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훈,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12대 총장)
  • 김성호 기자
  • 승인 2013.01.0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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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들었으니까 이제 제자들한테 들려줘야죠”

박범훈

중앙대 12대 총장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작곡과 72학번)

▲ 지난달 27일 청와대 연풍문 소회의실에서 박범훈 교육문화수석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청와대 박범훈 교육문화수석(64)에게 소리는 연(緣)이다. 나팔을 잘 불던 경기도 양평의 한 소년이었던 그는 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한·일월드컵에선 주제곡을 작곡해 지휘봉을 잡았다. 박범훈 수석은 “소리를 통해 세상 모든 것과 소통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런 그에겐 또 하나의 인연이 있다. 4년 간의 학생, 15여년 간의 교수, 4년 간의 부총장, 6년 간의 총장. 박범훈 수석은 중앙대학교와 30년이란 오랜 인연을 맺고 있다. 이제 그는 중앙대 총장을 넘어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란 자리에서 조금 더 넓은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청와대 연풍문에서 만난 박범훈 수석은 조금 바래진 갈색 머리로 기자들을 맞았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백발에서 염색을 하신 것 같은데요.
  “까맣게 했었어요. 검정 머리가 흰 머리가 될 순 있어도 흰 머리가 검정 머리되긴 어렵잖아요.(웃음) 청와대 들어왔더니 제 흰 머리가 너무 돋보여서 칠해봤어요. 염색을 다시 할까 하다가 주변에서 지금부터 염색을 하지 않으면 제 임기가 끝나는 2월 24일이면 다시 흰 머리가 될 것 같다고 해서 놔두고 있어요. 요즘은 주변 관계자들이 ‘머리가 더 하얘지셨습니다’하면서 농담도 하곤 해요.(웃음) 지금은 염색물이 빠져서 노랗고 보기가 좀 그래요.”

<소통의 넓은 문, 청와대 박범훈>
-현재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 자리에 계십니다. 일반 사람들에겐 교육부장관이랑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될 것 같은데요.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이란 교육, 문화·예술, 관광, 체육, 종교 등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에요. 아침 7시면 교육과학기술부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업무 보고가 올라오기 시작해요. 그 중에서 중요한 업무는 부처 간에 협의를 해 대통령께 재가를 받아요. 이후부턴 그 업무가 소속기관에서 잘 이행될 수 있도록 지시하고 감독하고 있어요. 각 부처에 지시를 하면서 장관들이 업무에 책임을 가지고 성공적으로 이행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하는 자리죠.”


-교육문화수석으로서 2년 동안 주력한 부분도 있을 것 같은데요.
  “당연하죠. 일단 세상이 정말 빠르게 바뀌어요. 그래서 한 업무를 하더라도 장·단기로 나눠서 전체적으로 꼼꼼하게 검토해야 되요. 우선 5세 누리과정을 만들었어요. 정부에서 만 5세까지 유아교육을 무상으로 지원하는 사업이에요. 사실 이 사업과 관련해서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갈등이 심했거든요. 그래서 유아와 복지 분야에 관련된 교수들을 비롯해 각 구성원들과 매일 함께 논의했어요. 또 예술계열 관련 학과를 졸업한 학생들이 교사 자격증을 따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대학 내에서 문화예술교육사 자격증과 관련해서 교육하는 것을 의원법안으로 통과시켰어요. 요즘은 졸업만 하면 문화예술교육사 자격증이 나와요. 전국에서 분교가 있는 대학들을 통합시키는 작업도 했어요. 그래서 중앙대도 전국 대학 최초로 서울캠과 안성캠이 통합됐어요. 경희대와 한국외대도 본교와 분교가 통합됐죠. 이젠 캠퍼스도 분교가 아니라 하나가 돼야 하거든요.”


-현재 하고 계신 일이 중앙대 총장을 역임하셨을 때와 많은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차이가 많죠. 우선 업무량에 차이가 나요. 대학도 일이 많지만 여기는 대한민국의 교육과 문화를 책임져야 해요. 이뿐만이 아니에요. 지금은 해외까지 나가야하죠. 글로벌 시대에 전세계의 교육과 문화에 관련한 일을 봐야하니까 당연히 일이 많죠.”


