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래동이 어느 순간 예술가마을이 됐다. 2007년부터 저렴한 월세 덕에 예술가들이 몰려든 것이다. 여러 언론에서는 앞다퉈 '예술가 마을'로 발전해가는 문래동을 조명했다. 철공소와 예술가의 이색적인 만남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분위기는 시청자의 이목을 사로잡을 만 했다. 그러나 여기에 빠진 이들이 있다. 바로 오랫동안 문래동에 터를 잡고 철공소를 운영해 온 기술자들의 목소리다. '예술가 마을'로 단정지을 수 없는 문래동의 현재와 문래동을 둘러싼 여러 정책, 이로 인해 야기된 문래동의 위기를 살펴본다.

▲ 오후 12시 쯤 문래동 철공소 아저씨들과 예술가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아주머니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후 2시 문래동 철공소 단지. ‘쾅쾅 치지직 철커덩’ 무심한 듯한 표정으로 거친 쇠를 두드리는 철공소 기술자들. 억센 소리와 함께 철근이 잘리고 다시 트럭으로 옮겨진다. 일을 마친 철공소 기술자들은 먼지 묻은 장갑을 탈탈 털어 아무 대나 휙 던진다.

‘예술가마을’을 보기 위해 찾아간 문래동은 온통 철공소였다. ‘여기 어디에 예술가가 있을까’ 싶던 찰나. 해 질 무렵 색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철공소의 철제문이 닫히면서 숨어있던 그림들이 나타났고 특이한 차림을 한 젊은이들이 보였다. 어둠이 깔린 거리에서도 하나 둘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문래동을 실제로 본 후 사람들이 부르는 것 처럼 ‘예술가마을’이라 명명할 수 없었다. 그곳엔 활발히 움직이는 철공소와 그 속에 자리잡은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뒤섞여 공존하고 있었다.

 

▲ 예술가들의 작업실은 대부분 지하와 옥상 그리고 건물의 2~3층에 있다. 지하에 위치한 ‘대한공간문’은 예술가들의 다목적 활동 장소다.

 여기가 참 싸!

 문래동 철공단지에는 200명이 넘는 예술가들이 활동 중이다. 일러스트, 회화, 조각, 사진, 디자인 등의 시각예술부터 연극, 무용, 음악까지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한 동네 이웃사촌이다.

예술가들은 무엇에 끌려 문래동 철공단지 안에 자리를 잡았을까. 이런 질문에 예술가들은 일제히 입을 모은다. “여기가 참 싸!” 영등포구에 위치한 문래동은 70~80년대 빠른 속도로 철재산업이 발전한 곳이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제조업이 쇠퇴하고 중공업과 서비스업이 발전하면서 수도권 지역에 대형 공장 단지가 들어섰다. 수도권 공장 단지 보다 집적 이익이 떨어진 문래동 철공소들은 이 동네를 떠나기 시작했다. 대형공장과 철공소가 빠져나간 자리는 빈 공간으로 남겨졌다.

그때부터였다. 과거 홍대와 대학로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이 높은 임대료를 견디지 못하고 장소를 물색하던 중 문래동은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길게는 20년 정도 방치된 철재상가 2, 3층은 당시 월세 10만원이었고 이는 예술가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문래동 철공소의 매력은 저렴한 집 값 뿐만이 아니다. 낡은 건물을 관리하지 않는 건물주 덕분에 화가들은 자유롭게 벽을 스케치북 삼아 그릴 수 있었다. 시끄러운 철공소 소리 덕분에 밴드는 마음껏 드럼을 두드리고 기타를 칠 수 있었다.

복도 하나를 두고 다양한 예술가가 모이자 그들은 서로에게 창작의 자극제가 되었다. 함께 새로운 것을 만들어보고 싶은 욕구로 시작한 프로젝트는 2007년 ‘물레아트페스티발’이라는 이름으로 성장했다.

 

 죽은 공간? 무슨 소리!

