담배를 피우셨는데 담배 피울 돈이 없어 꽁초를 주워서 필 정도였어요. 우연히 일본에 계신 작은아버지의 소개로 그 당시 일본에서 유명했던 ‘구몬’을 들여와서 학생 5명을 가르치는 작은 과외사업으로 시작한 거죠.”
-대교가 회원 10만명을 돌파하던 87년, 삼형제가 힘들게 일군 기업을 돌연 박차고 나왔다. 사연이 있었나.
“형제간이지만 조직 내부에서 알력관계가 어떻게 없었겠습니까. 전무이사로 있을 때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면 뒤에서는 ‘너무 전무만 독주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그런 점도 마음에 걸리고, 이미  성장한 기업에서 안주하는 것보다 나의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컸던 것 같아요.”
-대교에서 나갈 때 어떤 사업을 하려고 했었나.
“사실 대교같은 교육사업을 하려고 했었어요. 10년 동안 배운 것이 교육사업밖에 없었으니까요. 나름의 노하우도 많이 쌓였고. 그런데 형님께서 동종업계에서 형제가 경쟁하면 껄끄럽지 않겠느냐며 반대하셨어요. 형제끼리 의를 상하면서까지 일을 시작해야하나 싶어서 교육사업은 포기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두 형제가 교육업계에서 양대산맥으로 시장을 장악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워요.(웃음)”
-퇴사 후 이민까지 생각했다고 들었다.
“막상 교육사업을 포기하니까 할 일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민생각을 해 캐나다에 이민신청까지 했던 상태였어요. 그런데 캐나다에 몇 번 다녀오다보니 아이들 생각에 못가겠더라고요. 한국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큰 꿈을 품고 살 수 있는 아이들인데, 그때만 해도 캐나다에 가면 교민사회에서 자영업밖에 할 일이 없던 시절이었거든요. 이민을 포기하니 이제 집안에서 백수가 되어 눈치가 안보일 수가 없죠. ‘그래서 출근이라도 하자’해서 찾았던 곳이 대교에서 학습지를 인쇄하던 작은 인쇄소입니다. 그렇게 인쇄업을 시작하게 됐죠. 그때 설립한 회사가 타라그룹의 전신 ‘바른인쇄’입니다.”

 


 타라그룹 강경중 회장

-‘전무 이사’가 아니라 ‘회장님’이 돼 기뻤겠다.
“하지만 대교와 규모를 비교하면 상대가 안됐죠. 처음 시작했을 때는 장안동에 겨우 20평짜리 사무실이 있었고, 직원 5명과 마스터 인쇄기 2대로 시작했으니까요.”
-우려와는 달리 자리를 빨리 잡은 편이다.
“처음엔 구몬수학을 들여와 학습지를 인쇄했었습니다. 학습지 크기가 보통 용지보다 작아서 우리나라 기술로는 그 크기의 종이를 인쇄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큰 종이에 인쇄한 후 수작업으로 하나하나 자르던 시절이었죠. 그때 일본에서 종이를 작은 크기로 인쇄할 수 있는 설비를 들여왔어요. 아마 우리 회사가 처음이었을 겁니다. 물어물어 회사를 찾아내 발주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죠. 그 이후부터 회사가 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본격적으로 인쇄업을 시작한 시기가 98년도부터였다고 생각해요.”
-98년이면 IMF로 여러 중소기업이 도산하던 시절 아닌가.
“사실 98년도 전까지만 해도 저는 인쇄사업을 하는 것을 싫어했었습니다. 지금은 인쇄업계가 많이 깨끗해졌지만 그때만 해도 인쇄산업은 제조업이라기보다 영업이었어요.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뒷돈, 인맥, 접대가 없으면 팔기 힘들었습니다. 이런 산업의 성격이 저랑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기업을 계속 이어가야 하나 고민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한번은 골프를 배우러 회사를 떠난 적도 있습니다.”
-골프라니?
“골프 시니어 프로선수를 하기 위해 골프 유학을 갔었어요. 그런데 마침 IMF가 터지더군요. 그러자 ‘회장님 안들어오시면 저희 큰일 납니다’고  한국에서 난리가 났죠. 어쩔 수 없이 한국에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생각했죠. ‘이게 내 운명인가보다.’ 그렇다면 이왕하는 것 열정적으로 시작해보자고 마음 먹었습니다.”
99년 바른인쇄는 타라그룹으로 사명을 바꾸고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책 대신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고, 집집마다 프린터기가 보급되며 인쇄산업은 사양산업의 길을 걸었다. 여러 기업들이 줄줄이 인쇄산업에 등을 돌렸다. 하지만 타라그룹은 20년 넘게 꾸준히 성장하며 직원 500명과 4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회사가 됐다. 지난해엔 연매출 3000억을 기록해 인쇄분야 국내 1위 기업으로 우뚝 섰다.
-사양산업을 걷고 있는 인쇄산업에서 꾸준한 성장을 하고 있는 비결이 뭔가.
“인쇄산업이 사양산업임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봤어요. 사양산업이라면 오히려 경쟁회사가 적어집니다. 대기업이 진출할 염려도 없고요. 또 자신만의 특별한 노하우가 있다면 독점적 지위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산업규모는 줄지만 점유율을 높인다면 매출은 늘겁니다. 예를 들어 100조 규모의 산업에서 10%를 점유하다가 사업규모가 줄더라도, 50%를 점유하면 되니까요. 오히려 사양산업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갖고 있다면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도전정신이 남다른 것 같다.
“제 모니터에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다’라는 문구가 항상 붙어있어요. 이 이야기 할때마다 아내는 항상 ‘당신은 뭘 그리 수많은 시작을 만들어 피곤하게 사시냐’고 해요. (웃음) 그러나 저는 도전을 즐깁니다. 그래서 사업을 하는지도 몰라요. 끊임없이 새로움을 만드는 것이 좋고, 제 작품을 만드는 것이 행복해요. 물론 도전을 하면 위험이 따르죠. 10개 중 7개 실패하면 어때요. 야구에서 3할 타율이면 대단한 거 아닌가요? 끊임없이 도전해야합니다. 외식산업도 다들 말렸어요. 요즘 절반이상이 실패하는 게 외식사업이라고요. 하지만 저는 계속 갈겁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살지말라’ 그게 제 신조입니다.”