-교육문화수석을 맡으시면서 주로 어떤 일이 재밌었나요?
  “재미를 느끼기 보다는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새벽 6시에 출근을 해서 많은 업무를 하면서 경험을 쌓았어요. 또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에요. 우선 대통령을 모시고 있으니까요. 정책 하나가 잘못 돼서 다음날 아침에 언론에서 뭐가 터질지 모르잖아요. 문화 관계나 교육 관계나 관광, 체육 등 지금 맡고 있는 분야에서 하나가 터지면 제 책임이거든요. 그러니까 마음이 편할 날이 없죠.”


-‘청와대 세대공감’이란 행사를 통해 대학생들과 만나기도 했는데요. 어떤 행사인지 소개해주세요.
  “청와대 사회통합 수석실에서 주관했는데 같이 참여를 했어요. 사회통합 수석실은 사회의 구성원들과 대화를 하면서 조율하는 부서에요. 사람 사는 이야기도 들어주고 어떤 점이 어려운지, 힘든지를 들어주는 곳이죠. 사실 이 행사를 우리 부서에서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우리 부서는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곳이라 부담이 많았어요. 예를 들면 ‘반값등록금’과 관련한 요구를 하는 행사에 참여한다면 바로 정책을 시행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참석은 했지만 주관은 못한 거예요. 다음 정부에선 이 행사를 교육 관련 부서에서 맡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중앙대와 30년, 중앙인 박범훈>
청와대 박범훈 교육문화수석과 중앙대는 뗄 수 없는 관계다. 중앙대는 청년부터 중년까지, 학생부터 총장까지의 박범훈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대와 30년, 중앙인 박범훈을 만났다.


-예술가 출신 박사가 종합대학 총장을 맡는 게 흔한 일은 아닙니다.
  “전 종합예술을 했어요. 날마다 작곡을 하면서 새로움을 창조했고 새로움을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화합을 했어요. 지휘자는 앙상블을 해야 해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모으지 않고서는 앙상블이 되지 않거든요. 그래서 모든 것을 융합적으로 펼쳐나가는데 예술보다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예술가적 기질이 총장을 역임할 때 나도 모르게 반영된 것 같아요.”


-총장을 역임하면서 가장 인상에 깊게 남는 일이 있으신가요?
  “중앙대가 어려운 시절에 학교를 다녔던 재학생들에게 너무도 미안하면서 고마워요. 그 당시 등록금을 엄청 올렸거든요. 당장 학교를 운영할 돈이 없으니 학교를 살리려면 등록금을 올릴 수밖에 없었어요. 알면서도 등록금을 올려야 했죠. 당시엔 교수들을 중앙대로 모시고 와도 다른 대학으로 금방 가버렸어요. 월급을 더 주니까. 대우도 충분하지 못했는데 저를 믿고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 준 당시 재학생들과 교수, 직원들에게 너무 감사해요.”


-총장 재직 시에 안타까운 일도 있었습니다. 학과 구조조정과 그 후폭풍으로 학교가 시끄러웠는데요.
  “사실 대학에선 반발이 심해 학과명 하나 바꾸기가 힘들어요. 당시 비효율적인 대학 운영을 개선하기 위해 세계적인 구조조정 대행회사들에게 위탁했어요. 재단의 힘으로 좋은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었던 거죠. 중앙대는 충분히 저력이 있었어요. 다만 어려운 조건으로 인해 주인이 없어 그 저력에 불이 붙지 못했던 거죠. 그때 재단이 새로 영입돼서 나사를 조였어요. 자신들이 투자한 대학이 일류대학이 돼야 하니까요.”   


-총장직을 마치고 청와대엔 어떻게 들어가시게 됐나요?
  “꼭 5년 전 이맘 때,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시절이에요. 김희수 전 이사장님을 모시고 대통령 당선자 면담을 했어요. 목적은 중앙대 재단을 인수할 기업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이었어요. 당시 중앙대는 생사기로에 놓여 있었어요. 재단이 대학을 전혀 돕지 못하는 상황이라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어서 재단이 바뀌지 않고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죠. 이 자리가 계기가 돼 그동안 육영사업에 관심이 없었던 대기업들이 서로 중앙대를 인수하겠다고 나섰어요. 그렇게 두산그룹이 중앙대를 인수하게 됐어요. 당시 이명박 정부의 초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후보로 지명됐으나 총장 임기도 남았고 특히 재단 교체 문제 등 중대한 문제가 많이 남았었어요. 그래서 대통령께 사양을 하고 총장 임기가 끝나면 어떤 일이든 맡겨주시면 하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이로 인해 중앙대는 좋은 재단을 맞이하게 됐고, 저는 총장 임기를 끝내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청와대에 들어오게 된 거죠.”