2007년 이후 예술가들이 본격적으로 모이기 시작하면서 언론은 앞다투어 문래동을 보도했다. 언론은 ‘죽은 공간이 아름다운 예술 공간으로 승화되다’, ‘매캐한 공기가 자욱한 잿빛 골목의 변화’ 등의 제목으로 문래동을 소개했다. 사람들은 철공단지라는 ‘죽은 공간’에 예술가들이 ‘생명력’을 부여했다고 믿었다.

철강소 기술자들에게 문래동은 ‘죽은 공간’이 아니었다. 예술가들이 오기 전부터 그들에겐 생업의 터전이었다. 하지만 산업 구조의 변화로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제조업은 근대적이고 재래적인 것으로 저평가 받았다. 저평가 속에서도 철강소 기술자들은 꿋꿋이 문래동에 터를 잡고 철을 주물렀다. 철공소 기술자들에게 문래동은 다수 언론의 보도처럼 ‘매캐한 냄새가 나는 잿빛 공간’이 아니었다.

예술가들 또한 철공소 기술자들의 장인정신을 높이 샀다. 문래동의 한 예술가는 “진정한 장인 정신을 가진 분들이에요”라며 철공소 기술자들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요즘은 컴퓨터화된 기계를 사용해 쉽게 작업할 수 있지만 문래동 기술자들은 손수 작업하기 때문이다. 문래동 예술가들은 장인정신 속에서 예술적 에너지를 얻는다.

 

▲ 무거운 철을 상시 옮겨야 하는 철공소의 특성상 문래동의 철공소는 늘 활짝 열려있다. 철을 자르고 있는 철공소 아저씨의 눈빛이 사뭇 진지하다.

화음과 마찰음

한 지붕 아래 철공소 기술자들과 예술가들은 이웃사촌간의 정을 나누고 있다. 2005년부터 시작된 ‘옥상도심텃밭’프로젝트는 예술가와 철공소 기술자를 옥상에 모이게 했다. 각종 쓰레기가 넘치던 옥상을 함께 청소한 후 모종을 심고 물을 주며 채소를 가꿨다. 일을 하다 허기가 지면 즉석에서 막걸리와 삼겹살을 먹으며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하지만 삶의 모습이 다른 집단의 이웃생활은 마찰음을 내기도 한다. 한 철공소 기술자는 “우리는 여기가 생업의 터전인디 매일 옥상에서 파티니 뭐니…”라며 손사래를 친다. 예술가들이 철공소 앞에 주차라도 하는 날이면 철공소는 한바탕 난리가 난다. 철공소 앞에 차를 세워두면 새벽 3~4시부터 포항 등지에서 오는 대형 트럭들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신경전도 존재한다. 문래동 철공소 기술자 대부분은 20년 넘게 이곳에 터를 잡고 있다. ‘대한민국 철강재 유통 1번지 문래동’에서 살았던 기술자들은 몇 년 사이 생긴 ‘예술가마을 문래동’이 반갑지 않다.

이렇듯 문래동 54, 58번지 일대에는 이질적인 두 집단이 만드는 오묘한 색과 소리가 함께 공존한다. 문래동은 예술가마을이라고도 철공단지라고도 명명할 수 없는 다중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문래동을 바라보는 두 시선

 

한편 문래동은 서울시의 엇갈린 정책 아래 있다. 문화를 원천으로 고부가가치를 창출해 도시의 경쟁력을 높이고자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도입한 <컬처노믹스> 사업 아래 서울시에는 9개의 창작공간이 설립됐다. 문래동에 개관된 ‘문래예술공장’이 그 중 하나다. 하지만 방향이 상반된 또 다른 정책이 존재한다. 바로 문래동 일대를 둘러싼 재개발 사업이다. 서울시의 <준공업지역 종합발전계획>에 따라 문래동 일대가 우선정비발전구역으로 선정됐다. 문래동이 재개발된다면 철강소와 예술가들은 새로운 자리를 찾아 떠날 수 밖에 없다. 서울시의 상반된 정책은 복합적인 요소가 엮인 문래동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미연 기자 MIYONI@cau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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