그는 매년 자신의 보유 주식을 직원들에게 나눠준다. 타라그룹의 자회사인 타라TPS의 시장가치는 주당 15만원 정도지만 직원들은 5000원에 주식을 살 수 있다. 보통사람들에게 자신의 몫을 나눈다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겠지만 그는 직원의 지분율을 51%까지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지금은 직원들의 지분율이 어느 정도 되나.
“20% 정도 됩니다. 직원들의 지분율을 51%로 만든다는 것은 직원이 주인인 기업을 실현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전에 ‘주인 의식을 갖자’는 구호를 외치는 회사가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구호를 외친다고 진짜 직원이 주인 의식을 가질 수 있나요? 주인은 직원도, 회장도 아닌 주주입니다. 그러므로 직원에게 주식을 나눠주는 것이 진짜 주인을 만들어주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본인에게 돌아오는 몫이 주는데 아깝지는 않나.
“제가 성인군자이기 때문에 직원들에게 주식을 나눠주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게 나눠주면 손해보는 것 아니냐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식을 보유한 직원들이 주인의식으로 열심히 해준다면 회사는 더 성장 할테고 제 지분은 적어도 돌아오는 몫은 많아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배를 타면서도 사공들이 ‘언제 다른 배로 옮겨탈 것인가’만 생각한다면 그 회사가 성공할까요?”


타라그룹에는 회장실이 없다. 강경중 회장은 다른 직원들과 같은 공간에서 업무를 처리한다. 회장이라고 ‘폼’잡지 않고 직원들과 격의없이 소통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타라그룹의 직원들은 매일 사내망 게시판에 일기를 쓴다. 여기엔 여러 직원의 아이디어를 수평적으로 들어야 한다는 강회장의 철학이 들어있다.


-회장실을 없애는 것은 파격적인 소통방식인 것 같은데.
“처음에는 회장실을 없애는 것도, 일기를 공개하는 것도 반발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정보가 수평적으로 공유돼야 한다는 생각이 컸어요. 요즘은 기계만 스마트한 것이 아니라 신입사원도 굉장히 스마트해요. 계층 간의 지식 격차가 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아이디어들이 수평적으로 공유되지 않으면 조직이 발전하기 힘듭니다. 수평적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 올해부터 전 직원이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기로 했어요.”
-회장님이 말단 사원에게 존댓말을 하면 오히려 불편해 할 것 같다.
“지금까지는 굉장히 반응이 좋습니다. 단순히 ‘님’자를 붙이는 식의 방법이라면 한계가 있죠. 하지만 회장실 벽을 허물고, 사원끼리 일기를 공유하는 것들이 모여서 기업문화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 회사는 중소기업이긴 하지만 직급이 팀원-팀장-임원-대표 4단계밖에 없습니다. 이것도 수직적 문화를 없애기 위함이죠.”
-공개일기를 쓰는 것에 특히 큰 반발이 있었다고 들었다.
“전 세계에서 사원 전체가 함께 일기를 쓰는 회사는 우리밖에 없을 거에요.(웃음) 처음 시작할 때는 반발이 엄청났죠. 개인적인 일기를 어떻게 공개적으로 쓰냐고 말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고 정 쓰기 싫으면 ‘쓰기 싫다’고라도 쓰자고 이야기했습니다. 점점 시간이 지나니 직원들도 잘 따라와 주더군요. 직원들의 이야기들을 모아 책으로 출판한 ‘액션다이어리’를 매년 만들고 있어요. 제가 가장 잘한 일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가보로 삼아 대대로 물려줄 겁니다.(웃음)”

 

▲ 학창시절 이야기를 떠올리며 미소짓는 강경중씨.