-교육문화수석으로서 현재 바라보는 중앙대의 모습은 어떤가요?
  “중앙대는 2018년 개교 100주년이라는 역사의 저력을 가지고 새로 태어났어요. 역사가 없다면 걸음마부터 다시 배워야겠지만 우린 역사의 저력을 가지고 있으니 바로 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곳에서 보니까 중앙대는 재단이 바뀌고 그 짧은 기간에 열심히 뛴 것 같아요. 뒤에서 밀어주니까 잘 뛸 수 있는 거죠.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에요. 이젠 채찍이 아니라 스스로 뛸 때가 온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선 대학문화가 바뀌어야 해요. 중앙대 내 모든 구성원들이 소신껏 일해야 해요. 명예와 제도에 의해서 뛰는 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어요. 이 문화는 재단과 대학 운영자들이 바꿔야 해요. 앞으로 대학 내 신바람 문화를 만들어 신바람 나게 일하면 좋겠어요.”  

<평생 소리연(緣), 국악인 박범훈>
  중앙대에선 서양음악 작곡을 전공했지만 지금은 ‘국악인 박범훈’이 우리에게 더 익숙하다. 그는 한국적인 소리가 좋아 역사 음악을 공부하다보니 불교 음악까지 관심이 생겼다고 한다. 불교 음악 하나 없던 한국 불교계를 위해 작곡도 쉬지 않았다. ‘대한민국 모든 사찰에 박범훈과 함께 방문하면 밥 얻어 먹는다’는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음악은 어떻게 시작하시게 됐나요?
“난 원래 고향이 양평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블라스밴드에서 나팔을 불었어요. 음악이 좋아 중앙대 작곡과를 졸업했어요. 공부를 더 하고 싶어 유학을 가려 했죠. 그런데 가정 형편이 어려웠어요. 가까운 일본에 동양 최고의 무사시노 음악대학이 있었어요. 그런데 중앙대 졸업한 것을 인정을 안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시험을 봐서 다시 1학년으로 입학해 대학원까지 수료했어요. 그렇게 10년이 흘렀어요. 그 때 한국의 한 대학에서 교수직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어요. 졸업증명서가 필요하다고 하길래 중앙대에 방문했죠. 그 때 학부 시절 교수님을 만난 거예요. 교수님이 ‘어딜 가냐, 모교로 와야지’해서 중앙대로 오게 된 거예요.(웃음)”


-서양음악을 전공했지만 국악인으로 불리는데요.
“특별한 사연은 없어요. 워낙 국악과 관련한 작품을 많이 쓰다 보니까 그렇게들 부르는 거 같아요.(웃음)”
-불교 음악도 많이 작곡하시던데요.
“국악이 따지고 보면 8할이 불교에서 파생됐어요. 특히 동양음악은 유·불교가 모체에요. 그래서 역사 음악을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불교 음악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죠. 불교 음악과 관련한 책을 쓰기도 했어요.”


-일반인들에겐 불교 음악이 굉장히 생소할 것 같은데요.
  “그럼요. 예전에는 불교계에서 작곡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음악을 가사만 바꿔서 부르기도 했어요. 그것을 불교다운 음악으로 바꾸는 운동을 제가 했죠. 불교가 항상 특정 국가에 유입되면 그 국가의 토속 종교와 융합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한국에 유입된 인도 불교도 한국 불교가 되는 거죠. 이런 불교는 하나의 종교라기보다는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한·일월드컵 등 대규모 국제 행사의 주제곡 작곡을 맡았는데요.
  “당시 저보다 유명한 교수들도 많았죠. 하지만 한국적인 음악과 서양 음악 모두를 알고 있고 융합적인 작품을 쓸 수 있는 사람을 찾았어요. 그래서 뽑혔던 것 같아요.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음악을 일찍 공부했던 게 도움이 됐죠.”


-현재 수석을 맡으시면서 음악 작업은 계속 하셨나요?
  “못하죠.(웃음) 너무 바빠요. 그래도 가끔씩 간단한 것은 컴퓨터로 작곡을 하곤 해요. 뭐든 틀어박혀야 작품이 나오죠.(웃음) 아직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음악은 나중에도 얼마든지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완전 한국적인 것은 한류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슨 의미인가요?
  “예술은 공감해야하는 거예요. 내가 아무리 좋은 연주를 해도 상대방이 공감하지 못하면 아무 필요 없는 겁니다. 나만 좋아서는 안 되죠. 외국 사람들을 공감할 수 있게 하려면 그 사람들의 특징도 잘 알아야 돼요. 예를 들어 외국 사람들이 한국 비빔밥을 좋아하잖아요. 비빔밥에 양배추, 빵 등 외국 사람들의 정서에 맞는 재료를 넣어도 상관없어요. 다만 거기에 가장 한국적인 냄새를 가진 고추장만 가지고 있으면 돼요. 고추장이 비빔밥의 생명이니까요. 이 고추장의 양으로 조절을 하는 거죠. 그런데 고추장을 너무 많이 넣으면 외국 사람들이 너무 매워하겠죠. 그럼 거부감이 생겨버려요. 바로 이 고추장을 어느 정도 탈 것이냐, 이게 바로 핵심이죠.”

▲ 박범훈 교육문화수석이 청와대 녹지원 용천교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제 생명 그 자체죠. 우리 딸 셋도 중앙대학교를 나왔어요.(웃음) 이게 사랑이 없으면 힘든 거예요. 큰 딸과 둘째 딸은 이미 졸업했고, 늦둥이로 나온 셋째 딸은 이제 4학년이 되요. 아빠 닮아가지고 전부 예술계에요.(웃음) 졸업생들은 자기가 나온 대학이 일류대학이 되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고 희망이죠. ‘내가 중앙대학교를 나왔다’, ‘아버지가 중앙대학교 졸업했다’고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다는 것. 이것 이상 행복한 게 어디 있겠어요. 긴 설명이 필요 없죠.” 

박범훈의 2013년

“고향으로
 돌아가 신바람 날
 일만 남았죠”


  박범훈 교육문화수석의 2013년은 벌써 특별하다. 이명박 정권의 마지막 단추를 잘 채울 채비를 갖추면서도 중앙대에서 새로운 단추를 채울 생각에 매일이 즐겁기 때문이다.


-2013년 신년계획은 잘 세우셨는지요.
  “깊은 계획이 있어요. 이제 중앙대로 다시 돌아가요. 돌아가는 데 참 부담없이 돌아가요. 교수직이 아직 6개월 정도 남았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그리웠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연구실도 하나 받았어요. 조용하게 벌써 꾸며놨어요.(웃음) 밤에는 좋아서 살며시 가서 앉아보기도 하고 그래요. 6개월이지만 조용히 대학으로 돌아가서 학생들과 함께 지낼 거예요.”


-교수로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려고 하니 많이 설레시겠어요.
  “사실 제대로 취업을 하지 못한 제자들을 위해 고향(경기도 양평)에 예술원을 지었어요. 학생들을 위해 반은 중앙대에 기증했어요. 제자들이 예술원에 와서 연주도 하고 야외극장에서 공연도 할 수 있죠. 고향에선 제자들과 함께 작곡도 하면서 작품을 쓰고 학교에선 수업을 맡아 학생들을 만날 거예요. 제자들, 학생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까 지금도 아주 기분이 좋아요.”


-신년을 맞이해서 중앙대 구성원들에게 한 마디 해주세요.
  “우리는 새로운 재단을 맞아서 참 행복합니다. 이 행복을 지속하기 위해선 함께 마음을 모아야 됩니다. 여기서 신바람 나게 뛰지 않으면 그 행복이 실망으로 변할 수도 있어요. 2013년엔 교수들은 기쁘게 연구하고, 교직원들은 기쁘게 업무를 보고, 학생들은 기쁘게 공부할 수 있는 중앙대가 됐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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