중앙대 법대 72학번 강경중

-어린 시절 꿈은 뭐였나.
“외부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었어요. 진주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매일 기차역에서 기차를 바라보며 ‘언젠간 기차를 타고 나가야지’생각했어요. 중학교 때 서울로 올라와서는 김포공항에 갔지요.(웃음) 하늘 높이 오르는 비행기를 보며 세계로 뻗어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법대에 진학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그때는 법대 가야 출세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니까요. 무조건 법대가 최고여서 법대에 왔어요. 사실 사법고시도 준비했었어요. 3~4시간 자며 8개월 정도 공부하다보니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포기했어요.(웃음) 그때가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잘한 결정인 것 같아요. 35명 동기 중에 사시 1명, 행시 2명 합격했는데 제가 그중에 들었을 것 같지도 않거든요.”
-대학교 3학년 때 대교그룹을 창업하셨다. 남다른 대학생활을 보내셨을 것 같은데.
“대학 시절 사시 공부를 그만두고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었어요. 그때는 학도호국단이라고 불렸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총학생회장이었던거죠. 학생회장을 학생들이 뽑는게 아니고 단과대 학생회장 중에서 학교가 총학생회장을 임명하던 시절이었죠.  그 시절 총학생회장은 정부에서 1, 2, 3지망 기업을 써내면 취업을 시켜줬어요. 그런데 전 그걸 마다하고 형님과 함께 창업을 했죠. 그게 대교그룹이었고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죠. 그런데 이게 두 번째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저의 ‘작품’을 만들어나가는 삶이 저에게는 의미가 크니까요.”
-중앙대의 변화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바가 있나.
“사실 기업인의 입장에서보면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모교에서 교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한 동기말에 따르면 자기는 너무 많이 변해서 힘들다고 하는데, 이건 변한 것도 아니에요.(웃음) 더 많이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09년부터 타라장학금을 출연하고 있다.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
“중앙대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입니다. 부모님을 존경하고 감사하는 것처럼, 내 하나인 중앙대가 소중해요. 장학금은 내 삶의 근본을 있게 해준 데 대한 보답이죠.”
-마지막으로 동문과 재학생들에게 한말씀 부탁드린다.
“동문들에게는 학교에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는 것을 부탁드리고 싶어요. 발전기금을 많이 내면 좋겠지만 그것도 학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먼저 바탕이 되야 한다고 생각해요. 후배들에게는 지금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중요해요. 후배들이 관계를 소중히 생각하는, 남의 머리와 가슴을 빌릴 수 있는 리더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신입사원과 전국일주 떠난 회장님… “47일 동안 1800km 걸었죠”


  젊은 청년들만 국토대장정을 떠나는 것은 아니다. 국토대장정을 떠난 50대의 회장님도 있다. 바로 강경중 회장이다. 그는 매출 1000억원을 돌파했던 2006년, 회사의 앞날을 위한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직원들과 함께하는 국토대장정을 결심했다. 사람이 친해지기 위해서는 같이 먹고 자는 것이 최고라는 그의 지론도 한몫했다. 처음에는 팀장급 이상과 함께하는 것으로 기획했지만 그는 ‘회장이 사원 얼굴을 한 명이라도 모른다면 부끄러운 일’이라며 모든 직원들을 대상으로 전국일주를 하는 것으로 생각을 바꿨다. 막상 국토대장정을 추진하려니 걱정이 앞섰다. ‘과연 직원들이 즐겁게 참여할까?’ 고민 끝에 그는 직원들의 자발적인 신청을 받는 방법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신청자만 받아서 떠난다고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생고생하자는데 직원들이 신청을 할까…” 염려했다. 그러나 결과는 대성공. 당시 320명이었던 그룹 직원 중 250여 명이 신청했다. 신청자는 20대 신입사원부터 50대 임원까지 다양했다.


  일정은 경기도 파주 본사에서 출발해 속초로, 속초에서 동해안을 따라 부산으로, 그리고 해남을 거쳐 파주로 돌아오는 긴 여정이었다. 강회장은 전국 일주를 하고, 직원들은 1박 2일씩 릴레이로 그와 함께 걷는 것이었다. 그는 제주도 일주를 포함해 1746km를 47일 동안 걸었다. 평소에 운동을 않던 사원들은 1박 2일만 걸어도 힘들어 했다. 하지만 회장님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직원들은 바통터치하며 떠나지만 회장님은 계속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국토대장정을 “내가 진심으로 직원들과 함께하고 싶어 하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계기”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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